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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스트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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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훈. 버블맨, 거품과 방울 


예술가적 상상력을 자극한 가장 유서 깊은 소재로 치자면 단연 인체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데, 모르긴 해도 결정적인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체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없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시대감정 여하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인 것이며, 그만큼 항상적으로 새로운 해석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관건은 당대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인간해석이, 동시대의 시대감정에 부합하는 신체표현이 실현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이 일에 실패할 경우, 혹은 애초에 이런 문제의식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의 인체표현은 거저 종전의 성과를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오동훈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인체표현을, 그리고 인간해석을 찾아낸 것 같다. 버블맨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거품인간이다. 최근에 거품이란 말은 모든 분야에서 발견되는 과도 혹은 과다현상을 지적하는 사회학적 용어로 정착했다. 특히 부동산과 주식평가와 같은 경제 전반에 거품이 끼여 있다는 표현이 친숙한 편이다. 이처럼 정치 사회 경제에 거품이 끼여 있다면 사람에게도 거품이 끼여 있을 수 있다. 거품이 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원색적으로는 과장이 심한 사람을 의미하겠지만, 이보다는 과다경쟁에 내몰려 자신의 능력 이상을 전시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의 행태를 의미할 것이다. 혹자는 그런 사람들의 사회를 자기가 자기를 착취하는 자기착취사회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의 버블맨은 자기착취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볼 수가 있을까. 아마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그리고 거품은 허망한 꿈을 상징하기도 한다. 거품이 빠지면 본전도 못 건진다는 속설이 그렇다. 거품은 원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없는 걸 추구하기에 허망한 것이다. 다시, 그렇다면 작가의 버블맨은 이처럼 허망한 꿈, 실체가 없는 꿈, 여하한 경우에도 자신의 것이 될 리가 없는 꿈을 좇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초상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일전에 전시제목을 <Life is Bubble>이라고 붙였는데, 아마도 이런 사실의 인식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삶은 거품이다. 정작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과시하고 전시하는 것이 삶이다? 무분별한 욕망이며, 허망한 꿈을 좇는 현대인의 공허한 심리를 읽어내는 작가의 혜안이, 연민이 느껴진다. 

버블을 거품으로 번역할 때가 그렇고, 방울로 번역하면 그 의미는 사뭇 혹은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방울은 애초에 그 실체가 없는 꿈, 그러므로 허망한 꿈이 아니라 꿈 자체를 상징한다. 그리고 꿈은 프로이트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일반적으론 이상과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이를테면 꿈을 가져야 한다거나 꿈은 실현된다는 등)로 받아들여진다. 작가는 이 작업을 꼬마들의 비눗방울 놀이에서 착안했다고 하는데, 꿈의 긍정적인 의미에도 부합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비눗방울을 불면 크고 작은 원형의 형상들이 만들어지고, 그 형상들이 모여 또 다른 형상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진 형상, 결정적인 형상이 따로 없이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의 이행과 변주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비눗방울을 불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꼭 환상을 보는 것 같고, 환영을 보는 것 같고, 꿈 자체를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조각가답게 형태의 변주를 보고, 또 다른 인체표현의 가능성을 본다. 그렇게 작가의 버블맨이 탄생했다. 정해진 형상이 따로 없으니 불안정한,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부유하는, 비눗방울이 그런 것처럼 거울 같은 표면에 외부환경을 반영하는 인간이다. 어쩜 불안정한 인간, 표면적인 인간, 자기반성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한 몸에 구현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이다. 현대인에 대한, 인간일반에 대한, 그리고 어쩜 삶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해석으로 보면 되겠다. 

버블맨은 인간의 형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론 구름처럼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인간(버블맨)이 되고, 동물(버블독)이 되고, 신화적 동물(천마)이 되고, 인간과 사물이 결합된 형태(휴먼바이크)가 된다. 비록 처음엔 인간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점차 특정 소재며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변형되고 변태된다. 덩달아 담아낼 수 있는 의미맥락의 폭도 확장되고 심화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작가가 잉태한 캐릭터 버블맨은 각각 거품과 방울, 과부하 된 현실과 꿈의 양가적 의미를 매개로 현대인의 명과 암을 그려낸다. 결여와 꿈, 결핍과 이상이 하나로 직조된 인간일반의 이율배반적인 초상을 그려낸다. 



