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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양서류의 시점, 무당개구리의 울음

고충환

조명환/ 양서류의 시점, 무당개구리의 울음 


멀리 오페라하우스가 보이는 시드니, 올림픽 스타디움이 보이는 베이징,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뉴욕,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 구겐하임미술관이 보이는 빌바오, 금문교가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마천루가 보이는 시카고, 부산, 베니스, 마이애미, 밴쿠버, 히로시마, 리옹, 산토리니, 도하, 루체른, 홍콩, 두바이, 상하이, 싱가포르, 런던, 바르셀로나, 베수비오, 융프라우, 몽블랑, 후지 산, 매트호른, 그리고 구름과 비와 안개. 

도시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끝난다. 세계유명도시의 랜드마크에서 시작해 랜드마크와 키 재기를 다투는 세계 최정상 산봉우리들을 경유해 자연으로 끝난다. 여기서 랜드마크는 문명을 상징하고 도시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세계 최정상 산봉우리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정복욕)을 상징한다. 둘 다 바벨탑이 그 원형이다. 각각 한쪽에선 문명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자연의 이름으로 하늘에 닿고 싶은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표상한다. 
자연은 원래 숭배와 숭고의 대상이었다. 바라보기만 할 뿐 가닿을 수는 없는 영적 존재였다. 물활론과 범신론,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매개하는 영적 대상이었다. 인간보다 까마득한 이전부터 지구의 주인이었고, 인간이 시간을 발명하기도 전부터 지구의 주민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출현했다. 인간은 출현하면서 이성도 발명했다. 그리고 이성이 매개되면서 자연은 영적자연으로부터 도구적 자연으로 추방되고 인간에 종속되는 지위로 전락한다. 자연의 원래 지위는 무위였지만, 인간이 부여해준 위의 질서 속에 편입되면서 인간욕망에 복무하고 종사하는 대상으로 추락한다. 그렇다고 자연의 신분이 여전히 무위에 속한 것은 변함이 없지만, 여하튼. 그렇게 한쪽에 문명이 있고, 도시가 있고, 랜드마크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자연이 있다. 각각 인간 욕망의 좌우익에 해당한다. 랜드마크가 욕망의 성취를 자랑하고, 여전히 안개에 가려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 그래서 오히려 더 신비롭게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욕망에 신비감(후광)을 더한다. 

이 사진들은 다 뭔가. 작가 조명환은 이 많은 도시들, 랜드마크들, 산봉우리들, 그리고 자연현상들을 일일이 그 현장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한 사진들을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각 찬란한 문명(아마도 도시의 마천루와 랜드마크), 대지로부터(아마도 땅의 원형적 형상이며 지모를 상징할 세계 최정상 산봉우리들),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아마도 구름과 비와 안개). 그렇게 세 카테고리가 저마다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연결되게 했다. 흥미롭게도 그 카테고리는 사건 혹은 현상이 진행되는 순서처럼 보인다. 문명에서 자연으로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사건 혹은 현상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를 거꾸로 읽으면, 자연에서 다시 문명으로 순환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직선적 진행으로 읽을 경우에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문명 그러므로 패망하는 문명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 묵시록적 비전처럼 보이고, 순환적 진행으로 읽을 경우에는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재생을 무한 반복하는 우주의 섭리처럼 보인다. 
아마도 알만한 도시들은 물론이거니와, 여행상품을 선전하는 브로셔에서나 볼 법한, 더러는 이름마저 생소한 오지들은 다 찾아다닌 것 같다. 그동안 참 많이도 다녔겠다 싶다. 참 많은 시간을 팔고, 경비를 팔고, 발품을 팔았겠다 싶다. 그렇게 팔아서 작가는 뭘 얻는가. 아마도 그제 주제일 것이다. 작가의 사진이 담보하는 주제일 것이고, 작가가 자신의 사진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고 감각일 것이다. 실제로 작가의 사진은 메시지와 의미내용이 강한 다큐 혹은 르포처럼도 보이고(이를테면 내셔널지오그래피), 동시에 감각적으로도 꽤나 그 개성이 뚜렷한 것으로 보인다. 메시지와 의미내용 그러므로 주제로 치자면 문명과 자연을 대비시키는 것,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에 대한 무분별한 욕망을 경고하는 것, 환경재앙을 고발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섣부른 답을 내리고 보니 좀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빤한 걸 빤하게 재현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빤하게 재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덩달아 주제 역시 빤하지 않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바로 물이다. 물이 매개가 되면서 자칫 빤할 뻔 했던 주제도 빤하지 않게 만들고, 여기에 사진에다 작가 고유의 분위기며 질감과 같은 감각적인 성질마저 더한다. 결국 재현이란 해석의 문제인 것이고, 똑같은 대상도 어떻게 재현 곧 해석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진부해질 수도 비범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에선 물이 주연 같다. 이에 비해보면 도시도, 문명도, 마천루도, 랜드마크도, 산봉우리도, 나아가 자연마저도 그러므로 어쩜 욕망의 표상들이 그저 물을 위한 조연 같다. 그리고 그렇게 종래에는 욕망의 표상들이 물속에 잠기는 것 같고, 물이 욕망을 삼키는 것 같다. 

