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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창작문화공간여인숙 레지던시 결과보고전_취향저격

고충환

2017 창작문화공간여인숙 레지던시 결과보고전_취향저격 



취향을 저격한다. 이번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의 주제다. 취향을 저격한다? 모든 종류의 취향에 답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모든 부류의 취향을 소환한다는 의미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작가들 취향이 제각각이어서 도대체 공통분모를 찾을 길이 요원하고, 따라서 제각각인 취향을 알아서 맛보라는 의미일까. 취향? 맛? 사실 취향은 미학의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이고, 사실은 취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칸트는 사람들 취미가 제각각이어서 도대체 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서도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있어서 이 공통분모를 근거로 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고 했다. 그 근거가 공통감이다. 내가 좋아 하는 걸 사람들 대개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는 걸 사람들 대개가 싫어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 대개에 근거해 취미는 비로소 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고, 미학이, 예술이 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취향과 취미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취향이 모드와 스타일의 문제라면, 취미는 호불호 혹은 쾌불쾌의 문제다. 감정이 취미라면, 그 감정이 형식을 덧입고 태도로 나타난 것이 취향이다. 그렇게 취향과 취미는 다르면서 통한다. 

여기에 왕선정, 양승욱, 이승희, 세 작가가 있고 세 취향이 있다. 엄밀하게는 세 개 이상의 취향이 있다. 다중 복합적이고 중층의미화 된 취향이 있다. 작가들 각각은 저마다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지만, 그 하나의 인격체 속에 알고 보면 서로 다른 인격체들이 살고 있다. 니체의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처럼.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도플갱어처럼. 이중인격이며 다중인격 같은. 질 들뢰즈가 예술기계를 빗대어 표현한 정신분열증 분석 같은. 그렇게 동거하고 있는 인격체들이 서로 부합하기도 하고 서로 상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합하고 상충하면서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부풀리고 축소하고 확장시키고 변질시킨다. 그렇게 작가들의 취향은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다. 그렇게 이행 중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공통분모는 있다. 유형을 일탈하는 유형이 있고, 경향을 탈주하는 경향이 있다. 

왕선정은 우울의 화신 보들레르와 키치의 대마왕 밀란 쿤데라를 소환한다. 이 두 뮤즈의 입을 통해 자신의 비극적 세계관을 대변하게 한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게서 슬픈 짐승을 발견하고, 그 짐승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양승욱은 사진을 매개로 재구성된 기억이며 기호를 예시해준다. 사진을 매개로 상실된 기억을 환기한다는 모순된 기획을 통해 모든 기억은 사실상 재구성된 기억임을 주지시킨다. 죽음을 기록한다는 불가능한 기획을 통해 사진 속 기호는 알고 보면 저마다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인간을 흉내 내는 인형을 통해 친근함과 낯설음이 중층의미화 된 사진 속 기호의 틈을, 접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승희는 패션잡지에서 오려내 콜라주한 명품 이미지를 통해 허구적인 결핍과 가상욕망에 의해 지지되는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그리고 하나의 사실에 대한 다른 기억을 대비시켜 기억의 충돌과 차이를 주지시킨다. 


왕선정, 보들레르와 밀란 쿤데라. 왕선정의 작가적 아이덴티티 속엔 보들레르와 밀란 쿤데라가 산다. 각각 작가의 좌우측 날개에 해당하는, 작가의 수호천사로 보면 되겠다. 작가의 예술혼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로 보면 되겠다. 

