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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초롱/ 일상을 사는 사람들, 일상을 앓는 사람들

고충환

황초롱/ 일상을 사는 사람들, 일상을 앓는 사람들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거리, 지금 여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버스정류장, 시간),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지하철, 기차여행),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기다림), 꿈꾸는 사람들(꿈), 생각에 잠긴 사람들(문제, 허무), 그리고 실내의 정경(사유의 시간, 반성) 등등.  

황초롱은 일상을 그린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를 그린다. 여기서 그린다는 것(재현)은 본다는 것(관점)이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보고 사람들 밖에서 자기를 본다.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를 보고 자기를 통해서 사람들을 본다. 그렇게 본 사람들의 일상과 자기의 일상이 다르지가 않다. 사람들과 자기가 다르지가 않다. 따지고 보면 저마다 다른 스케줄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 스케줄의 다름은 일상이라는 같음 속에 묻힌다. 개별성이 보편성 속에 묻힌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자신의 일상을 그린 것이지만, 이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보게 만들고, 일상 일반의 됨됨이를 유추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삶 자체 혹은 존재 일반의 꼴을 추상하게 만든다. 
그렇게 유추되고 추상된 일상은 진부하다. 거리를 지나치고,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꿈을 꾸고, 생각하고, 이러저런 문제에 빠진다. 작가의 그림에서도 그렇지만, 일상에는 유독 기다리는 일이 많다. 꿈을 꾸는 것도 그렇지만, 기다리는 일은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다. 비현실을 사는 것이고 부조리를 사는 것이다(이를테면 고도를 기다리며). 현실과 현실 사이의 공백을 사는 것이고 무위를 사는 것이다. 현실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현실을 흘려보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소비한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적어도 기다리는 순간만큼은 현실에 속해있지가 않다. 이상(유토피아)이 그렇고, 공상이 그렇고, 어쩜 어느 정도 예술이 그렇다.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일상에서 권태를 보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외로움을 느낀다. 일상이 권태인 것은 반복에 대한 인식에서 유래하고(내일도 오늘과 다르지가 않을 것이다), 일상이 외로움인 것은 다름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깊다(나는 너와 다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람들 모두가 다르다). 존재론적 자의식과 관련이 깊고, 자기소외며 이방인의식과 관련이 깊다. 그렇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 모두가 외롭다. 사회적 주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사람들 모두가 외롭다. 그렇게 외로움은 사회적 주체들이 앓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징후며 증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쩜 일상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이런 징후며 증상을 파고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외로움에 형태를 부여하고 소리를 덧입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카치 식으론 일상의 총체성(진정한 일상 혹은 일상의 오롯한 전체)을 추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부함(일상의 외피)과 외로움(일상의 안감)이 들러붙어있는. 일상은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다. 겉보기와 속보기(실재)가 다르다. 범속하고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은 사실은 그 이면에 억압(외로움)을 내재화하고 있다. 라캉은 그렇게 내재화된 억압을 실재계라고 불렀고, 슬라보예 지첵은 불모의 사막이라고 불렀다. 작가는 어쩜 이처럼 진부한 일상에 가려진 저마다의 외로움을, 실재를, 불모의 사막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그림 제목에서처럼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진부한 일상을 그린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바로 그 일(억압된 현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진부한 일상에 가려 잘 안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작가의 이력은 특이하다. 200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레핀 부속 예술학교에 유학해 그 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그리고 2006년 레핀아카데미에 입학해 2011년에 졸업했다. 근 12여 년을 사실주의 아카데미로 유명한 레핀 예술학교에서 수학한 셈이다. 보통 대학과정을 유학하는 경우에 비해보면 이례적인 일이고, 기초학습과정이 바탕이 된 만큼 사실주의 회화 전통에 관한한 뿌리 깊은 이해와 탄탄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현재는 그 이해와 스킬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향후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사실주의 회화 전통이 원동력으로 작동할 것이고 인문학적 배경으로 작용할 것이다. 