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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태/ 역사 속 풍운아들, 세기의 코스모폴리탄들

고충환

홍순태/ 역사 속 풍운아들, 세기의 코스모폴리탄들 


여기에 세기의 인물들이 있다. 천상의 목소리 루치아노 파바로티, 악성 베토벤, 비판철학의 임마누엘 칸트,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관념철학의 플라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무지를 주장한(그리고 악법도 법이라고도 한) 소크라테스, 동화작가 안데르센,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르네상스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여기서 르네상스는 재생 곧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세기의 문호 괴테와 레오 톨스토이와 윌리엄 섹스피어, 공산주의를 주창한 카를 마르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그리고 여기에 인터넷으로 신세계를 연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알리바바 그룹의 창시자 마윈, 영화배우 찰스 브론슨,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축구황제 호날두, 인디언 체로키 추장, 현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 현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 <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 테레사 수녀와 프란체스코 교황과 예수,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 인도의 시성 타고르, 무폭력저항운동의 마트마 간디,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현 대통령, 소설가 이외수, 김정은 현 북한주석, 아베 신조 일본총리, 김수환 추기경, 성철스님, 법정스님, 법륜스님, 보리달마(줄여서 달마라고도 함), 달라이라마, 공자, 마오사상의 마오쩌둥, 흑묘백묘의 등소평, 현 중국주석 시진핑, 전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그리고 여기에 40이 넘으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한 에이브러햄 링컨에 이르기까지. 
전시 타이틀이 77인 조각전인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외에도 사람들은 더 많고, 작업실에는 이번 전시에 끼지 못한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정치인, 예술가, 철학자, 종교인, 연예인, 과학자, 발명가를 망라하는 한편, 산 사람도 있고 이미 죽어서 고인이 된 사람도 있다. 척 보면 알만한 동시대 사람들도 있고, 알듯 모를 듯 아득한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뭔가. 선남선녀가 보통사람을 의미한다면, 분명 선남선녀들은 아니다. 저마다의 분야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들이다. 
선남선녀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생각해보니 작가의 조각 중 여자(테레사 수녀와 피겨선수 김연아 정도)가 거의 없었던 것 같고, 상대적으로 남자가 눈에 띠게 많았던 것 같다. 역사의 주역들이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아서, 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페미니즘(그리고 타자론)의 시각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를테면 린다 노클린의 소논문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에서 제기된 문제가 그렇다. 결론을 말하자면 실제로는 있었지만 미술사서술주체에 의해 배제된 것으로 보고, 그렇게 배제된 역사를 다시 복원할 것을 주장하고 나온 게 소위 <신미술사>다. 다르게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위로부터의 역사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한(민속학으로 역사를 대체하고자 한) 아날학파의 역사서술에 대한 태도와 입장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이처럼 인물열전을 서술하고 기술한다는 것, 인물들의 연대기를 집대성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위 역사의 대표선수들을 발췌(샘플링)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마도 위인전집을 보고 꿈을 키운 작가의 유년의 추억과 교육환경과 같은,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인문학적 배경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동시대적인 위인전집을, 현대적인 인물열전을 조각의 형식을 빌려 재구성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여자는 남자에 비해 주름이 없고 피부가 매끄러운 탓에 특징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아서, 라는 작가의 얘기도 참고할 만하다.  

