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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여인숙,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세계를 연다

고충환

군산여인숙,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세계를 연다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이 청년작가를 초대했다. 그리고 초대전에 우리 기쁨 젊은 날이라는 주제를 붙였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오기인가. 소개 글에 연거푸 반복해서 나오는 걸 보면 오기 같지는 않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여기서 우리 기쁜 젊은 날은 진실이기도 하고, 사실은 우리 불안한 젊은 날, 우리 불안정한 젊은 날의 반어법이기도 하다. 진실보다는 반어법 쪽으로 감정이 쏠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 양가적 의미를 인정한다면 청년은 불안해서 기쁘고, 불안정해서 기쁘다. 모순이고 이율배반이다. 같은 말을 살아있어서 기쁘고, 진정으로 살아있어서 기쁘다는 의미로 고쳐 읽으면 어떤가. 모순이 아니고 이율배반이 아니다. 불안과 불안정성은 그렇게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기쁜 이유이며,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렇게 불안은 청년의 특권이다. 저절로 타고난 청년의 자질이다. 그가 다름 아닌 청년임을 증거 해주는 징후며 증상이다. 온몸으로 아파하는 슬픈 특권이고, 뜨겁게 발산하는 기꺼운 특권이고, 차갑게 부닥치는 냉소적인 특권이다. 그런 청년이 지금도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청년은 여전히 그런가. 나에게도 그런 청년이 있었던가. 모를 일이다. 까마득하다. 아득하다. 

청년은 왜 불안한가. 발가벗어서 불안하고(라이언 맥긴리), 길 위에 내던져져서 불안하다(잭 케루악). 발가벗는다는 것, 그것은 세계와 가식 없이 만난다는 것이고, 세계와 원초적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발가벗은 세계와 발가벗은 주체가 어떤 매개도 없이 일대일로 직면하는 것인데,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세계는 나에게 나는 세계에게 서로 열고 내어준다. 그렇게 비로소 열리는 세계, 잠시잠간 자기를 내어주는 세계를 순간 포착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걸 하이데거는 세계의 개시라고 불렀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현대미술은 그 세계, 그 사건을 포착하고 있는가. 회의적이다. 불안이, 발가벗은 것이, 발가벗어서 불안한 것이 청년의 특권인 것은 그걸 저절로 이미 포착할 수 있는 조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 위에 서서 불안한 것은 그 길이 이미 알려진 길이며 알고 있는 길이 아닌, 매번 새롭게 열리고 매순간 다르게 연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찾아야하는 길이고 내어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불교에서 불안은 욕망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욕망이 불안의 원인이고, 따라서 욕망이 없으면 불안도 없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욕망을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본다. 욕망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면서, 동시에 욕망으로부터 무욕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에 인간의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다. 그런 모순과 부조리를 과제로 떠안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것이 청년이다. 그리고 여기에 청년작가들(김혜숙, 박지수)이 있다. 여기서 청년은 자의식의 문제다. 욕망도 그렇고 불안도 그렇다. 길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다. 


김혜숙, 나에게 집을 마련해주다 


김혜숙은 건축과 건물에 대한, 집과 방에 대한,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작가의 놀이터는 모래더미였고, 장난감은 빨간 벽돌과 회색 벽돌이었다. 그렇게 파밭이 빌라로 변하고 공터에 빌딩이 들어서는, 그리고 그렇게 놀이터가 건물로 변하는 건축현장을 보고 자랐다. 이사도 잦은 편이었다. 매번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서류를 제출해야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한 장이었고 작가는 두 장이었다. 잦은 이사의 증거였지만, 어린마음에 그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것이 뿌듯하기만 했다. 요새 아이들은 건물주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라고 하는데, 이런 웃지 못 할 현실에 멍든 동심과는 상관없을 것이다. 그저 이사 다니는 것조차 놀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 작가에겐 미미가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인형 미미에게 집을 마련해주지 못하다가, 결국 미미가 다 낡고 해진 이후에야 그럴듯한 이층집을 마련해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건물을 꽤 뚫어볼 수 있게 됐다. 지금도 건물을 척 보면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건물 내부의 구조며 공간을 상상하고 투시해볼 수가 있게 됐다. 그런 습관이며 능력이 생겼다. 

