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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시대적 징후 혹은 증상

고충환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전통적으로 예술은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과 감성을 다루는 예술로 나뉜다. 여기서 감성을 다루는 예술은 미와 추, 쾌와 불쾌와 같은 흔히 미학의 학적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은 다시 사회적 현실에서 진실을 찾는 경우와 이보다는 심층적인 인간의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에서 진실을 찾는 경우로 나뉜다. 현실주의와 현실참여미술이 전자에 해당하고, 삶과 죽음, 비극과 부조리, 결여와 결핍의식 같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대상으로 한 존재론적 예술이 후자에 해당한다. 각각 인간이 불행한 이유를 현실에서 찾는 경우(이를테면 잘못된 정치와 경제적인 불평등 그리고 무분별한 경제개발논리와 같은)와 인간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에서 찾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각각 진실의 표면과 이면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러나 그 두 면은 표면적으로만 구별될 뿐 사실은 다 같이 진실이라는 한 몸을 이루는 경우란 점에서 상호작용하고 상호 연동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가운데 이경희의 회화는 사회적 현실에서 인간이 불행한 이유를 찾는 경우로 보이고, 그 경우를 인간의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인 불행의 원인으로 연결시키고 확장시키는 경우로 보인다. 예술을 진실의 도구로 보고, 그 도구를 매개로 불안과 두려움과 대면하는 경우로 보인다. 작가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라고 했다. 어쩌면 작가의 그림을 매개로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갖고 있을지도 모를, 진즉에 앓고 있었을지도 모를 잠재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를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은 온통 암울하다. 핵이 폭발한다. 칠흑 같은 어둠 위로 작은 섬광이 번쩍이고, 순간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어둠은 하얗게 지워지고 세상도 덩달아 지워진다. 무슨 종말 같고 묵시록 같다. 페이드아웃, 게임 오버, 아디오스 코리아가 현실화되는 현장을 보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핵이 폭발하면 히로시마에 폭발한 핵에 비해 그 위력이며 파괴력이 비교가 되지가 않는다고 한다. 북한이 현재 가지고 있는(?) 핵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중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 같은 이해당사자들이 연신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다. 어쩜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북한의 입장은 안중에도 없는지도 모른다. 경제 강국인 한국이 무너지면 세계경제가 휘청한다는 이유로 실제로는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북한은 연신 쏘아올리고, 미국은 겁박하고, 일본은 부채질하고, 중국은 저울질하고, 러시아는 간을 본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별로 없거나 아무 것도 없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온다. 
이런 핵을 매개로 한 일촉즉발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작가는 각 국가별 국기로 표현했다. 각 한국과 북한, 중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의 국기를 무슨 퍼즐이나 모자이크처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 여기서 퍼즐구조, 모자이크구조는 기본적으로 가변적인 구조다. 피해당사자와 이해당사자간의 역학구조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상호간 힘겨루기가 상황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고,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모른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 그래서 그 구조는 가변적이다. 상황여하에 따라서 변수여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재구조화될 수가 있는 것. 감성지도란 것이 있다. 친한 것끼리 모이고, 안 친한 것들을 멀찌감치 동떨어지게 표시한 지도다. 꼭 그런 감성지도를 보는 것 같다. 매번 새롭게 조합되고 재조합될 수 있는, 그런, 위험천만한 퍼즐게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한국과 북한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정국을 그리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을 그렸다. 실루엣형상으로 축약된 양국의 군인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한쪽의 실루엣형상이 하얀 공백으로 지워져 있다. 뭘, 누구를,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일까.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도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정작 실체도 없는 주적을 겨냥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는 행위 자체가 도대체 뭘,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일까. 장 보들리야르는 가상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이라크 전쟁은 실제로는 안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라크 전쟁은 일어났었다. 그런데 이 말은? 보들리야르가 가상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조종간을 움직이고 버턴을 눌러 폭탄을 투하하는 조종사에게 전쟁은 가상현실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게 땅 위에서 벌어지는 참극이며 아우성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적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서 군인은 추상적인 기계가 된다. 작가가 하얀 공백으로 남겨놓은 빈 형상은 아마도 그런 감정도 동정도 없는 추상적인 기계로 화한, 그래서 더 불안하고 두려운 현대판 전쟁의 실체를 암시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가운데가 뚫린 디스크 형태의 원형 캔버스에다가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을 그렸다. 원형의 바깥쪽 가장자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버전이 있고, 이와는 반대로 빈 중심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버전이 있다. 적은 바깥에도 있고 안쪽에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원형의 의미는? 세상이치가 그렇듯 이 역시 돌고 돈다는 뜻일까. 포지션이 가변적이라는 뜻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빙하가 녹아내리는 바다 한 가운데 한 사람이 등을 보인 채 유령처럼 서 있다. 그의 몸은 온통 환경오염을 유발했을 온갖 문명의 쓰레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는 아마도 그를 짓누르는 문명의 쓰레기들과 함께, 녹아내리는 빙하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바다 위에는 낡고 해진, 너덜너덜해진 모자상이 허깨비처럼 서 있다. 낡고 해진 모자상은 옛날 좋았던 시절, 어쩜 문명화 이전의 시절,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시절을 상징할 것이다. 그 시절 역시 갈가리 찢겨져 나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과 함께 바다 속으로, 망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과거지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좋았던 시절은 다 상실되고, 문명의 쓰레기들만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상실감은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며 증상으로서 회자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바다에 사람들이 등을 보인 채 유령처럼 허깨비처럼 서성인다. 알다시피 바다는 무중력인 이라면 모를까 아무나 걸을 수는 없다. 무중력인? 바로 유령들이고 허깨비들이다. 유령들이고 허깨비들만이 바다 위를 건너갈 수가 있다. 작가는 문명의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이런 무슨 물귀신처럼 바다를 걷는 무중력인들, 유령들, 허깨비들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문명은 인간을 위한 것인가. 사회학자 뒤르켐은 아니라고 답한다. 바로 아노미 현상이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정신문명도 덩달아 발달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앞선 물질문명과 뒤쳐진 정신문명 사이에 갭이 생기고 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노미 곧 정신적인 공황상태며 패닉상태다. 작가는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더 공허해지는, 인간소외현상이 더 첨예화되는 역설적인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설적인 현실에 연유한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작가의 감각이, 감수성이 생물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친근한 것이 낯설어질 때 두려움과 공포가 생긴다고 했다. 친근해야할 일상이, 친근해야 마땅할 현실이 낯설어질 때 알 수 없는 두려움, 알 수 없는 불안, 알 수 없는 공포가 사람들을 잠식할 수 있다. 낯설음도 반복되면 일상이 되고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친근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반복되는 낯 설음, 무의식을 파고들만큼 다반사가 된 낯설음이 두려움과 공포의 실체를 가려 알 수 없게 만든다. 무디게 만들고 무감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래서 작가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더불어 사는 이타적인 세계에 살고 있냐고, 문명의 발달로 인해 더 행복해진 삶을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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