먼저 보들레르를 보자. 파리의 우울한 공기를 온몸으로 호흡하다가 마침내 그 자신 스스로 우울의 화신이 된 작가. 악의 꽃의 저자. 위악의 순수함으로 위선의 해악을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데카당스의 사제. 진정한 예술가는 예술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닌,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라고 본 딜레당트의 주창자. 나다르가 찍은 초상사진 속 보들레르를 보면 우울한 위악을, 타고난 결여와 결핍을 망토처럼 두르고 있는 수도승 같다. 작가는 바에서 저 홀로 양주를 홀짝거리는 사람들을 위해 보들레르를 소환한다. <맨 인더 바_보들레르의 유령들>이다. 왜 보들레르의 유령들이라고 불렀을까. 우울한 사람들, 위악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사람들, 천성적인 결여와 결핍을 어쩔 수 없이 들키고만 사람들(술은 그러자고 마시는 것)이라고 봤을까. 아마도 작가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초상이 오버랩 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너 내가 불쌍하니?). 그러므로 그 연민은 자기연민이기도 할 것이다. 재밌는 건 그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는 종인데, 종이 아랫부분에 친절상담원 김민아의 연락처가 적혀있는, 맞춤형 현금대출 혹은 자영업자 전문 대출 영수증이다(친절한 민아에게). 그리고 그렇게 대출 영수증 위에 그린 <그 사람>들을 작가는 짐승들이라고 부른다. 결여와 결핍의 표상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야성과 야생, 자연성과 본성과 같은, 억압된 욕망과 상실된 것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이 비극적인 것은 다름 아닌 비극을 상실한 것에 있다고 본다. 비극을 상실한 것을 비극적이라고 본 것이므로 역설적 비극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비극은 역설적 비극은 아니다. 비극 자체다. 쿤데라가 상실을 염려했던 비극을 오히려 첨예하게 인식하고 발견한 것이므로 쿤데라의 속뜻에 가깝다. 작가는 비극이 내 작업의 전체적 맥락이라고 했다. 핵심이라는 말이다. 작가에게 비극은 말하자면 우울한, 위악적인, 그리고 결여와 결핍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조건과 한계를 조망하는 심리적 프리즘이다. 보들레르의 기질을 물려받은 쿤데라가 여기에 덧붙인 것이 비극이고, 냉소고, 키치다. 쿤데라는 키치의 대마왕이다. 쿤데라에게 키치는 희극적인(사실은 웃기지도 않는) 삶, 위선적인 삶에 여지없이 들이대는 칼날이다. 작가는 종교를 이런 희극적이고 위선적인 삶의 대마왕이라고 본다. 굳이 종교를 지목했다기보다는 삶이 꼭 그런 걸 특히 종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아빠(신?)는 한 손에 칼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 팝콘을 들고 있다. 그리고 엄마(마리아?)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물리느라 한창이다. 그리고 아이들(양떼들)은 그런 엄마 아빠의 심기를 혹 불편하게 할까봐 전전긍긍(?)이다. 작가는 이 그림을 <즐거운 나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역설적 표현이며 풍자 혹은 비판으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자기분신인 존을 내세워 이런 웃기지도 않는 가족사며 드라마를 대리하게 했다. 일종의 역할극을 살게 만든 것이다. 그림과 영상, 바느질과 텍스트를 매개로 한 오브제 설치작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의미하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이미지를 매개로 너무나 인간적인, 너무나 동물적인 우리 삶의 축도를 예시해준다. 


양승욱. 기억의 재구성과 기호의 재구성. 사진의 매체적인 특성으로 진실의 증언과 기억의 환기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디지털 이후 활성화된 것으로 조작과 공작을 매개로 한 가상현실 혹은 대체현실의 제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전통적으로 볼 때 그렇고 전형적으로 볼 때 그렇다. 

그 중 양승욱의 관심은 기억의 환기 쪽에 쏠린다. 한 장의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의 환기를 파고드는 것. 그런데 흥미롭게도 혹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진실의 증언과 기억의 환기는 외적으로만 구별될 뿐, 사실은 그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기억이 환기하고 싶은 것이 진실인 것이고, 그 진실은 기억으로 소환되고 환기되는 동안 왜곡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왜곡이 일어나는가. 쉽게 말해 기억에는 좋은 기억이 있고 나쁜 기억이 있다. 그 중 좋은 기억은 환기되는 과정에서 실제보다 부풀려지고, 나쁜 기억은 실제보다 축소되거나 아예 망각 속으로 밀어 넣어져 무의식으로 추방된다. 좋은 기억은 되새기고 싶어서 왜곡되고, 나쁜 기억은 잊고 싶어서 왜곡된다. 사진으로 치자면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저 좋은 것만 보고 저 좋은 대로 본다(혹은 읽는다). 왜곡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와 같은 시간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진실이 소환되고 환기되는 과정에 욕망이 개입되기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 속 기호는 언뜻 분명한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저마다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기억과 기호가 사진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사진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최초의 진실에서 또 다른 진실이 파생되는, 해석과 관련된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기록한다. 흥미롭게도 치매는 기억을 상실하는 병이다. 삶이 송두리째 망각 속으로 밀어 넣어져 사라지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가 지워지고 존재의 기억이 지워지는 병이지만, 이런 존재론적 의미를 뒤로 한 채 짐짓 말장난을 해보자면, 작가는 사진을 매개로 상실된 기억을 환기한다. 상실된 기억을 환기한다? 모순이다. 죽음을 환기할 수 없듯 상실된 기억도 환기할 수 없다. 죽음을 기록할 수 없듯 상실된 기억도 기록할 수 없다. 사진은 다만 주검을 기록하고 환기할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상실된 기억을 환기하는 작가의 사진은 그 자체로는 기록할 수도 기억으로 되불러올 수도 없는 죽음의 알레고리(죽음의 재현불가능성)처럼 읽힌다. 