장미동. 쌀을 저장하는 동네라는 뜻이다. 군산 장미동에는 지금도 바다로 연결된 철길이 있다. 국내에서 생산된 쌀을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해 일제가 설치한 철로다. 수탈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장미동을 보면, 당시 동네는 번창했을 것이다. 쌀이 들고나는 동네답게 풍요로웠을 것이다. 비록 그 번창이 나의 번창이 아니고, 그 풍요가 너의 풍요였을 터이지만.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다만 체제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었을 뿐 이런 번창과 풍요의 배반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일 터이지만. 여하튼 이런 연유로 장미동과 발산리에는 근대건축물들이 잘 보존돼 있는 편이어서 더러 건축을 연구할 목적으로 사람들이 현장을 찾기도 한다. 예외적인 경우에서 그렇고 대개는 관광객들 차지다. 그곳의 낮과 밤은 판이하다. 시간이 정지된 영화세트장 같은 건물과 골목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다가도 밤이 되면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그렇게 영화세트장은 텅 비는데, 작가는 그걸 공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위에 유년시절 자기의 삶이 아니었던 건축현장이 오버랩 된다. 역사적 현장이 관광지로 변하고 영화세트장으로 변하는 것에서 건물의 고독(아님 역사의 고독?)을 보고, 자신의 삶과 상관이 없었던 도시개발에서 존재의 고독(부조리?)을 본다. 

그리고 작가는 그 고독을 그린다. 건물의 고독을 그리고, 역사의 고독을 그리고, 유년시절에서 되불러온 존재의 고독을 그린다. 외관상 건물 내부를 투시해보는 습관과 능력을 발휘해 건물을 그리지만, 사실은 건물에 스민 고독을 그린다. 장지에다가 샤프펜슬을 꼭꼭 눌러 그리는데, 그걸 작가는 촉각치라고 부른다. 보면서 만지는(보는 것이 곧 만지는 것인), 보면서 더듬는, 보면서 더듬어 찾는, 역사적 현실(다르게는 시간)을 복원하고 기억을 재생하는 작가만의 방법이다. 그렇게 복원된 건물구조에서 설계도와 같은 건물의 원형이 복원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작가는 건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에 스민 시간을 그리고 고독을 그리고 공허함(공실)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사실은 유년시절 미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마련해줄 뒤늦은 집(존재의 집)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지수, 예쁜이 길들이기 


동화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다. 하나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이유로 치자면 어떤 결정적인 의미를 은폐하고 있을 때이다. 결정적인 의미를 숨기면서 다른 의미로 그 표면을 덮는 것이다. 결정적인 의미를 덮어서 가린다는 점에서 그건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사실 알고 보면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도 그리고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잔혹동화도 이처럼 하나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실과 그 진실을 숨기려는 이데올로기와의 숨바꼭질과 관련된다. 하나의 내러티브로 구성된 줄 알았는데, 그 내러티브 밑에 또 다른 내러티브, 공공연하게 표면의 내러티브에 반하는 내러티브, 심지어 표면의 내러티브를 부정하는 내러티브가 숨겨져 있었다. 잔혹동화는 바로 그 숨겨진 내러티브, 그 숨겨진 진실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뭐가 진실이고 뭐가 이데올로기인가.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왜 진실을 덮어서 가려야만 했는가. 

옛날에 깊은 산속에 일곱 난쟁이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곱 난쟁이들은 백설 공주를 새 식구로 맞아들였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이야기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얘기고, 어려운 현실도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고야 만다는 얘기고, 그러므로 하늘은 공평무사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사실은 이데올로기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일곱 난쟁이는 알고 보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오욕칠정일 수 있고, 백설 공주는 그 무분별한 욕망의 희생양일 수 있다. 그렇게 욕망을 해소할 수가 있는데, 깊은 산속인들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왜 이야기를 이데올로기로 덮어서 가리는가. 누가 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일정정도 가부장적 가치체계와도 통하는)가 건전한 의식과 건강한 시민을 교육하기 위해 생산한다. 그렇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피노키오 이야기(거짓말하지 마라)를, 산타 이야기(착하게 살아라)를 꾸며낸다. 거짓말하면 코가 자라는데 동양 사람들도 그렇지만 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큰 코는 쉽게 눈에 뛸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실생활에 불편을 야기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산타는 착한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준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이야기, 그 숨겨진 진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금기와 위반 그리고 성적 일탈에서 찾는데, 많은 동화들(그러므로 이데올로기들)이 억압하고 있는 욕망이 대개는 성적욕망, 그리고 최소한 성적욕망이 다른 형태로 변형된, 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전치된, 그러므로 제도를 속이는 것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리고 그 적극적인 혹은 소극적인 위반 가능성을 게이와 레즈, 트랜스젠더와 사도마조히스트와 같은 성적 소수자들, 범죄자와 장애우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찾는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목한 위반(조르주 바타이유)에 해당하는, 정상성이 지목한 비정상성(미셀 푸코)에 해당하는, 제도가 지목한 희생양들(르네 지라르)에 해당하는, 상식적인 공중의 이름으로 단죄한(?) 타자들이다. 그들은 타자인 탓에 지금껏 온전한 자기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이성을 기준으로 비 혹은 반이성이라거나 정상을 기준으로 비정상이라는 불구의 이름 말고는. 작가의 그림이 알듯 모를 듯 아리송한 것(숨기면서 드러내기 아니면 드러내면서 숨기기)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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