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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 할프헤르/ 전체를 본다는 것, 이면을 읽는다는 것

고충환

베른트 할프헤르/ 전체를 본다는 것, 이면을 읽는다는 것 



사진은 진실을 증언하는 사진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진으로 진화해왔다. 한쪽에 다큐멘터리와 르포가 있고, 다른 한편에 페이크와 시뮬라크라(실제로는 없는데,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러므로 가상현실)가 있다. 

베르겐 벨젠과 다하우의 유태인 수용소 학살 장면을 찍은 한 장의 흑백사진이 나를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았다는 수잔 손탁의 증언이 전자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라크 전쟁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장 보들리야르의 역설이 후자의 경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버턴을 눌러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사에게 땅 위에서 벌어지는 참극이며 아우성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적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서 군인은 추상적인 기계가 되고 전쟁은 게임이 된다는, 그러므로 현실이 가상현실이 된다는 역설적 현실을 보들리야르의 증언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사진에서 페이크는 그저 눈속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통해 숨겨진 현실, 진정한 현실, 지극한 현실을 눈앞에 불러내기 위한 경우가 많다. 친근한 현실을 낯설게 해 억압된 현실을 폭로하는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와도 통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사진은 찍는 사진에서 만드는 사진으로 진화해왔다. 그리고 만드는 사진은 디지털 환경 이후 보편화된 현실이 되고 있다. 이때 만드는 사진은 그저 사진을 조작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하나의 현실을 만들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또 다른 실재를 제안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가하면, 보는 것의 문제가 사진의 한 축이라면, 그렇게 본 것을 어떻게 재현하는가의 문제가 또 다른 한 축이다. 그렇게 사진은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있다. 본다는 것, 그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회적인, 경제적인, 미학적인, 문화적인, 관습적인 수많은 차이를 포함하고 있고, 그 차이는 그대로 재현의 문제에로, 그리고 사진의 문제 속으로 전이된다. 한 컷의 사진에, 이미지에, 영상에 내포된 이런 차이를 우리는 이미 이라크 사태에 대한 CNN과 알 자지라 방송에서 확인한 적이 있다. 똑같이 객관적 사실보도를 전제로 한 것임에도 그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만다.  

사진과 영상과 설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더 이상 사진으로만 정의하기가 어려운 베른트 할프헤르의 작업은 이처럼 현대사진과 긴밀하게 맞물린 제반 문제들, 즉 본다는 것의 문제, 재현의 문제, 보는 것이 포함하는 차이의 문제, 한 장의 사진이 증언하는 거짓과 진실의 문제,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의 경계에 대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다. 사진으로부터 비롯된, 그리고 이후 점차 영상과 설치 같은 조형 일반으로 그 범주가 확대 재생산되는, 그리고 그 와중에 꽤나 의미심장한 인문학적 관심사가 읽히는,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가 전개되면서 덩달아 사진이 다양한 형식을 얻는 형식적 스펙트럼으로 볼 수가 있겠다. 


사진조각. 360도에서 본 파노라마 정경을 하나의 구 형태로 구현한, 작가의 전형적인 작업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이미지, 어떤 각도에서도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사진조각) 감각은 인간의 감각을 넘어선다. 뒤편을 보기 위해서 뒤쪽으로 돌아가야 하고, 아래편을 보기 위해서 구를 들어서 보거나 몸을 굽혀서 보아야 한다. 여전히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본 단편들을 조합해 보아야 한다. 이전에 상상력이 그 보조역할을 했지만, 그 보조역할(상상력)의 물화된 형식을 보는 것 같다. 그 감각은 심지어 기계의 감각도 넘어선다. 최근에 360도 카메라가 출시돼 작가도 그기에 빠져 있다지만, 그 결과를 보면 아직은 매끄럽지가 않다. 작가는 디지털로 이루어진 구조를 아날로그 미디엄으로 되돌리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그렇게 작가가 아날로그로 만든 감각이 더 완전해 보인다. 사진은 미디어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의 감각능력이 확장된 것으로 본다. 이전에는 보지도 듣지도 만질 수도 없던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작가의 사진조각은 감각 특히 공간에 대한 시지각 영역을 확장시킨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를 계기로 어쩌면 차후에 천리안이 열리고, 심안이 열리고, 혜안이 열리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설치. 작가의 소소한 일상사를 기록한, 원형 거울과 사진설치작업이다. 그 작업을 작가는 <Between us>라고 부른다. 우리 사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인가. 평범한 일상을 기록한 사진을 마치 포위라도 하듯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원형거울들은 다 뭔가. 거울들은 외부환경을 반영한다.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한다. 그렇게 반영에 반영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불교의 인드라망(인연의 망, 인과의 망) 같다. 그리고 원형거울은 만곡거울이다. 시야가 미처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리고 그렇게 예상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게 해주는, 시야를 확보해주고 시각을 확장시켜주는 장치다. 그리고 동시에 어쩌면 개별주체를 더 잘 감시하게 해주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개별주체는 보지 못하는 것을 제도는 보는 것이다. 그렇게 원형거울 혹은 만곡거울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그러므로 그 이중성이며 양가성은 그대로 감시카메라의 그것과도 통한다. 나는 못 보는 것을 제도는 본다.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감시사회), 서로가 서로를 못 미더워하는 사회(불신사회)를 상징한다. 아마도 작가는 제도화된 사회에 만연한 감시며 불신을 예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방인으로서 당연한 정체성 혼란을 예감했을 수도 있다. 