그렇게 작가의 손에 의해 빗어진 시대의 풍운아들이, 때론 순풍으로 그리고 더러는 격랑으로 한 시대를 몰아간 주역들이 우리 앞에 있다. 얼굴이 부각되는 인물초상들인데, 여기서 다시 링컨의 말을 인용해보자. 40이 넘으면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무슨 말인가. 사람은 인격체다. 인격은 표정으로 표상되고, 얼굴은 그 표상들의 총체다. 그러므로 선한 인격이 선한 얼굴표정으로 나타나고, 악한 인격이 악한 얼굴표정으로 표상된다. 얼굴이 무슨 지도(아니면 지문?)와도 같아서 선하고 악함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표정마저 가식적인 줄도 모른 채 가식적인 연기라면 모를까, 얼굴은 숨길 수도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선한 마음도, 사악한 마음도, 권위도, 예술혼도, 총명함도, 어리석음도 모두 얼굴 위에 낱낱이 표기되고 등재된다.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이런 얼굴 결정론이 사주팔자와 연결이 되면 관상학이 되고, 이데올로기와 연결이 되면 골상학과 인종학이 된다. 그렇게 운명론과 특히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오용된 역사가 있지만(심지어 예상되는 범죄인을 사전에 가려내고 관리하기 위해 전용된 일도 있다), 그건 다만 잘못된 역사며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한다. 말하자면 얼굴과 표정, 얼굴과 심리, 얼굴과 품성, 얼굴과 인격과의 상호연관성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렇고, 일반적으로 볼 때 그렇다. 
그래서 어렵다. 그래서 얼굴을 재현하기가 어렵다. 얼굴을 재현하는 일은 그저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옮긴다고 해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 모사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보이는 건 가시적이고 안 보이는 건 비가시적이다. 얼굴은 비록 가시적이지만, 이를 통해 비로소 그 감각적 실체를 얻는 인격은 비가시적이다. 결국 얼굴을 재현하는 일은 이런 비가시적 실체인 인격을 오롯이 되살리는 일이고, 어쩌면 그 사람 자체일 인격의 원형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런 인격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감각적 닮은꼴을 옮겨놓기만 한다면 그건 다만 죽은 초상이며 박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인격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일이 결정적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인격에는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없다. 선한 마음도, 사악한 마음도, 권위도, 예술혼도, 총명함도, 어리석음도 모두 마찬가지. 얼굴이란 얼의 꼴이란 말이고, 얼의 형태란 말이다. 얼이 머무는 집(굴)이란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왕(파라오)이 죽으면 왕의 영혼(카)이 들락거릴 수 있도록 왕을 닮은 초상조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얼굴의 이런 의미와 무관하지가 않다. 이처럼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없는 인격을, 얼을, 영혼을 재현하는 일이니 어렵기도 할 것이다. 
예술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마치 그 사람을 마주 보는 것 같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의 온기가 전해질 것 같은 사실주의조각에도 불구하고 사실 작가는 이런 비가시적 실체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가시적 실체가 보이는가.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이고, 얼이 보이고, 영혼이 보이는가.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그렇게 작가가 빗어낸 마주 보는 것 같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의 온기가 전해질 것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산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다. 심지어 정확한 얼굴이 알려지지도 않은 예수도 있고, 몇 줄 안 되는 최소한의 선으로만 전해지는 공자 같은 사람도 있다(예로부터 서양에선 모델링기법이 발달했지만, 동양에선 선으로 모든 사물대상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작가가 재현해놓고 있는 예수며 공자 같은 위인은 허구적 인물이고 가상적 인물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주지하다시피 작가가 궁극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것은 감각적 닮은꼴이 아니라, 인격이다. 인격이라는, 어쩜 추상적 실체다. 그와 관련한 전설과 설화, 역사와 대체역사와 같은 인문학적 사료를 근거로 인격을 추상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그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라는 주관적 개입이 매개가 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어제 TV에서 본 친근한 사람이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아득한 사람 모두가 사실은 객관적 사실과 작가의 주관적 해석, 실재와 가상이 그 경계 너머로 긴밀하게 상호 간섭하고 상호작용하는 능동적 창조행위의 산물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소성(2달 건조 후 900도 가마에 구워낸)한 테라코타 위에 옻칠을 해 생생함을 더한다. 보통 목가구나 목불 같은 목물에 옻칠을 하는 경우는 알려져 있지만, 작가의 예에서처럼 흙 위에 옻칠을 한 경우는 생소한 편이다. 그런 만큼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지난한 연구과정을 거쳐 찾아낸 기법이고 방법인 만큼 작가만의 독특한 예술혼을 담보하는 경우로 봐도 되겠고, 작가의 예술적 조각적 아이덴티티로 보아 무리가 없겠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들을 되불러오고 되살려낸다. 아마도 그렇게 앞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작가에 의해 호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호출행위는 그 자체 자기 완결적이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열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실은 점차 불어나는 사람들로 번잡할 것이다. 작가는 그 사람들과 더불어서 향후 세계 순회전시를 계획하고 있고, 차제에 그들을 위한 인물미술관 혹은 인물역사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중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때마침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시기에 맞춰 현장을 찾은 사람들이 역사 속 풍운아들, 세기의 코스모폴리탄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대면하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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