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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한/ 지구를 지키는 요정, 물신과 생명의 알레고리

고충환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있다. 한 발로 지구본을 밟고 있다. 신들의 신인 제우스 같다. 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있다. 역시 한 발로 지구본을 밟고 있다. 남자가 신이라면 그녀는 여신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구를 쥐락펴락하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구를 밟아 뭉갤 수도 있는 그 혹은 그녀는 누구인가. 독재자의 화신인가. 아마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표면적으로 이 시대에 신도 없고 독재자도 없다. 지역적으로 그리고 심정적으로 혹 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일반적인 경우로는 없다. 그렇다면 작가는 시대에 동떨어진 현실성 없는 주제를 그려놓고 있는 것인가. 아님, 무슨 현대판 종교화라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뭔가. 알레고리다. 신에게서 독재자로 연이어지는, 그리고 재차 이 시대에 신 혹은 독재자에 해당하는 어떤 존재에게로 대물림되는 신들의 연대기에 대한 알레고리다. 

죽은 신이 환생했다는 얘긴데, 그게 누구인가. 물신이다. 이 시대에 지구를 쥐락펴락하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구를 밟아 뭉갤 수도 있는, 신에 다름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로 치자면 물신밖에 없다. 물신은 의인화된 인격체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이 의인화된 인격체고, 세계를 착취하는 다국적기업이 의인화된 인격체고, 자연을 쥐어짜는 경제제일주의가 의인화된 인격체다. 경제제일주의는 경제성이 없는 것들,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변방으로 내몬다. 그렇게 자본주의에 의해 변방으로 내몰린 것들을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부르고, 조르주 바타이유는 잉여라고 부른다. 냉소적인 말로 잉여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잉여에 관한한 인간도 예외적이지가 않다. 물신이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한다. 물신이 자연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소외시킨다. 작가는 그렇게 한 발로 지구본을 밟고 있는 물신과, 물신이 소외시킨 잉여인간을 대비시킨다. 물신이 착취한 자연을 대비시킨다. 


수조 속에 갇혀있는 동물들은 본래 서식지와 환경이 달라 스트레스로 병든 동물들이 많다고 들었다, 고 작가는 여수에 있는 아쿠아리움을 방문한 인상을 적어놓고 있다. 아쿠아리움도, 동물원도, 식물원도 알고 보면 자연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의 소산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자연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기록하고 명명하는, 소위 자연과학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일들이 다 그렇다. 자연사박물관이며 고고학박물관이 다 그렇다. 노자는 인간이 불행한 이유가 지식 때문이라고 했고, 미셀 푸코는 지식이 곧 권력이라고 했다. 인간은 그렇게 지식이라는 권력을 휘둘러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자기를 착취한다. 제도가 개별주체에게 성과를 요구하는 소위 성과사회를 넘어, 개별주체 스스로 자기의 예상되는(때로 초과하는) 성과를 전시하는 자기착취사회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 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가 제도다. 제도화된 사회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쿠아리움도, 동물원도, 식물원도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전시하고 상품화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전시하고 상품화하는 무분별한 욕망의, 자본주의기획의 또 다른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 그림에 자꾸만 인간을 착취하는 인간 그림이 겹쳐져 보인다. 아마도 지구본을 발로 밟고 있는 물신의 이미지가 어른거려서일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전시하고 상품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품화된 자연환경(인공풍경?)은 당연히 자연이 원래 속해져 있던 자연환경과는 다르다. 여기서 왜곡이 일어난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고래처럼 원래 물속에 사는 동물도 있지만, 백곰처럼 얼음 위에 사는 동물도 있고, 나아가 코끼리처럼 아예 땅 위에 사는 동물마저 있다. 고래와 백곰과 코끼리가 무차별적으로 수조 속에 살고 있고, 수중생물과 육지동물이 하나같이 물속에서 살고 있다. 이건 분명 의도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점강법을 예시해주고 있다. 고래가 수조 속에 살고 있다. 선입견 그대로다. 백곰도 수조 속에 살고 있다. 어, 이건 좀 아닌데, 싶다. 그런가하면 코끼리도 수조 속에 살고 있다. 이번엔 선입견을 배반한다. 다시, 그러므로 고래가 수조 속에 살고 있는 것도 선입견을 배반한다. 고래가 수조 속에 사는 건 얼핏 당연지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백곰이 그런 것처럼, 코끼리가 그런 만큼이나 당연하지가 않다. 물속과 수조는 같지가 않다. 어쩌면 완전히 다른 환경일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전시하고 상품화할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환경파괴가 일어나고 그렇게 파괴된 환경의 복수가 일어난다. 예측 불가능한 환경재앙이 일어나고, 생태계 파괴가 일어나고, 마침내 지구상에서 인간이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뭐라고 부르든 자연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무감하고 무심하고 무관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자연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어도, 최소한 해코지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주의 운운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최소한 자연에 대한 공감은 있어야 하고,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해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물신의 분신인 여신과는 또 다른 소녀가 있다. 그녀는 발로 밟는 대신 손에 지구본을 들고 있고, 특히 코끼리가 살고 있는 수조 앞에선 지구본을 품에 껴안고 있다. 지구를 지키는 요정이고 뮤즈다. 생명신이며 땅 신인 가이아 여신의 분신이다. 물신의 분신에 비해 눈에 띠게 소박하고 연약해보이지만 동시에 단호한 표정이 읽힌다. 여기서 작가는 자본주의와 자연주의를 대비시키고, 물신과 생명을 대비시키고,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대비시킨다. 언제나 그렇듯 이상주의는 결코 현실주의를 이기지 못한다. 비관적이다. 비록 그렇게 비관적이지만 꿈꿀 수는 있다. 유토피아를 꿈꿀 수는 있다.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없으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계다. 어쩌면 현실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꿈으로 지어낸 세계일 수 있다. 그들은 꿈꾸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몽상가들일 수 있다. 어쩜 일장춘몽을 꾸고 장자몽을 꾼 사람들의 후예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순진하지만(모든 꿈꾸는 사람들, 그러므로 몽상가들은 순진하다), 사실을 알고 보면 고장 난 현실을 수선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작가는 그렇게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연을 지키는 요정을 그리고, 고장 난 현실을 수선하는 몽상가를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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