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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얼룩과 흔적, 시간의 화석과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

고충환

이진영/ 얼룩과 흔적, 시간의 화석과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사진은 여하한 경우에도 현실을 찍을 수가 없다. 사진에 찍히는 순간 현실은 과거가 된다. 그리고 사진은 그런 현실이 한때 존재했었다는 사실의 증명이 되고 증거가 된다. 사진에는 현실을 위한 자리도 현재시제를 위한 자리도 없다. 현재시제는 사진의 시간이 아니다. 다만 과거의 시간이 흐르고 과거시제만이 존재할 뿐. 그러므로 어쩌면 사진은 현실을 과거인 채로 봉인하고 보존하고 기억하고 기념하게 해주는 미디어, 고고학적 미디어, 박물학적 미디어, 기념비적 미디어인지도 모른다. 존재의 흔적 그러므로 어쩌면 죽음과 대면하게 해주는 존재론적 미디어인지도 모른다. 부재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이로써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를 자아내고 불러일으키기 위해 발명된 감성적 미디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르트는 사진 속 기호를 각각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문화적 기호가 스투디움이고, 개인적인 기호가 푼크툼이다. 푼크툼은 문화적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 기호, 어떤 결정적인 의미로 환치되지 않는 기호, 표상 없는 기호다. 그걸 바르트는 트라우마라고도 했다. 분명 자극이 있음에도 정작 그 원인을 알 수는 없는 기호다. 이처럼 바르트는 자극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진 속 기호를 푼크툼이라고 했지만, 어쩜 이런 푼크툼은 한 장의 사진이 스스로도 모른 채 부지불식간에 열어놓는 어떤 알 수 없는 기호로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영의 사진도 이와 크게 다르지가 않은 것 같다. 존재보다는 존재의 흔적을 불러일으키고, 낭만주의의 감성적 유산인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를 불러일으키고(흔히 시대감정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어떤 감정은 한 시대의 유물이고 발명품일 수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부지불식간에 열어놓는 어떤 알 수 없는 기호를 더듬어 찾게 만들고, 그 기호를 길잡이 삼아 사진 속 불완전한 존재의 처음상태(원형)를 추상하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은 사건과 사고의 증명으로서보다는 존재와 시간의 증거에 가깝고,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증언으로서보다는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존재의 결을 파고들고 그 질을 탐색하는 데 바쳐진다. 