정의지, 버려진 양은냄비와 망실된 기억으로부터 


정의지의 작업은 크게 조형에 방점이 찍힌 <Re-genesis> 시리즈, 그리고 커뮤니티아트와 현실참여에 무게중심이 실린 <Engram> 연작으로 구분된다. 외관상 구별되면서,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작업이다. 각 버려진 양은냄비를 조형으로 재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망실된 기억을 조형으로 승화한 것이란 점에서 서로 통한다. 눈치 챘겠지만 작가는 유독 버려진, 그리고 망실된 것에 관심이 많다.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감성 혹은 정서적 성분으로 볼 수가 있겠다. 

먼저 <Re-genesis> 시리즈를 보자. 대략 재생, 부활, 갱신이라는 의미다. 지금과는 다른 원래 상태, 처음상태를 전제로 한 개념이고,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거칠게는 버려진 양은냄비를 조형으로 되살린 것이므로 재생의 일반적 의미 곧 리사이클링을 실천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버려진 걸 소재로 취한 것이므로 소위 정크아트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재의 처음상태를 살피는 일이다. 유독 버려진, 그리고 망실된 것에 관심이 많은 작가의 성향 때문에도 더 그렇다. 작가는 버려진 양은냄비를 보고 꼭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자의식(작가는 신변상의 일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모든 작가들이 거치고 겪었을)이 발동해 버려진 양은냄비를 조형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려진 양은냄비를 통해 사실은 자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가의 조형작업은 시작된다. 조형이라고는 했지만, 처음엔 그리고 아마도 어느 정도는 지금도 여전히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진즉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먼지 풀풀 날리는 노동이라고 조각을 폄하했지만, 실제로 조각은 어느 정도 노동이고, 의미를 부여하자면 신성한 노동이다. 그렇게 노동을 하다보면 노동이 조형으로 바뀌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양은냄비가 조형으로 탈바꿈하는데, 도마뱀이나 이구아나와 같은 등에 단단한 갑이나 비늘을 두르고 있는 파충류들, 코뿔소, 멧돼지, 사슴, 순록, 산양, 황소, 물소(버팔로), 하마, 고릴라, 사자, 호랑이 같은 포유류 동물들, 그리고 장수풍뎅이 같은 곤충류들, 그리고 여기에 최근에는 샹들리에 같은 오브제로까지 재탄생한다. 주로 동물을 재현하는 편이지만, 근작에서는 일상적인 사물과 오브제로까지 그 폭이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버려진 양은냄비를 자르고 구부리고 붙여서 형상을 만드는데, 형상이 다 만들어지고 나면 토치로 형상의 표면을 그을린 연후에 다시 그을음을 닦아내는(갈아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로 인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대비되면서 동물형상의 윤곽이며 세부가 살아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재생이라는 주제의식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즉 최초 버려진 양은냄비는 작가의 조형에 의해 동물형상으로 재생되고, 죽음을 상징하는 그을음을 닦아낸(통과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삶을 상징하는 빛을 획득한다는 식의,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재차 재생된다. 그렇게 버려진 양은냄비는 거듭되는 재생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형상으로 조형되고 승화된다. 어쩌면 상징적 주술행위를 매개시키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재생되는 조형을 통해 사실은 혹은 이와 동시에 정작 작가 자신이 거듭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Engram>은 기억심상, 기억의 흔적을 뜻한다. 새기다, 는 의미의 인그레이브(engrave)에서 온 말이다. 보통 동판을 인그레이빙(engraving)이라고 하는데, 판에 이미지를 새기듯 의식에 기억을 새겨 넣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치매노인 요양원을 방문해 커뮤니티아트 혹은 현실참여미술을 실천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커뮤니티아트 외에 같은 내용을 주제로 한 조형작업도 시도하고 있는데, 절단된 단면이 드러나 보이는(아마도 압축된) 버려진 캔을 집적시켜 전체적으로 원 혹은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형상으로 재구성했다. 이로써 불규칙한 기억의 편린들만 남은, 뒤엉킨, 무분별한, 파편화된 치매 노인들의 불완전한 기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이처럼 버려진 양은냄비와 망실된 기억에 바탕을 둔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재생, 이를테면 동물로 환생한다거나 조형적인 성과로 거듭나는 것을 넘어 삶에 대한 예술의 태도와 입장, 그 존재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최정우, 인식론적 차이를 묻는 


