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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단화/ 꽃시절에 죽음을 생각하다. 재와 해골과 도구들

고충환

류단화/ 꽃시절에 죽음을 생각하다. 재와 해골과 도구들 


얼핏 재 같다. 화로나 속이 깊은 접시에 수북한 재 같다. 미동에도 풀풀 날리며 흩어질 것 같은, 종이를 태운 재 같다. 자세히 보면 포개진 꽃잎 형태가 여실한 꽃 같다. 잿꽃? 종이꽃? 정교하게 만든 종이꽃 그대로 태운 재 같다. 재가 된 종이꽃이, 재와 종이꽃의 결합이 죽음을 환기시킨다. 
지금은 없어진 옛 풍습에 사람이 죽으면 꽃상여를 만들었다. 꽃상여는 종이꽃으로 만들었는데, 사자를 상징하고 사후세계를 상징한다. 장례가 끝나면 꽃상여를 태워 없앴는데, 사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산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자를 위해선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훨훨 날아가라는 의미를 담았고, 산자 입장에선 사자의 흔적과 기억을 지워 망자를 잊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후 종이에 붓글씨로 쓴 지방을 태워 날려 보내는 소지를 통한 초혼의식으로 장례의식은 정기적으로 호출되고 계승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종이꽃은, 특히 재로 화한 종이꽃은 죽음을 상기시킨다. 흔한 말로 꽃 시절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꽃은 세속적인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종이꽃은 죽음을 상징하고 저승을 상징한다. 그렇게 종이꽃에는, 꽃과 종이의 결합에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죽음이 주제일까. 정작 작가는 주제를 <재>라고 부른다. 아마도 재로 나타난 물적 형식을 빌려 죽음이라는 관념적 형식을, 그 존재론적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일 터이다. 죽음이 삶의 피할 수 없는 일부임을 인정한다면, 겉보기에 죽음을 통해서 사실은 삶에 대해 환기시키는 것일 터이다. 결국 죽음이 주제인 것은 사실은 삶이 주제인 것에 진배없다. 죽음이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므로. 삶도 죽음도 결국 인식의 문제다. 존재론적 사건도 인식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식 바깥에는 삶도 죽음도, 존재도 심지어 인식 자체도 없다. 그렇게 작가는 한갓 재로 화해진 종이꽃을 매개로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사건을 환기시킨다. 

나아가 작가는 해골과 꽃을 결합시킨다. 더러 해골에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 그림은 있어도, 해골과 꽃의 결합은 파격적이다. 그 결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아이러니고, 상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역설이다. 일반적이지 않다? 상식적이지 않다? 여기서 작가는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를 건드린다. 어떤 관계를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하거나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체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관습으로 특정된 세계, 관습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롤랑 바르트는 신화라고 했다.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관계에 대한 인식은 알고 보면 관습이고 선입견이며 학습된 것이다. 
결국 관계도 그렇고 관계로부터 파생된 의미 또한 관습의 산물이다. 그런 관습이 아니라면 관계도 의미도 열려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관계며 의미를 형식 실험하는 것이 사물의 전치다. 화용론이다. 사물의 의미는 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관계(위치)에 연동된다. 그러므로 사물의 관계(위치)가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리고 상황논리에 연동된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관계가 의미를 결정하고 상황이 의미를 낳는다. 해골과 구더기의 결합은 죽음과 죽음의 관계설정을 통한 점층적 강조화법이다. 이에 반해 해골과 꽃의 결합은 삶과 죽음의 관계설정을 통한 급진적 강조화법이다. 드러난 뜻이 아닌, 숨은 뜻을 캐내기 위한 화법이고 문법이란 점에서 아이러니고 역설이다. 
이처럼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꽃은 세속적인 삶을 상징한다. 삶과 죽음의 결합이다. 삶의 덧없음이다. 바니타스(무상한 삶)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다. 서양그림에 그토록 많은 해골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양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서양의 인문학적 배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성경은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하는 만사가 헛되다고 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은 가장 비통할 때 재를 뒤집어쓰고 운다. 기독교문명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서양의 논리로 칠 때가 그렇고, 좀 더 친숙한 동양적 표현으로는 화무십일홍이다. 십 일 동안 빨간 꽃은 없다는 전언이다. 꽃시절에 죽음을 생각하라는 주문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해골꽃은 종이꽃과 통한다.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죽음의 주제를 반복한다. 죽음에 관한한 동서양의 차이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사건에 대한 인류공통의 관심사를, 그러므로 어쩌면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담론을 주제화한다. 