이진영은 자신의 사진을 위해 옛날방식을 되불러온다. 습식유리원판음화사진이 그것이다. 유리원판에 감광제를 칠하고, 그 칠이 채 마르기 전에 (장)노출과 현상까지 마쳐야한다. 사진사에서 보면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왜곡되는 탓에 보다 안정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건식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건식은 이후 필름으로 건너가기 위한 중간단계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쩌면 사진사에서 사장된 혹은 그 시효가 만료된 옛날 방식을 왜 되불러온 것일까. 그 시효가 만료된? 그건 어쩌면 과학으로서의 사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 과학으로서의 사진은 누구나 쉽게 안정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 발전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면, 그동안의 형식실험은 다만 그 최종적인 방법을 위한 단계로만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서 관점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그 허다한 형식실험들이, 어쩌면 실패한 형식실험들이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과학으로서의 사진과 예술로서의 사진은 그 관점이 다르다. 과학으로서의 사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패한 사진이 예술로서의 사진이라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더 흥미로울 수 있다. 예술의 관심은 어쩌면 비정상적인 것들, 불완전한 것들, 실패한 것들에 맞춰진다. 제도의 관성이 간과하거나 억압한 것들을 은연중 혹은 부지불식간에 드러내는 것에 맞춰진다. 작가가 습식유리원판음화사진을 고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연성과 불안정성, 불명확함과 불완전함에 매료된 것이고, 이로부터 일반적인 사진으로는 미처 생각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얻은 이미지가 어떻게 왜 매력적일 수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 곧 작가의 사진의 특수성을 규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습식이라는 말은 유동적이라는 말이고 불안정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여기에 여전히 습식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암실에서의 현상까지 마쳐야 한다. 그 과정에 예기치 못한 일들, 우연한 계기들이 매개되면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때론 작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어떤 미증유의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게 된다. 이를테면 장 노출에 따른 흐릿해진 이미지,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유제에 따른 왜곡된 이미지, 그리고 여기에 먼지와 스크래치, 얼룩과 지문, 그리고 기포와 같은 예기치 못한 그리고 우연한 계기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오롯한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유리원판이 갖는 투명한 두께가 사진에 특유의 아우라를 불어넣는다. 유리원판 자체도 그렇고 유리원판을 확대 인화한 사진에서도 그렇지만 그 자체가 투명한 프레임(가장자리)을 만드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은 마치 피사체를 투명한 두께 속에 가둬놓은 것 같은, 응결시켜놓은 것 같은, 존재의 흔적을 박제화한 것 같은, 시간을 화석화한 것 같은 미묘한 느낌을 준다. 인물도, 풍경도, 정물도 하나같이 한갓 흔적으로 화해진,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건져 올린 것 같은, 망각 속에 편입되기 직적에 구출된 것 같은 존재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는 것 같다. 존재보다는 존재의 흔적을, 형상보다는 형상이 남긴 잔상을, 소리보다는 소리가 사라진 이후의 여운을 보고 듣는 것 같다. 그 흔적들, 잔상들, 여운들에 살을 주고 몸을 부여해준 것 같다. 작가의 사진은 말하자면 모든 현재하는 것들, 이를테면 인물과 풍경과 정물을 불현듯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한갓 흔적으로 만들고, 희미한 그림자로 만들어버린다. 그건 현실로부터 현실감을 박탈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어쩌면 존재의 또 다른 결,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결, 다만 암시를 통해서만 자기를 열어 보이는 존재의 질을 감각의 층위로 불러내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에는 우연과 필연,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암시적인 것, 예측 가능한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중의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의 결이, 질이 오롯한 체화를 얻고 있다. 어쩌면 시간의 몸을 얻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은 무미건조한 현실을 비현실적 대상, 그리운 대상으로 전이시키는 시간의 화신(그 자체 골동감정과도 무관하지가 않은)을 보는 것 같고,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감성체로 변질시키는 시간의 연금술을 보는 것 같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사이의 풍경-풍경지간>이라고 부른다. 풍경과 풍경 사이에 또 다른 풍경이 있다. 풍경이라고 정의되기 이전의 풍경이 있고, 미처 풍경으로 의미화 되기 이전의 풍경이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능태로서의 풍경이 있다. 작가는 소재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 모두를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어쩜 풍경은 작가가 보는 세계 일반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말하자면 유형무형의 세계,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세계, 그리고 외면풍경과 내면풍경을 아우르는. 그렇게 이를테면 의식과 의식 사이, 의미와 의미 사이에 작가의 관심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희미한 그림자로만 의식에 붙잡힐 뿐인 존재에, 존재의 질에, 존재의 결에 관심이 있다. 애초에 의미화 되지 않는 것들, 애써 의미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들에 관심이 있다. 다만 암시적인 형태로만 자기를 열어 보이는 것들, 겨우 존재하는 것들, 때론 알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들(롤랑 바르트가 트라우마를 그런 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하나의 풍경이, 하나의 세계가, 하나의 존재가 열어 보이는 푼크툼에 관심이 있다. 바르트는 푼크툼이 개인적인 것이어서 공유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작가가 열어놓는 푼크툼도 그럴 것이다. 작가가 하나의 풍경으로부터, 하나의 세계로부터, 하나의 존재로부터 정확하게 뭘 봤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가 매료된 그리고 때론 트라우마(롤랑 바르트)와 주이상스(자크 라캉) 바로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가 자신의 사진 속에 봉인한 채 내어주지 않는 것, 내어줄 수도 없는 것이 사진을 살아있게 하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결국 예술은 존재의 알 수 없는 결을, 질을 탐색하는 것에 바쳐진 것이고, 작가의 사진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은 어쩌면 해독 불가능한 푼크툼을 읽는 한 방법을 예시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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