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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더 스토리/ 이야기, 강원문화의 정체성을 찾아서

고충환

강원, 더 스토리/ 이야기, 강원문화의 정체성을 찾아서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진리와 진실, 삶과 죽음, 존재와 우주, 시간과 역사, 성과 속, 종교와 형이상학과 같은 거대담론의 기술일 수 있고, 사적이고 소소한 미시서사의 기술일 수 있다. 여기서 거대담론과 미시서사는 표면적으로만 구별될 뿐 사실은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한다. 개인적인 삶이 공동체적 삶(사회)에 연동되듯, 현실적인 삶의 인식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듯 거대담론과 미시서사는 하나로 통한다. <강원, 더 스토리>란 주제는 강원을 테마로 이런 서사를 다루고 담론을 주제화한다. 강원도를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특정한 것인데,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되겠고, 종래에는 정체성 문제로 모아진다. 그렇다면 강원도의 특정성, 강원도의 정체성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가 있는가. 여기서 전시 주최 측은 각각 시간과 자연에서 그 근거를 찾고 해법을 찾는다. 다르게는 시간과 공간으로 봐도 되겠다. 각각 시간의 종축과 공간의 횡축을 날실과 씨실 삼아 강원도의 지역적 특수성이라는 직물을 짜는 것이며, 이로써 강원도의 정체성을 발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시간을 기억하다

시간의 종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와 만난다. 보기에 따라선 시간 자체가 이미 역사다. 각각 역사적 사건, 역사적 인물, 그리고 역사적 장소가 유기적 전체를 이룬 역사의 집이고 역사의 축도다. 
여기에 강릉 김 씨 성을 가진 매월당 김시습이 있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저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어릴 때 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단종의 폐위 이후 중이 된 사람이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시키고 스스로 왕(세조)이 됐는데, 단종에 대한 신의를 지켜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결국 단종은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고, 자신들은 죽임을 당한 사육신이 있다. 서용선이 이런 역사적 사건, 역사적 인물, 역사적 장소를 그렸다. 단종과 수양대군의 운명적인 관계를 그리고, 청령포에 유배된 노산군을 그리고, 중이 된 매월당을 그리고, 단종 부부를 그렸다. 작가는 역사적 사건에 관심이 많다. 아마도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전형적인 테마일 것이다. 굵고 투박한 붓질이, 뚜렷한 보색대비가 격렬한 파토스와 내적 울림을 자아내면서, 역사적 사건이 함축한 운명과 설움과 정한의 감정을 고스란히 되불러온다. 되불러온다? 작가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초혼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가하면 임만혁 역시 중이 된 김시습의 초상을 그렸는데, 목탄을 눕혀서 그리는 과정에서 유래한 날카로운 선과 목탄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어우러져 작가 고유의 감성을 자아내는 그림이다. 
그리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있다. 유교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가치체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한 경우란 점에서, 특히 여성주의 관점에서 여성성의 전형으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강유림이 이런 구여성과 신여성과의 조우를 꾀한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 쓴 한시 초서와 신여성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킨 것이다. 그리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인 오죽헌의 대숲을 마주한 신여성을 그렸다. 등을 보이고 있어서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현재 위로 불어오는 과거의 바람을, 정기를, 혼을 호흡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경민이 신사임당의 화방을 그렸다. 비록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지만, 작가와 고인이 조우한다는 비현실적 상상력을 그린 것이고, 고인에 대한 호기심과 오마주를 그린 것이다. 초기에는 나비를 그리고 이후에는 새 깃털을 자기분신으로 대신 보내 이런 불가능한 일을 성취한다. 그리고 이이남이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인용한다. LED TV 속에 되불러온 영상이 미묘하다. 풀이 움직이는 것도 같고 가만히 있는 것도 같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것도 같고 정적인 것도 같다. 정적인 가운데 움직임이 있는, 정중동의 물화된 형식을 보는 것 같다. 죽은 시간에 혼을 불어넣어 되살려낸, 첨단의 미디어를 이용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것 같다. 
그리고 조환은 철판에 서체를 레이저 커팅으로 재현하고 나룻배를 설치했다. 배경 역할을 하는 병풍 형태의 한시와 전방에 설치된 나룻배가 서로 조우하게 했는데, 아마도 한시에 함축된 의미를 설치된 조형물의 형태로 재의미화 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평면상의 먹그림을 철판으로, 입체로, 설치로, 질료로, 물성으로, 레이저 커팅으로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상원은 강원도 평창 올림픽을 찾은 사람들, 설원을 누비는 사람들, 활강하는 사람들, 리프트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장에 참여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점경으로 보여준다. 부감법으로 내려다 본 점경을 통해 보다 확장된 시야를 확보하게 해주는 시점이 돋보인다. 

