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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훈 / 회색도시에 어슬렁거리는 동물들

고충환

언젠가부터 황금시간대 TV 뉴스를 방문하는 새로운 단골손님이 생겼다. 동물들이다. 지금까지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심심한 삶을 살았을 동물들 입장에서 보면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과 동물들은 서로 안 만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사람대로 동물들은 동물대로 각자 상관없는 저네들의 삶을 사는 것이 좋다. 그 둘이 자꾸 만나고 마주친다는 것은 영역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고 이미 비극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차치하고라도 동물세계에서 이미 영역다툼은 피 박 터지는 일이다. 하물며 그런 동물들이 인간을 만났음에랴.

이를테면 멧돼지들이 애써 키운 농작물을 작살내고 겁도 없이 도심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총에 맞아 죽는다. 야생동물 출몰지역이니 운전에 주의하라는 네비의 친절한 안내방송이 영혼 없는 멘트로 들릴 만큼 로드킬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다. 보양식은 어떤가. 곰쓸개가 몸에 좋다고 살아있는 곰쓸개에 빨대를 꼽고 쓸개즙을 빨아먹는 사람들이 있다. 쓸개즙을 빨아먹은 후에는 친절하게도 철제 덮개를 닫아 상처부위가 덧나지 않게 보호해준다. 살아있는 사슴피가 정력에 좋다고 사슴이 살아있는 동안 멱을 따 피를 받아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가히 몬도가네 수준이다. 그런가하면 아프리카의 사바나에 가면 동물의 제왕 사자를 순전한 재미로 총으로 쏴 죽이는 여행상품이 있다고 한다. 알고 보면 그 사자는 사람의 손에 키워져 사람을 겁내지 않도록 훈련된 사자라고 한다. 좀 귀여운 경우로 치자면 도심에 둥지를 튼 새들이 건축현장에서 물어온 못과 철사를 가지고 집을 짓는다고 한다. 인간이 원래 집짓는 걸 동물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이를테면 벌집), 임시변통으로 치자면 가히 인간의 건축술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리고 여기에 병들었다고 못생겼다고 아니면 간혹 멀쩡하다고 무인도에 버려지는 반려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동물이 사람을 만나 덕 볼 일은 하나도 없다. 사람 입장에선 그렇지도 않겠지만. 하긴 동물원도 식물원도 다 사람 좋으라고 하는 일이다. 여하튼.
 

박기훈의 필이 여기에 꽂혔다. 그가 유별난 동물애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하등 중요하지가 않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이고, 작가는 그렇게 공감한 바를 주제화하고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 바로 낯선 도시를 그리고, 그 이상한 도시에 출몰한 동물들을 그리고, 그리고 궁극에는 그 도시의 주민인 사람들과 동물들과의 공존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공존 가능성을 묻는다. 사람과 동물, 문명과 자연과의 공존 가능성을 묻는다. 사실 작가는 도시와 동물이 하나의 화면 속에 오버랩 된, 지금과 같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도시를 먼저 그렸었다. 그리고 그 도시 이미지 그대로 현재 그림에로 옮겨온 걸 생각하면 전작과 근작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고 서로 연장된 일관성 속에 놓인다. 전작에서의 도시에 근작에서의 동물이 탑재된, 그리고 그렇게 마치 무슨 무대처럼 도시 이미지가 동물을 위한 배경화면으로 쓰이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를 그렸다. 그리고 그 도시를 낯선 풍경이며 이상한 풍경이라고 불렀다. 겉보기엔 예사로운 도시 이미진데 왜 그걸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라고 불렀을까. 사실 작가가 재현해놓고 있는 도시 이미지는 실재 그대로가 아니다. 인터넷과 잡지 같은 이러저런 매체 속에서 발췌해온 이미지들을 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그렇게 영락없는 실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 도시고 이미지다. 형식으로 치자면 포토콜라주와 포토샵이 만들어낸 이미지고, 의미로 치자면 가상현실이고 허구적인 현실이다. 이쯤 되고 보면 작가가 왜 낯선 풍경이고 이상한 풍경이라고 불렀는지 알만해진다. 원래 포토콜라주는 알만한 풍경과 친근한 풍경을 낯설게 하기 위해서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사용하던 형식이다. 알만한 풍경이 은폐하고 있는 낯선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서, 친근한 풍경이 숨겨놓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방법이다.