그리고 장난감과 특히 인형. 작가는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올 요량으로 장난감과 인형을 소환한다. 여기서 특히 인형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인형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동시에 사물을 친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금기(페티시 그러므로 사물인격체 혹은 물신금지)를 위반한 것이므로 이런 위반에 따른 처벌을 수반한다. 쉽게 말해 인간을 닮은 것들, 이를테면 인형과 더미, 마네킹과 사이보그의 이중성과 양가성이 주는 친근함과 낯설음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프로이트는 친근한 것(인형)이 낯설어질 때(인형이 사물인격체를 주장하고 드러낼 때)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작가는 사진을 매개로 그렇게 장난감과 특히 인형이 불현듯 내보이는 친근함과 낯설음의 접점을, 틈새를 드러낸다. 그리고 군산의 재개발지역으로 묶인 지역을 현장으로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는데, 엄밀하게는 폐기된 사물들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기록하고, 그 기억이 불현듯 현재로 호출되는 것에서 오는 낯 설은 현재를 기록한다. 


이승희. 가상적인 욕망과 기억의 차이.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이라고 했다. 인간을 정의하는 정의들이 많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것이 욕망의 동물이다. 욕망을 뒤집으면 결여와 결핍이 있다. 결핍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문제는 결핍이 허구적인 것이고, 따라서 욕망도 가상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중세 기사들은 기혼여성을 애인으로 두는 것이 하나의 모드였고, 이처럼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랑을 가정하고 그 실현불가능성 때문에 아픈 마음을 시로 풀어낸 것이 중세기사도문학이다. 그리고 그렇게 싹튼 걸 궁정풍의 사랑이라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바로 여기에서 결핍의 허구성을 본다. 없는 결핍을 만들어내는, 그리고 그렇게 여하튼 결핍이 있고서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인간존재의 부조리를 본다. 

이런 가상결핍과 이에 따른 가상욕망은 자본주의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된다. 자본주의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욕망은 다만 이를 계기로 더 큰 욕망, 다른 욕망을 불러오는 한에서만 충족시켜주는 척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는 그 자체로는 없는 욕망, 허구적인 욕망을 생산한다. 그 자체로는 없는 욕망? 허구적인 욕망? 그게 뭔가. 이미지다. 자본주의 시대 이후 현대인은 상품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이미지를 욕망하고,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라가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실제로는 없는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있는 양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시뮬라크라라고 부르고 가상현실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실재의 이미지를 욕망하고 실재의 아우라를 소비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실재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저 실재를 싸고 있는, 엄밀하게는 실재가 없으므로 사실은 없는 실재를 감싸고 있다고 간주되는 혹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실재의 이미지, 포장지, 아우라, 후광만이 필요할 뿐이다. 여기엔 실재가 없는 시대, 실재가 사라진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사각형 라이트 박스 위에 놓여 밝게 빛을 발하는 명품 이미지를 소재로 한 이승희의 작업 <must have item>, 꼭 가지고 있어야 할 품목 시리즈가 바로 이런 가상결핍이며 허구적 욕망을 다룬다. 그러면서 현대판 바니타스라는 전언을 슬쩍 밀어 넣어 물신만능주의, 속물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현실을 풍자한다. 사회와 정치, 광고와 경제, 인문과 미학, 그리고 예술마저 스펙터클과 쇼비지니스로 변질된 이미지정치학을 비튼다. 

그리고 작가는 기억의 충돌과 차이를 다룬다. 없는 욕망, 허구적 욕망(그리고 어쩜 이데올로기)이 어떻게 기억에 매개되고 기억을 왜곡시키는지 하는, 기억의 심리학 혹은 기억의 정치사회학으로 확장되고 심화된다. 천안함과 세월호라는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은 제각각이다. 욕망이 매개되면서 기억을 자기 쪽으로 견인하는 것이다. 용산참사가 그렇고, 대외적으로는 이라크 사태에 대한 CNN과 알자지라의 차이 나는 방송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두 소녀가 있다. 서로 친구지간인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소녀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한국인 소녀가 하나의 집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을 보여주고 있다. 소녀들이 기억하는 기억은 사실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기억은 허구적이고 주관적이다. 욕망이 매개되면서 기억은 재구성된다. 그렇게 모든 기억은 재구성된 기억이고, 따라서 그 자체 또 다른 한 현실임을 예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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