단편 시리즈. 작가는 필름 상태의 비디오 영상을 개별 스틸 컷으로 분리하고 열거하는 방식으로 한 장의 사진을 만들었다. 그건 분명 사진이지만 추상적인 패턴처럼 보인다. 의도적인 조작이 아니라면 대개 사진은 그 속에 현실을 담고 구상적인 형상을 담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진 속엔 현실도 없고 구상적인 형상도 없다. 그리고 그걸 작가는 <단편>이라고 부른다. 짧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기에 이야기는 없다. 현실도 없고 알만한 형상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사진이다. 사진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역설적인 사진이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현실도 있고 형상도 있고 이야기도 있지만, 다만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인 사진이다. 여기서 작가는 현실(현실인식)도 형상(어떤 형상을 알만하거나 추상적인 형상으로 지각하는)도 이야기(서사)도 시지각 방식에 연동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너무 멀리서 보면 현실도 추상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현실이 추상으로 넘어가는, 현실이 무수한 셀들의 집합으로 환원되는 시지각의 변곡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장소를 한 장의 사진으로 압축한 장소특정적인 아카이브의 한 유형을, 사진적인 한 유형을 제안하고 있다. 


망점 혹은 픽셀 이미지.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다. 그 바다에 특정 검색어를 입력하면, 무수한 관련 정보와 이미지들이 뜬다. 그 이미지들 중에는 검색어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도 있고, 최소한의 느슨한 관계만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그 이미지들 중 불특정 다수의 이미지들을 임의로 선정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처리를 하면 작가의 사진에서와 같은, 가장자리가 희뿌옇게 지워진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원래는 뚜렷한 형상들이지만, 더 이상 원래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색점이며 망점들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로 꽤나 폭력적인 장면도 마치 비오는 날 차창 밖에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아롱거리는 빛의 환영을 보는 것 같은 서정적인 이미지로 전환된다. 이 이미지들은 시지각 방식에 있어서 <단편> 시리즈와 비교된다. <단편> 시리즈가 너무 멀리서 볼 때 사물대상이 추상화되는 지점을 다루고 있다면, 이 시리즈는 이와는 거꾸로 너무 가까이서 볼 때 사물대상이 추상화되는 지점, 사물대상 고유의 형태가 아롱거리는 무수한 망점들로, 색점들로, 픽셀의 단위구조로 환원되고 해체돼 보이는 지점을 다루고 있다. 이로써 이 시리즈 작업은 어쩌면 엄연한 현실을 한갓 정보의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현실을 추상화하는 가상현실의 허구를 폭로하는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모닝 마운틴. 그리고 작가는 또 다시 정보의 바다에 접속한다. 이번에는 아예 폭력적인 장면에 집중한다.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 분쟁현장을 생생하게 중계하고 증언하는 사진들을 채집해 재구성해 보여준다. 그런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가 예사롭지가 않다. 이번엔 3D 프린트를 이용해 사진을 재현했는데, 사진의 원형 이미지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보통은 양각으로 출력하기 마련인 것이고, 그랬다면 당연히 이미지의 실체를 알아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음각으로 출력했다. 보통은 두드러진 부분이 실제로는 조형의 안쪽 깊숙이 숨어들고, 시야에서 가까운 부분이 멀게 표현된다. 평면으로 치자면 역원급법에 해당하는 것이고, 아방가르드의 전략으로 치자면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며 소격효과가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알만한 형상을 낯설게 만드는가. 오리무중인 형상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관객은 몸과 시야를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특정 시점에서 비로소 형상의 실체가 드러나 보인다. 평상시대로 보면 안 보이다가도, 잘 보면 보인다. 관성적으로 보면 안 보이다가도, 굳이 보려들면 보인다.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무슨 말인가. 이면읽기와 행간읽기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겉보기를 통해선 결코 사건의 실체를 알 수도 읽을 수도 없다. 그리고 공감능력을 제안한다. 형상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여하튼 몸을 움직이는 노력을 해야 하고, 공감능력이 있어야 사건의 실체에 도달할 수도 있는 일이다. 작가는 폭력도, 살해도, 린치도, 전쟁도, 분쟁도 한갓 정보로 처리되는 시대, 충격에 과부하가 걸려 더 이상 충격 받을 일도 감동 받을 일도 없는 시대, 덩달아 사람들도 현실에 무감해지고 무심해지는 시대에 새삼 실체를, 본질을, 진정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솔루션. 여기에 수조가 있다. 금붕어 한 마리가 유영하고 있는데, 평상시처럼도 보이고 어리둥절해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수조 바닥에는 보통 수조에서처럼 자잘한 자갈들이 깔려있다. 그런데 그기에 어떤 알 수 없는 형상이, 얼핏 돌 같기도 하고 플라스틱 조형물 같기도 한 형상이 보인다. 각 3D 프린트로 음각 출력된, 트럼프와 김정은이 환하게 웃고 있는 초상이다. <모닝 마운틴> 시리즈에서처럼 어렵게 찾아낸 형상이고, 뒤늦게 그 실체를 알게 된 형상이다. 금붕어가 왜 어리둥절해한다고 느꼈는지 알 것도 같다. 그 실체를 숨겨놓고 있는 오리무중의 형태 탓일 것이다. 그 꼴이 꼭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정치인의 웃음의 의미를 모르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같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솔루션이라고 붙였다. 해결 혹은 해법이다. 도대체 앞이 안 보이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어디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지 묻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게 트럼프도 김정은도 수조 속에 있다. 이 두 깡패와 늙다리를 수장시키는 것이 해법이다? 작가는 웃음의 숨은 뜻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은연중 대신하고 있을 것이다. 