그렇다면 예사롭게 보이는 작가의 도시 이미지는 사실은 그 이면에 어떤 예사롭지 않은 현실이라도 숨겨놓고 있는가. 바로 회색도시, 무감하고 무정한 도시, 무표정한 도시, 경제적인 키 재기를 전시하는 도시, 물신 도시, 그리고 그 이면에 정작 인간을 위한 자리는 없는 도시를 숨겨놓고 있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도시 그림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회색 아니면 모노톤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회색은 말하자면 도시를 표상한다. 도시에 대한 작가의 삭막한, 스산한 색채감정을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는 예사롭지 않은 현실을 숨겨놓고 있는 예사로운(다만 예사롭게 보일 뿐인) 도시를 그리고, 낯설고 이상한 현실을 은폐하고 있는 알만하고 친근한(사실은 알만하고 친근해 보일 뿐인) 도시를 그렸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도시를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실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이율배반적인 도시풍경을 그렸다.
 

그렇게 도시는 심지어 사람에게마저 낯설다. 그 도시가 동물들에게 낯설기는 마찬가지. 그리고 그렇게 낯선 도시에 동물들이 출현한다. 흥미롭게도 작가의 그림에 도시는 있는데, 정작 사람은 없다. 사람 대신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동물들이 사람들을 대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며 도시민들의 우화적인 초상화로 볼 수도 있겠다. 도시를 낯설어하는 사람들, 도시에서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인간과 동물, 문명과 자연과의 관계라는 틀 속에서 볼 일이다.

동물원이 그렇고 식물원이 그런 것처럼 작가의 그림에 출연한 동물들은 자발적으로 출연한 게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는 공존을 증언하고 전시하기 위해서 출연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 의한 무분별한 자연 침해와 환경파괴로 인해 마침내 스스로의 영역을 잃은 야생을 고발하고 폭로하기 위해서 출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주제로서 제안해놓고 있는 공존은 사실은 공존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현실로 읽히고, 공존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읽힌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이상향으로 읽히고, 어쩜 앞으로도 요원할 유토피아로 읽힌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대개 야생들이고, 때로 여기에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도 있어서 이러한 역설적 읽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작가는 이 비정한 도시를, 그리고 그 비정한 도시를 어슬렁거리는, 아마도 낯설어하는 동물들을 그리는데, 그 그리는 방법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로 작가가 채각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채색을 깎아내는 방법이다. 채색을 깎아낸다? 대략 화면에다가 여러 겹의 색면을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서 색층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정한 두께를 가진 화면이 만들어지면 조각도로 새김질하는 방법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얻는다. 새김질을 통해 이면에 숨겨진 색살이 드러나 보이는데, 조각도의 각도에 따라서 그리고 강도여하에 따라서 섬세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얻는다. 동물들의 터럭 하나하나가 만져질 듯 생생한 사실적이면서 노동집약적인 화면을 얻는다.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이미지를 얻고, 평면이면서 오돌토돌한 미세요철을 가진 저부조 형식의 화면을 얻는다. 아마도 판화와 조각,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저간의 지난한 형식실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이 만들어낸 화면효과로 볼 수 있겠고, 그 자체 작가가 찾아낸 고유의 방법론이며 형식논리로 볼 수가 있겠다. 이로써 작가는 문명과 자연과의 공존을 그리고, 사실은 공존하지 못하는 역설적 현실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관이 있다. 자연관이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일원론적 자연관과 이원론적 자연관이다. 주체를 자연의 일부로 보는 자연관과, 주체를 자연과 구별하는 자연관이다. 주체를 자연의 일부로 볼 때 주체는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살고, 주체를 자연과 구별할 때 주체에게 자연은 다만 도구적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을 소외시키다보면 언젠가는 자연도 인간을 소외시킨다. 어쩜 그 역소외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 강도는 인간이 자연을 소외시키는 정도를 넘어설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의 그림은 새삼 그 공존 가능성을 묻고 회복 가능성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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