그렇게 작가는 재를 조형한다. 속이 깊은 접시에 수북한 재를 조형하고, 포개진 꽃잎 형태가 여실한 종이꽃 그대로 태운 재를 조형한다. 나아가 재를 캔버스 평면에 고착시켜 화면구성을 꾀하기도 하고, 심지어 천장에 매달아 설치하기도 한다. 재를 조형한다? 재를 고착시킨다? 재를 매단다? 하나같이 고정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질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재는? 바로 여기에 반전이 있고, 작가의 작업의 고유성이 있다. 재는 사실 재가 아니다. 다만 재처럼 보이게 만든 도자(세라믹)다. 엄밀하게는 도자를 도예로 풀어낸 도조다. 도자를 입체조형 그러므로 조각으로 풀어낸 것이다. 
사실 작가는 도자로 유명한 중국 경덕진(징더전) 출신이다. 전통적인 도자 방식과 수공예로 유약을 덧입혀 소성하는 과정과 기술을 활용해 흡사 불에 탄 종이처럼 얇고 섬세한 표현의 형상을 빗어냈다. 디테일이 올올이 살아있는 얇고 섬세한 표현으로 보나, 사물대상과의 영락없는 닮은꼴로 보나 작가에게 재는 도자의 한계에 도전하는 관문이며 과제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기술적 도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자기반성이 있었고, 그 반성이 재라는 소재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뚜렷한 주제의식과 이를 실현하게 해준 기술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탄탄한 주제의식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재를 조형하고 해골을 조형했다. 꽃을 조형하고 불에 탄 종이꽃을 조형했다. 비록 주제는 <재>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죽음을 성찰하고, 삶과 죽음과의 관계를 반성한 것이란 점에서 실제로는 삶이 주제고 죽음이 주제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삶과 죽음 사이에 대한 반성이 있고,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이 있고,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성이 있다. 그 이행이며 변성과정을 작가는 유물론적 관념론으로 풀어내는데(죽음으로 나타난 존재론적 사건을 특정된 물질을 매개로 이해하는데), 물질 중 특히 금, 목, 수, 화, 토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과의 관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비의에 대한 철학적 의미(음양오행사상)를 담았다. 그렇게 열거된 물질이 공교롭게도 흙, 물, 불, 공기로 나타난 세계4대원소설에도 부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징체계에는 상당한 상통성이 존재할 것이다. 여기에 더 흥미로운 것은 도자 자체가 흙, 물, 불, 공기의 상호작용성이 빗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성(존재론적 변성 그러므로 거듭남)으로 보나, 도자에서 재로 그리고 재로부터 도자에로의 변성(물질변성 그러므로 반전)이 일종의 연금술을 떠올리게 하는 점도 흥미롭다. 평소 도자의 본성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삶(그러므로 어쩌면 죽음)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에 대한 성찰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을 특정 하는 개념 중 호모파베르가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다. 작가는 낫, 칼, 톱, 도끼, 작두, 열쇠, 가위, 망치, 드라이버, 농기구 등 각종 도구와 연장을 도자로 제작해 천장에 매달아 설치했다. 바닥에는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금속성 재질의 압정을 흩뿌려 놓았다. 사실은 눈치 챘겠지만, 사물대상을 영락없이 닮아있는 도자로 만든 오브제(유사오브제)들이다. 천장에 매달린 도구들이, 그리고 바닥에 되는대로 흩뿌려진, 실물보다 큰 압정들이 불안하다. 공격적이고 위협적이다. 여기서 작가는 도구의 양가성을 건드린다. 쓰기에 따라서 도구는 평화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폭력을 위한 무기로 변신하기도 한다. 도구를 소재로 한 이 일련의 오브제 작업에서 작가는 다른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핍진성(사물대상과의 닮은꼴)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고, 재료의 반역(알고 보면 도자)을 즐긴다. 
이로써 작가는 한갓 재로 화한 종이꽃을 통해 삶과 죽음과의 관계를 주지시키고, 꽃과 해골이 급진적으로 결합된 해골꽃을 통해 무상한 삶(꽃시절에 죽음을 생각하다)을 주지시키고, 평화의 도구가 때론 폭력의 도구일수도 있다는 도구의 이중성을 주지시킨다. 재를 통해 도자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죽음을 통해 삶의 깊이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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