자연을 마주하다 

시간이 종축으로 깊이를 만드는 것이라면(특히 역사), 공간은 횡축을 따라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특히 자연). 각각 수직과 수평이, 문명과 자연이 대비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처럼 자연은 수직으로서보다는 수평으로 길게 확장될 때 더 자연답다. 권부문의 사진이 그렇다. 산수와 낙산. 산과 바다. 작가가 자연을 재현하는 두 축이다. 특히 눈발이 휘휘 날리는 겨울바다(낙산) 앞에 서면 마치 가없는 경계 위에 서 있는 것 같고, 그 깊이며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존재와 대면하는 것 같다. 개념으로, 해석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자연 자체와 만나지게 하는 아득함이 있다. 작가의 흑백사진은 수묵화 같은데, 이재삼의 목탄그림도 그렇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배경으로 달빛을 받아 하얀 속살을 드러낸 폭포를 부각한 그림이다. 달빛 아래 풍경은 낯설다. 바로 빛과 어둠이 그 경계를 허무는 풍경이며, 달빛의 정기로 존재가 재생되는 주술적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영적 환기력과 함께 신비주의적 측면이 있다. 
그리고 나형민은 달무리를, 쥐불놀이를, 정월을, 부유하는 지평선을 랜티큘러로 재현했다. 풍경을 각각 근경, 중경, 원경의 단면들로 잘라낸 연후에 하나로 포개놓은 겹풍경 같다. 평면적인 풍경의 편린들이 하나의 층위로 오버랩 되면서 원근감을 표현한 것인데, 풍경을 재현하는 또 다른 형식의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사진과 모니터를 결합한 임창민의 작업은 이이남과는 또 다른 경우의 정중동을 예시해준다. 주로 정자나 열린 창호 문을 통해 바라본, 움직이는 듯도 하고 정지된 듯도 한 자연풍경이 정적인, 관조적인, 명상적인 계기에로 이끈다. 정지된 시간과 흐르는 시간을 결합시킨 이율배반적인 풍경(시간풍경?)을 보는 것 같고, 시간이 왜곡되는 사이며 틈새를 열어 보이는 것도 같다(주제가 시간의 틀 속으로, 이다). 
그리고 신리라는 도시 외곽풍경을 보여준다. 전원주택과 원형탱크가 보이는 정적이고 단조로운 풍경이다. 무미건조한 일상 위로 불현듯 풍경이 열리는 지점을 예시해준다. 이처럼 작가의 전원풍경이 정적이라면, 전영근의 전원풍경은 동적이다. 그의 그림에서 전원풍경은 도시민의 일상을 돋보이게 만드는 배경화면 역할을 한다. 아마도 이삿짐을 지붕에 잔뜩 인 채로 이동 중인 자동차가 소시민의 삶의 애환을 불러일으킨다. 대개는 피곤한 일상이겠지만, 그 와중에서도 설핏 웃음을 자아내는 위트가 있고 유머가 있다. 아마도 삶을 대하는 작가의 평소 태도와 심성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김남표는 정자와 바다와 호랑이가 어우러진 풍경을 보여준다. 초현실적 풍경이다. 정작 작가는 <인스턴트 풍경>이라고 부른다. 짜깁기된 풍경, 재구성된 풍경, 일회용품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풍경, 소비되는 풍경이다. 풍경 자체보다는 풍경의 이미지를 더 친숙하게 느끼는(풍경은 버릴 수가 없다), 실재보다는 가상실재를 더 살갑게 느끼는(가상실재는 실재보다 리얼하다) 세태의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용선은 태백군의 형태를 산의 능선 모양으로 조각한 입체설치작품을 보여준다. 실제 크기를 축도한 일종의 입체지도 혹은 지형도로 봐도 되겠다. 하나의 단위구조를 모나드 삼아 집적 확장시켜나가면서 전체 형태를 만드는 과정이며 방법이 구축적인 세계이해(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세계를 보는)를 엿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태량은 태백산의 이미지를 추상산수로 표현했는데, 작가는 이를 <무경산수>라고 부른다. 비록 태백산이라는 실재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경계가 없는 산수다. 태백산이라는 실재와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산수고, 실재와 형식논리의 경계가 허물어진 산수며, 주와 객이 상호 간섭하는 산수다. 어쩜 모든 산수와 풍경과 자연은 처음부터 그 경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에 대한 재현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재현인지도 모른다. 누가 자연의 깊이를 알 것이며, 그 경계를 측량할 수가 있는가. 그 경계를 잴 수 없는 자연을 어떻게 재현할 수가 있는가. 작가의 무경산수는 바로 이런 자연의 재현 불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시간과 공간, 시간과 자연, 역사적 현실과 현재적 현실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되는 이야기구조를 통해서 강원도를 특정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여기에 작가들은 저마다 그 실마리를 보태 직물을 완성한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 등 16명의 작가가 참여해 총 4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는 이번 전시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만들기 위해 기획된 전시다. 동계올림픽을 찾은 사람들이 올림픽과 함께 문화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그러므로 강원문화의 정체성을 새삼 재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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