작가가 주제화한 일상이나 <지금 여기>라는 제목에 나타난 주제의식도 알고 보면 이런 사실의 인식과 예견을 뒷받침해주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실주의는 형식과 내용 모두를 아우르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사실주의는 형식적으로 사실주의적 재현방법을 의미하며, 내용적으로 현실의 반영을 의미한다(일각에선 현실을 반영한 그림, 내용을 강조하고 실천논리를 강조한 그림을 사실주의와 구별해 현실주의로 별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동시대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를 재현적인(구상적인)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를 작가의 경우에 대입해보면 일상을 사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가려진 저마다의 외로움(어쩜 존재론적인 외로움)을 형상이 있는 그림으로 조형하고, 감각적인 그림으로 되불러내는(외로움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기초과정이 탄탄한 편이라고 했다. 이는 그대로 작가의 독특한 작화방식이며 과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먼저 에스키스를 하고, 이를 명암이 있는 흑백그림으로 옮겨 그린 연후에, 최종적으로 색채를 덧입혀 그림을 완성한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그림이 있고, 세부적으로 세 개의 그림이 있다. 전자는 과정과 완성된 그림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경우에 해당하고, 후자는 과정 자체를 완성된 그림으로 보는 동시대적 경향에 해당한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의 독특한 작화방식이며 프로세스는 비록 학습과정에서 몸에 밴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생산된 그림 하나하나를 독자적인 그림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조각으로 치자면 먼저 축소모형을 만든 연후에 그 비율 그대로 확장시켜 최종형상을 만드는 경우, 조각 중에서도 석조와 같은 직조에서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는 방식의 경우, 그래서 하나이면서 동시에 두 개의 조각이 존재하는 경우와 비교해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작가는 전통적인 작화방식을 고수한다. 적어도 과정에 관한한 지금 같으면 컴퓨터나 포토샵으로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아가 아예 생략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작가는 여전히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회화의 특이성이 있고 독자성이 있다. 회화를 대하는 작가의 남다른 태도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아날로그를 대신할 수 없는 것, 직접제작방식을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있는 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경우, 그러면서도 그 자체 완성도도 높은 경우가 일련의 에스키스들이다. 작가는 에스키스를 위해 그림을 도입하고 사진을 도입한다. 더러 자기가 그린 그림의 이미지를 도입하고(자기차용), 때로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의 이미지를 도입한다(차용). 그렇게 도입된 부분 이미지들을 하나의 화면 속에 놓고 이리저리 맞춰본다. 무슨 퍼즐 맞추기에 비유할 만한 이 행위며 과정을 통해 사실은 화면구성에 대한 가능한 그리고 잠재적인 형식실험이 꾀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형식실험의 결과물이 보여주는 과정이며 완성도가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흡사 영화나 연극을 위한 콘티를 보는 것 같다. 그만큼 영화적이고 연극적이고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그리고 그 자체 예술가의 책(아티스트북, 예컨대 막스 에른스트의 로망콜라주)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알다시피 예술가의 책은 특히 개념미술 이후 개념의 한 표상형식으로서, 탈장르 이후 해체된 장르를 하나로 아우르는 한 경우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의 에스키스는 이처럼 최종 완성된 그림을 위한 밑그림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 때론 완성된 그림보다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별개의 그림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작가들 중엔 그림과 예술가의 책 작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드물지가 않다. 그림은 책 작업을 책 작업은 그림을 상호 대리보충하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보기에 따라선 향후 작가의 작업 영역을 확장 심화 시켜줄 계기로 봐도 되겠다(이미 그렇지만). 

학력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작가의 그림은 사실주의와 현실주의 미학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수과정에서라면 모를까 적어도 현재 그림이 전통적인 아카데미 풍의 그림은 아니다. 현실주의라고 해서 정치미술처럼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도 않다. 겉보기에 진부하고 평범하고 범속해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가려진 익명적인 사람들이며 보통사람들의 외로움을 그린다. 외로움의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것들은 결국 소통문제로 모아진다. 사회적 주체라는 가면 뒤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립된 섬처럼 느낀다. 때로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으면 마침내 가면과 자기가 동일시된다. 바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그러므로 사람들 저마다의 외로움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은 정체성 문제에 연동된다. 서두에서 작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보고 사람들 밖에서 자기를 본다고 했다.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를 보고 자기를 통해서 사람들을 본다고도 했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보면서 자기의 외로움을 본다. 정체성을 앓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정체성을 앓는다. 그게 일상이라는 바다에서 작가가 찾아낸, 그리고 그림으로 풀어낸(낼) 사실주의고 현실주의고 리얼리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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