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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얼굴, 얼굴들, 나는 너다

고충환

이용재/ 얼굴, 얼굴들, 나는 너다 


눈물 시리즈. 처음부터 작가의 조각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눈물과 꽃.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유정신 혹은 자유영혼인 만큼 소재에 한계는 없지만, 적어도 전통적으로 볼 때 눈물과 꽃은 조각을 위한 소재로선 의외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눈물을 소재로 한 것에는 눈물을 삶에 대한 상징으로 본, 삶에 대한 작가의 반성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삶은 눈물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거대한 크기로 증폭된 눈물방울을 전시장 여기저기에 부려놓았다. 그리고 눈물은 꽃에 결부된다. 눈물을 흘리는 꽃이다. 일견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상황논리의 예시로 볼 수도 있겠으나, 알고 보면 비현실도 초현실도 현실에 대한 다른 방식의 증언과 다른 종류의 비전을 매개로 현실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현실에 연동된다. 그렇게 꽃은 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자유정신과 자유영혼을 상징한다. 그리고 삶의 절정을 상징한다. 그런 꽃이 눈물을 흘린다. 삶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다. 다르게는 바니타스와 바니타스의 동양적 표현에 해당하는 화무십일홍의 전언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눈물과 꽃을 하나로 결부시킨 작가의 조각에는 삶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스며있다. 개인적으로 예술가의 덕목으로서 연민을 꼽는 편인데, 작가의 조각에는 이런 존재에 대한 연민이 있다. 