뉴스 2017. 최근에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되고 있다. 핵문제 때문이다.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북한, 이해당사자인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여기에 한국처럼 분단국가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가 시끄럽다. 미디어를 온통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관련뉴스로 시끄러운 것. 작가는 미디어를 서치하면서 관련뉴스만을 따로 클리핑 해 하나의 화면에 담았다. 그리고 영상과 오디오를 동시에 재생시킨다. 모자이크처럼 구성된 수많은 움직이는 이미지들, 그리고 여기에 소리가 뒤섞여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소리들, 차라리 소음에 가까운 소리들이 가세해 화면과 소리들의 동시다발적인 무한융단폭격사태를 경험하게 만든다. 모르긴 해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저마다 이해가 가고 설득력이 있고 타당한 주장들이고 소리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타당한 주장이며 소리도 반복되다보면 소귀에 경 읽기가 될 것이다. 배가 산으로 갈 것이다. 점입가경의 지경으로 빠져들 것이다. 겉돌기만 할 것이고, 사태의 본질이며 해법에서 멀어지기만 할 것이다. 눈이 핑핑 돌만큼 따라잡기 힘든 주장들, 도대체 알아먹을 수가 없는 소리들, 혹 그 중에는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내뱉어지는 말들은 어쩜 폭력일 수 있다. 정보의 범람을 넘어 정보의 무한폭력사태 앞에서 사람들은 무감해지고 무심해진다. 

이런 사태 앞에서 작가는 도대체 해법은, 사태의 본질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련 사태에 대한 지나치게 충분한 논의가 오히려 사태 자체를 증발시키는 것은 아닌지, 지나치게 충분한 정보가 오히려 현실과 현실인식을 오리무중에 빠트리는 것은 아닌지,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혹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에 오히려 정보 자체가 뭔지, 정보가 과연 현실성을 담보하고 있고 또 여전히 담보할 수가 있는지를 묻고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는 그 표면에 각각 한옥과 아파트 이미지를 프린트한 다면입방체 구조물(트랜스포머)로 한국의 역동적인 현실을 표상하고, 손바닥보다 작은 거울 조각들로 이루어진 무슨 시지각 장치 같은 구조물을 매개로 본다는 것의 문제를 숙고하게 만들고, 팽이(Kreisel)가 그리는 궤적을 통해 균형과 운동성, 우연과 필연의 상호작용성을 예시해준다. 각각 정체성 문제, 시지각 문제, 그리고 여기에 역학에 대한 오랜 관심사로 귀결되는 이 개념의 지점들이며 성분들은 개별 작업에 귀속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는 작가의 작업 전체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어김없이 사진이 있고, 최소한 사진으로부터 최초의 발상을 얻어 또 다른 형식으로 확장된 것들이다.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본다는 것은 객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개별적인 현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본다는 것은 욕망에 연동되고, 무의식을 파고든다. 그러므로 사진을 매개로 본다는 것의 문제를 파고드는 작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는 색깔도 형태도 없는 욕망에 색깔을 덧입히고 무의식에 형태를 부여해주는 행위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사람의 눈과 카메라의 눈의 경계(광학의 메커니즘)를 넘나들고, 겉보기와 이면보기의 차이(시선의 정치학)를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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