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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순, 내적에너지와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는 그림

고충환

김석순, 내적에너지와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는 그림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예술충동을 추상과 감정이입으로 구분했다. 감정이입 충동이 사물대상의 객관적 재현을 지향한다면, 추상충동은 자기내면을 향한다. 또 다른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회화를 재현과 표현의 상호작용이라고 했다. 사물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추구하는 경우와 자기표현욕구의 상호간섭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예술충동을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 코스모스와 카오스, 질서의식과 혼돈의식으로 구분한다. 회화를 각각 내적질서의 표상으로 보는 경우와 내적에너지와 생명력이 무분별하게 표출되는 활성의 장으로 본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 경우와 결에 차이가 있지만, 미하일 바흐친은 카니발을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표출되는 장으로 본다. 아마도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예술충동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 가운데 김석순의 회화는 그 회화적 생리가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가깝다. 즉 작가의 그림은 자기내면을 표현한 것이며, 자기표현욕구를 추상적인 회화형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를 통해 내적에너지와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은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추상이란 원래 내면에 내재돼 있던 것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로써 잠재적이고 암시적인 것이 형상화를 통한 형상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내면적인 것, 내재적인 것, 잠재적인 것, 암시적인 것 자체는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따로 없다. 그러므로 추상이란 어쩌면 이처럼 그 자체로는 정해진 형태도 색깔도 따로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해주고 색깔을 덧입혀 내면적이고 내재적이고 잠재적이고 암시적인 것을 표현하는 기술이다. 
여기서 추상은 암시의 기술과 만난다. 즉 추상은 내면을 암시하는 색감과 질감의 기술이다. 가시적인 것(이를테면 색감과 질감)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이를테면 내면)을 암시하는 기술이고, 그려진 것을 통해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 나아가 어쩜 그려질 수가 없는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다. 그건 내적인 것의 표출이며 내면풍경의 표상이란 점에서 주체와 긴밀하게 연동된다. 추상과 표현이 연동되고(추상표현주의), 추상과 주체가 연동된다(몸그림).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에 연동되고, 몸그림에 연동된다. 여기서 몸그림이란 사실은 액션페인팅을 번역한 것으로서, 추상표현주의를 다르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르게는 뜨거운 추상(추상과 주체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에 연동된다는 점에서 차가운 추상(주체의 내적체험보다는 회화의 형식논리에서 추상의 당위성을 찾는)과는 구별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기내면을 표현한 것이다. 그 자체로는 정해진 색깔도 형태도 따로 없는 내적 에너지며 생명력(다르게는 기와 기운)의 무분별한 표출을 표현한 것이다. 어쩜 억압된 것의 표현이란 점에서 욕망, 본성, 자연성과 같은, 하나같이 제도적 현실을 사는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어쩜 억압된 것들이며 상실한 것들의 복원을 꾀하는 기획이며 프로젝트일 수 있다. 그건 비록 작가의 내면풍경(다르게는 내적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알고 보면 내면풍경이란 것이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칸트의 공통감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작가의 내적체험이 저마다의 내적체험으로 추체험되는 것이다. 작가를 통해 저마다의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몸그림의 흔적이며 내면풍경의 표상이다. 그 내면풍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론 컬러필드를 들 수가 있겠다. 더러 모노톤으로 처리된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관념적인 분위기의 화면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각종 크고 작은 색면과 색면들이 긴밀하게 어우러져 상호작용하고 상호 간섭하는 화면이 동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렇듯 색면 구성과 변주야말로 작가의 회화적 지층을 지지하는 베이스로 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색면과 색면이 충돌하고 어우러지면서 고유의 아우라를 생성시키는 회화다. 그 자체로도 그림이 된다. 이를테면 색면화파의 회화적 경향성을 재해석하고 자기화한 회화다. 
