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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랑/ 밀양과 밀양 사이, 파주와 파주 사이

고충환

조세랑/ 밀양과 밀양 사이, 파주와 파주 사이 


유리구슬,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프린트 된 천막, 우산 형 간이차양 막, 양옥집, 철제 난간, 콘크리트 계단, 고량주병, 가깝게는 집 앞 놀이터에서 볼 법한, 아니면 놀이공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 이를테면 롤러코스터, 바이킹 범선, 회전 그네, 종이꽃 장식, 수정결정체, 빨간 속살을 드러낸 자른 수박, 울긋불긋한 깃발들, 만국기, 분홍색 칫솔, 분홍색 종이배, 공사장에서나 볼 법한 엷은 분홍색 스티로폼 더미, 붉은 벽돌더미, 공사장에서 자재를 임시로 덮어서 가려놓은 타폴린 방수 천, 포장용 비닐 끈, 크레인, 건축 중인 아파트(파주에는 유독 건축현장이 많다?), 얼룩무늬로 위장한 군 초소, 전쟁 시 차로를 차단하기 위해 도로에 설치한 콘크리트 방호구조물, 탱크 혹은 장갑차, 지뢰 표지판(파주에는 유독 군사시설이 많다?). 
그리고 여기에 철골 구조물, 버려진 장롱, 기차 건널목에서나 볼 것 같은 구형 신호등, DNA 유전자 염기서열구조, 바위, 불타는 양초, 방파제용 설치구조물 테트라포드, 화분, 구름, 아치형 문, 사다리, 날개를 접은 나비, 감시카메라, 레고블록, 속의 씨앗이 드러나 보이는 반절된 아보카도 열매, 빨래 빨 때 세탁기에 넣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오브제, 연잎, 체크무늬 바닥, 세월 호 희생자를 기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리본들, 이러저런 식물이며 화초들, 굳이 찾아보면 그 수종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나무들. 