표류, 떠도는 대화. 조각의 본질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매스(양감)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석 조각처럼 실제로 그런 경우를 비롯해 브론즈나 폴리처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속이 꽉 찬 덩어리처럼 보이는, 조각 고유의 성질이다. 이처럼 적어도 전통적으로 매스가 조각의 본질임을 인정한다면, 그 본질을 결여한 경우에 우리는 그걸 소위 탈조각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조각과의 차이를 매개로 조각의 표현가능성과 의미범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탈조각의 경향성은 눈물 시리즈와 변별되면서 이후 작가의 조각을 특징짓는 성질이 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일련의 시리즈 작업에서 일종의 망조각을 예시해준다. 하나의 모나드를 반복 집적시켜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최종적인 형상을 만드는데, 작가의 경우에는 주로 돌 혹은 바위를 만든다. 하나의 단위구조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보면 일종의 모나드조각 혹은 모듈조각으로 볼 수도 있겠다(한편으로 작가는 눈물이 흘러 강을 이룬다는 의미의 누하 시리즈를 망조각으로 제작하기도 하는데, 이로써 비록 그 방법과 형식은 다르지만 여전히 눈물 시리즈며 그 주제의식을 확장 변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는 이 일련의 조각에서 작가는 마치 엑스레이필름에서처럼 속을 투과해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조각에는 속이라고 부를 만한 것(사물의 본질? 사물의 실체?)이 따로 없다. 이로써 겉과 속의 경계를 넘나들고,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문다. 있음과 없음의 다름과 차이에 대한 선입견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만든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작가는 <표류, 떠도는 대화>라고 부른다. 겉도 없고 속도 없다. 안도 없고 밖도 없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 모든 있음은 다만 마음이 떠올려주는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고 불교의 교리는 가르친다. 이런 미혹으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저마다 고립된 존재의 섬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고, 진정한 대화도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작가의 조각은 주지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적인 네트워크와 자화상 시리즈. 사전에 작가가 지나가는 말로 말해준 것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본 근작은 전작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달랐다. 그건 영락없는 연필 혹은 볼펜으로 벽 위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었다. 실제로는 벽 위에 설치한 조각이라고 했다. 작품을 찍은 사진 이미지로는 도대체 실제를 전달할 수 없다고도 했는데, 실물을 보고 나서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기왕의 작업에서 시도된 망조각을 또 다른 형식으로 변주해놓고 있었다. 각 돌과 초상이라는 소재 말고도 전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형과 비정형의 차이를 들 수가 있다. 한눈에도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 집적되는, 그래서 정형의 패턴이 두드러져 보이는 경우와는 비교돼 보였다. 이를테면 작가는 실처럼 가녀린 동선을 마치 연필로 그림을 그리듯 촘촘히 쌓아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 선과 선이 겹치는 부분에는 용접을 하듯 열을 가해 고정시켰다. 그렇게 순전한 선으로만 얼굴 그대로를 재현했다. 연필소묘가 그렇듯 선이 많이 포개진 부분이 어둡게, 그리고 선이 덜 중첩되거나 아예 빈 부분이 밝게 드러나 보이도록 음영을 표현했다. 엄밀하게는 음영을 대신하게 했다. 연필소묘를 닮았지만, 사실은 소묘가 아닌 조각이었다. 연필로 그릴 수는 있다 해도 그만한 밀도감과 정밀함을 조각으로 표현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였고, 그만큼 노동집약적인 경우로 보였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만들었다. 지인들의 얼굴을 만들었고, 자신의 얼굴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 <사적인 네트워크>와 <자화상>이라고 불렀다. 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했다. 주체는 타자를 전제로 한다. 주체를 주체로서 규정해줄 타자가 없으면 주체도 없다. 너로부터 건너온 것들(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나를 만든다. 그래서 랭보는 나는 곧 너(타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작가가 작업으로 호출하는 지인들은 사실은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부분들이고 성분들이다. 네트워크 곧 관계망이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 연기로 이해해도 되겠다. 이런 관계망이, 얽히고설킨 인연의 얼개가 망조각의 방법론에 부합한다. 아마도 망조각으로의 형식상의 변신을 꾀하면서 여기에 부합하는 적절한 소재와 주제를 모색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마침내 이를 찾아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아마도 작가의 주체는 현재 그대로 머물러있지는 않을 것이다(주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타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망(사적인 네트워크)이 형성되면서 덩달아 작가의 주체(자화상)도 변신할 것이다. 더불어 주변인들의 얼굴을 소환하는 작가의 작업 역시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항상성을 띠게 될 것이다. 이로써 주체란 그 자체 결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행하고 갱신되는 존재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자기반성적인 기질과 경향성이 농후한 자기얼굴과 지인들의 얼굴을 설치한다. 벽면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천장에 매달고 전면에서 조명을 때리면 벽면에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 자체가 조각과는 또 다른 자족적인 존재를 획득하는 그림자조각이다. 조각이 공간으로 확장되는 공간설치작업과, 조각이 그림자로 변주되는 그림자조각으로 조각의 표현영역이 확장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에선 일종의 연출에 대한 감각이 요구되는데, 연출 여하에 따라서 작업의 양상이 사뭇 혹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얼굴과 얼굴의 간격을 어떻게 하는지, 그 각도는 어떻게 하는지, 벽면과 얼굴과의 거리를 어떻게 하는지, 조명의 위치와 강도를 어떻게 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다양한 변수가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벽면과 얼굴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그림자는 크고 흐릿해진다. 그리고 그 거리가 가까우면 그림자는 작고 선명해진다. 그렇게 다양한 표정과 상황을 넘어 심리적인 분위기마저 전달할 수가 있게 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으론 조각과 그림자가 실재감을 놓고 서로 다투는 일이 발생한다. 더욱이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조각도 그림자도 하나같이 평면적인 연필소묘처럼 보이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뚜렷한 그림자의 경우에는 조각과 다투는 것을 넘어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를 전복시키고, 실상과 허상에 대한 선입견을 흔들어놓는다. 
이로써 다시, 존재란 있는 것인가, 아님 없는 것인가.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조각(존재)과 다를 바 없는 그림자(비존재?)는 존재인가, 아님 존재의 그림자인가. 조각과 회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허무는 작가의 작업은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존재론적 물음에 빠져들게 만든다. 실재와 그림자, 존재와 비존재, 있음과 없음이 차이를 넘어 상호 연동되고 연속되는 존재론적 지평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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