그렇다면 다만 그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색면 구성과 변주는 작가의 회화를 지지하는 베이스라고 했다. 베이스는 베이스일 뿐, 여기에 작가는 이러저런 회화적 요소며 장치를 도입해 중첩시킨다. 이를테면 시멘트 콘크리트의 표면질감을 연상시키는 질감과 색감으로 도회적 감수성을 반영한다. 원색도 그렇지만 특히 무채색(주로 회색)이 주는 색채감정 역시 이런 도회적 감수성과 무관하지가 않다(보통 도시를 회색도시에 비유한다). 그런가하면 색채대비(원색과 무채색의 대비)로 인해 더 두드러져 보이는 비정형의 얼룩과 무분별한 스크래치와 어우러진 탈색되고 박락된 색감으로 오랜 벽의 질감을 연출하는데, 아마도 시간의 지층을 형상화한 것일 터이고, 기억의 질감을 조형한 것일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을 내면풍경의 표상으로 본다면 화면에 나타난 비정형의 얼룩과 스크래치는 무의식적 상처의 화석이며 형해로 볼 수 있다. 불현듯 현재 위로 호출된 기억의 자국이며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 중첩시킨 화면이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를 연상시킨다. 의식적인 기억이라기보다는 때론 작가자신마저도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기억 저편의 기억, 감각적 기억, 몸의 기억, 무의식에 아로새겨진 기억의 불완전한 복원력을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중첩된 화면의 이면에서 얼핏 알만한 형상이 비쳐 보이는데, 축약된 표현의 집이나 교회 같은 건물 형상이다. 건물과 같은 모티브를 특정해서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작가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등록된 기억의 편린들이 부지불식간에 표출된 것일 수 있다. 굳이 작가의 생활사며 개인사를 역추적하지 않더라도 이런 그리고 지우기의 반복행위는, 그리고 그 반복행위가 만들어낸 중첩된 화면은 말하자면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는 기억의 운동성을, 기억의 생리를, 무의식적 기억에 바탕을 둔 작가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회화적 프로세스(그리기)와 프린트(찍기)가 중첩되면서 회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얻는다. 그런가하면 각종 기호들, 이를테면 바코드(자본주의? 상품화된 현실? 물신?), 십자형과 X자형과 화살표 기호들(정신적인 좌표? 방향상실?), 원형과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도형들, 각종 열거된 숫자와 알파벳이 어우러지면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변화를 준다. 기본적으로 이 기호들은 회화적 화면을 위한 조형적이고 형식적인 요소로서 도입된 것이지만, 앞서 기억이 불완전한 형태며 암시적인 형상으로 소환한 건물 모티브가 그런 것처럼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말하자면 작가의 생활사 내지 개인사가 저장된 무의식적 지층(메를로퐁티의 의식의 지향호)으로부터 되불러낸 것일 수 있다. 최소한 작가의 회화적 관성으로서 등록된 것일 수 있다. 
작가의 생활사 내지 개인사가 무의식적인 경우로서 소환되고 호출된 것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경우는 작가가 일상의 주변머리에서 채집한 각종 오브제들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각종 숫자와 영문자가 표기된 평면 오브제, 부식된 철망과 알루미늄 창틀이 그렇다. 평면 오브제를 위해 작가는 콜라주와 데콜라주 기법을 재소환 하는데, 입체파와 미래파 그리고 다다의 형식논리와 방법론을 차용해 자기화한 것이다. 여기에 때로 창틀이 화면의 가장자리를 대신하기도 하는데, 회화적 화면을 넘어 일상으로 확장되는, 회화와 일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적 장치로 보면 되겠다. 
이러한 일련의 형식논리 내지 방법론과 더불어 작가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경우로서 일종의 모음그림이 예시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모자이크처럼 작은 그림들을 모아 하나의 화면으로 재구성한 것인데, 그 자체로 완결된 다른 그림들에 비해 가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른 그림들로 대체 구성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구조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을 상기시킨다. 현대미술의 생리를 대변하는 기술이다. 배열과 배치가 달라지면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러므로 의미 그 자체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가변적인 구조와 가변적인 의미가, 가변적인 형식논리와 가변적인 서사가 연동된다. 그렇게 모자이크 그림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서사, 가변적이고 비결정적인 방법론을 위한 형식실험의 장이 된다. 
작가의 회화는 그렇게 확장된 서사를, 형식논리를 열어놓는다. 그리기와 지우기가, 의식과 무의식(혹은 잠재의식)이, 기억과 망각이, 우연과 필연이, 즉흥과 회화적 관성이 긴밀하게 상호 직조되면서 내적에너지와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는 회화적 장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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