이것들은 다 뭔가. 조세랑이 그린 그림 속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한눈에 그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있고, 무슨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어렵사리 찾아낸 것도 있다. 대번에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있고, 궁리를 해봐도 도대체 오리무중인 것도 있다. 그 그림이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것들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놓고 있어서 친근하고, 그것들을 배열하고 배치하는 방식이 생경해서 낯설다(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다). 도대체 이것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근거가 뭔지, 이것 옆에 저것이 놓이게 된 인과적 개연성이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것 옆에 저것이 놓이는? 상식이다. 선입견이다. 관습이다. 작가의 그림은 상식을, 선입견을, 관습을 배반한다. 의도적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만큼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일 것이다. 
알고 보면 상식도, 선입견도, 관습도 학습된 것이다. 누구도 이처럼 학습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는데, 바로 존재는 이미 특정 의미며 가치관으로 결정화된 세계, 관습세계 속으로 태어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걸 문제시한 게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다. 초현실주의 그림에 보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사물의 크기가 임의적으로 분배되고,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가 자의적으로 배치된다. 임의적이고 자의적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꿈의 논리(초현실주의 화법으로는 꿈의 형이상학)에 따라 사물을 재구성한 것이고 세계를 재편한 것이다. 실제로 꿈에 보면 사물이 그렇게 보이고 세계가 그렇게 보인다. 심지어 꿈이 열어 보이는 현실은 현실보다 생생하다.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 현실 자체, 현실의 원형일 수 있다. 그러므로 감각적 현실은 어쩌면 꿈에서 파생된 현실, 원형적 현실에 연유한 현실, 작은 현실일 수 있다(그 자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장자몽과도 통하는). 
그리고 화용론이 있다. 의미는 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사물 속에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사물의 의미가 결정되는 장소는 사물이 실제로 발화되는(놓이는) 지점인 상황논리에 연동된다. 그래서 상황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상황이 사물의 의미를 낳는다. 의미가 그렇고 관계가 그렇다. 여기에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거나, 내가 하는 말은 내가 아니라거나,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혹자는 유체이탈화법 운운하겠지만, 실제로 인간의 의식은 정주를 모른다. 결국 나는 지금여기에 있는 몸(헛몸?)이 아니라, 몸속을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 몸 밖으로 마구 옮겨 다니는 의식이다. 그렇게 나는 의식이다. 몸이다. 의식적인 몸이다. 의식과 감각이 상호 간섭하는 몸이다. 의식과 감각의 총체로서의 몸이다. 그렇게 내 몸은 의식만큼 멀리 가고, 의식만큼 확장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크 라캉의 확장되는 의식이 메를로 퐁티의 확장되는 감각과 만난다. 결국 세계란 그 자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과 감각에 연동된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가 재설정되고 의미가 재결정화 된다. 매번 그렇고 매순간 그렇다. 
의식은 정주를 모른다고 했다. 개연성 없이 흐르고(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기법), 정신분열증에서처럼 마구 건너뛰는(질 들뢰즈의 정신분열증적 분석) 의식은 생리적으로 잼 혹은 노이즈에 가깝다. 그렇게 인풋과 아웃풋이 따로 없는, 시점과 종점이 따로 없는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링크가 아니라면, 현실(아니면 현실인식?)과 생각, 기억과 추억, 소리와 냄새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총체(아니면 단순한 집합?)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렇게 매번 재설정되고 매순간 재결정화 되는 관계와 의미가 아니라면 작가가 그림 속에 세팅해놓은 관계며 의미의 독해는 요원해진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하나의 결정화된 의미를 제시하는 대신 다른 의미를 불러오는 의미, 다른 의미를 파생시키는 의미, 어쩜 선의미, 어쩜 의미의 재료들, 그리고 어쩜 그림 바깥에서야 비로소 결정화된 의미를 얻을 잠정적인 의미의 다발들을 제안해놓고 있는 것이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여기서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밀양은 원래 빽빽한 볕, 따뜻한 빛이라는 말이다. 볕이 좋은 마을, 빛고을 정도를 의미하겠다. 그 원래 의미를 영화를 만들면서 은밀한 빛, 숨은 빛, 그러므로 숨은 신(루시앙 골드만)이라는 의미로 의미를 틀었다. 그렇게 밀양이라는 영화는 밀양과 관계가 있기도 하고 무관하기도 하다. 
작가 조세랑은 현재 파주에 산다. 그래서 근작의 주제를 <파주>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파주를 배경으로 한 만큼, 파주를 주제로 취한 것인 만큼 파주에 대한 그림인가. 이를테면 파주에서의 소소한 생활사를 테마로 한 것인가. 아니면 파주에는 유독 건축현장이 많다거나, 군사시설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그래서 온 국토가 개발현장으로 멍든 개발공화국과 분단현실로 대변되는 현재 한국의 축도를 예시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림을 아무리 뜯어봐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가에게 파주는 다만 그림을 시작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림의 한 요소로서의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한 계기였다(그림을 이루는 요소로 치자면 현실 말고도 많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밀양과 관계가 있기도 하고 무관하기도 하듯, 작가의 그림에서 파주는 파주와 유관하기도 하고 무관하기도 하다. 빛고을 밀양이라는 배경이 없었더라면 숨은 신 밀양이라는 영화도 없었듯, 파주(Paju)라는 현실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재구성되는 현실(혹은 현실의 재구성?)이라는 다른 이름의 파주(Faju)도 없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에서 파주(Paju)는 파주(Faju)가 기생하는 숙주와도 같고, 현실은 재구성되는 현실이 기생하는 숙주와도 같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로부터, 생각으로부터, 기억으로부터, 추억으로부터, 소리로부터, 냄새로부터 이러저런 모티브들을 차용해온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차용된 모티브들로 빼곡하다. 빈틈이 없고 여백이 없다. 빌헬름 보링어가 추상충동의 전범으로 지목한 중세고딕양식의 공간공포(최소한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는)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공간강박의 숨 막히는 현장에는 현실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기억을 낳고, 기억이 추억을 낳고, 추억이 소리를 낳고, 소리가 냄새를 불러들이는 밑도 끝도 없는 생성과 순환의 무한반복이 있다. 의식과 감각이 서로 부르고 답하는, 종래에는 아예 한 몸인 무한 뒤섞임이 있다. 
생성과 순환이 뭔가. 그건 운동이다. 이행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밑도 끝도 없는 운동의 와중에 있고, 이행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운동, 그 이행이 정주하지 않는 의식과 통한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운동하는 의식(그리고 감각), 이행 중인 의식(그리고 감각)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식을 매개하는 그림 속 모티브들은 섬들이다. 단자들이다. 모나드들이다. 원자들이다. 그 섬들이 모여 세계를 일구고 허문다. 확장시키고 축소시킨다. 주름을 만들고 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어쩜 세계의 생성원리를 주제화한 것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의 개시라고 했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어쩜 파주(Faju)라는 세계가 열리는 역동적인 현장, 잠정적인 현장, 생생한 현장, 몽환적인 현장을 그린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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