작가는 이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며 극적인 장면을 물속에서 찍었다. 물속에서 피사체를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서 카메라의 위치는 곧 시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물속에서 피사체를 보면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렇게 시점을 설정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설정된 시점을 작가는 양서류의 시점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사진을 대변하는 또 다른 주제다. 
그렇게 사진에서 물이 화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에 비해 물속에서 본 피사체는 아득하게 보인다. 선명하게도 보이고,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릿하게도 보이고, 처음 형상 그대로도 보이고, 왜곡돼 보이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양서류가 보기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동원해 유동적인 물속에서 사진을 찍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대개는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과 같은 악천후 속에서 오히려 작가가 원하는 앵글과 뷰가, 질감과 초점이, 미장센이 가능해진다. 어쩌면 자연의 본성이랄 수 있는 우연을 미학적인 계기로서 끌어들인 경우, 사진의 적극적인 한 요소로서 포함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어쩜 의도된 우연이랄 수 있는데, 허다한 시행착오와 실패한 형식실험이 뒷받침되어졌을 것이다. 작가의 사진이 일정한 수행의 의미와 실천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다시, 양서류의 시점이 주제라고 했다. 왜 양서류의 시점인가. 여기에는 어떤 각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은 물에서 유래했다. 인류 역시 마찬가지. 이에 대해, 주제를 양서류의 시점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작업노트에 적어놓고 있다. 

우리가 떠나온 생명의 시원인 물속에서 인류의 문명을 바라본다...나는 인류가 대지 위에서 어떻게 존재하여야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싶다...양서류는 수중호흡을 통해 물에서 살다가 나중에는 공기호흡을 하며 뭍에서 산다. 물과 뭍을 오가는 양서류의 짧은 생 속에 진화의 과정이 담겨 있다고 본다. 나에게 양서류는 지구탄생 이래로 생명의 역사를 모두 지켜본 어떤 시각이다. 

아마도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 새삼 되새기고 싶었을 것이다. 혹 문명이 생명이 아닌 죽음(아니면 죽임)에 의해 그 진화의 원동력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소중함을 어쩜 인류의 먼 조상일지도 모를 양서류에게서 배우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그 배움을 도외시하다보면 종래에는 오히려 생명(물)이 인류를 집어삼켜 지상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침묵으로서 증언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침내 물의 종족인 구름과 비와 안개가 최초의 그 날처럼 암흑 속을 부유하면서 사라진 인류와는 다른 종족을 위한 새 날, 새 때를 예비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의 사진은 생명과 재생, 생성과 소멸의 순환으로서보다는 죽음의 화신인 생명의 일을 보는 것 같고, 종말의 묵시록을 보는 것 같다. 모든 암울한 비전이 그렇듯 역설적 표현(부정을 통해 긍정을 얻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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