최정우의 작업은 조각이면서도 개념미술의 성격이 없지 않다. 흔히 그렇듯 아카이브의 형식을 빌려 개념미술을 본격적으로 풀어내기보다는, 구조적 특징과 이에 따른 자기 완결적 형태와 같은 조각의 특수성을 견지하면서 개념미술을 실험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관심과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체질로 볼 수가 있겠다. 개념과 구조가 결합된, 혹은 개념이 적정형식을 얻은 그 경향은 2006년 작업 <혼잣말>에 소급된다. 한글의 자모를 조형한, 사실은 무의미한 말들을 조형한 작업이다.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구조적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아마도 근작의 경향에 가장 근사한, 그런 만큼 그 모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런 개념적 성향은 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2008년 <인식함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들>, 그리고 2006년 <인식의 깊이>와 같은 주제가 그렇다. 당시 작업에 곧잘 저울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도 인식의 무게를 저울질한다는 표면적인 의미와 함께, 사물과 사태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의 인식론적 차이(관점의 차이)에 연동된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보면 우선 쌍 따옴표가 눈에 띤다. 풍경을 쌍 따옴표로 가둔 것이다. 따옴표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이 작업을 <인용하다>라는 제목으로 부른다. 자연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이 교차하는,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 사람들의 이동과 행위 모두를 안고 싶은 마음을 담았고, 이로써 뭔가 의미 있는 공간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작업은 작업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이해 그리고 발상을 예시해준다. 즉 작가가 인용한 풍경이 작품이고, 쌍 따옴표는 다만 그 작품을 실현하기 위한 부수적인 장치가 된다. 이러한 사실이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것은 인용이라는 작가의 매개 혹은 개입 혹은 간섭행위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 풍경을 눈여겨 볼일도 없거니와, 이로 인해 무의미한 풍경이 유의미한 풍경으로 탈바꿈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작가의 인용행위에 의해 비로소 풍경은 특별한 풍경이 되고 유의미한 풍경이 될 수가 있었다. 여기에 이 작업은 가변적이다. 쌍 따옴표를 아무데나 갖다놓을 수가 있고, 아무 풍경이나 정경을 인용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도심 속 정경을 인용할 수도, 데모와 같은 사회적 이슈가 첨예하게 부닥치는 현장을 인용할 수도, TV 뉴스 시간을 장식하는 사건 현장을 인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다른, 이를테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경제적이고 때론 미학적인 의미를 얻을 수가 있다. 바로 그 자체가 논평적인 행위를 수반하고 수행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보고서>에서 작가는 열쇠를 소재로 했다. 알다시피 열쇠는 자유에 대한 전형적인 상징이고, 작가 역시 그런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열쇠는 자물통과 키로 구성된다. 작가는 각 자물통과 키 형상을 따로 제작해 일정한 공간적 거리를 두고 설치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원래 바닥에 뉘어져 있던 키를 세워 서 있는 자물통 옆에다가 나란히 세워둔다는 것이다. 조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작가의 조형적 관점과 일반관객의 조각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그대로 반영된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제목으로 유추해보면 자유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부지불식간에 반영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Consequence>. 결과, 결말, 중차대한, 대략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간이 철재 리어카 두 개를 하나로 붙여 형태를 만들었다. 쌍둥이 같이 똑같은 형태를 왜 작가는 한 몸으로 조형했을까. 바로 분단국가를 상징하고 남과 북을 상징한다고 했다. 같이 있어서 오히려 부자연스런 현실을 표상한다고 했다. 작가의 인식론적 관심이 역사적 현실, 그리고 사회적 현실로 확장되는 대목이다. 인식론적 차이에 대한 관심이 현실인식으로 심화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작업에서 주목되는 부분으로 오브제의 차용을 들 수가 있다. 오브제를 조형요소로 차용해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자신의 작업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획득하게 해주는 계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각 풍경을 인식하는 문제, 자유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다루면서, 인식을 매개로 현실을 조형하면서, 작업의 일관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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