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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배/ 몽돌과 바다, 상실된 고향을 그리워하는

고충환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중심을 상실하고(한스 제들마이어), 신을 상실하고(니체), 고향을 상실한(게오르그 짐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혹자는 이런 상실감을 결여와 결핍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바로 존재론적 조건 혹은 한계, 그리고 존재가 부조리한 이유를 상실감이며 결여와 결핍에서 찾는 것이다.

이 가운데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 있다. 여기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존재가 유래한 원형에 대한 기억, 어쩜 존재마저 넘어서는 원형적 기억에 가깝다. 그건 앞으로 진행되는 시간보다는 뒤쪽으로 소급되는 시간, 거꾸로 되감는 시간 개념에 가깝다. 그렇게 되감다보면 상실된 유년을 만나고, 기억도 아득한 자궁을 만나고, 아예 기억마저 넘어서는 원형을 만난다. 내가 시작된 곳을 만나고, 세상에 오염되기 이전의 오롯한 나 자신을 만난다. 그러므로 상실된 고향에 대한 기억은 동시에 상실된 나에 대한 기억, 진정한 나(불교에서의 진아)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건 상실된 것인 탓에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향수를 자아낸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이처럼 상실된 그러므로 잃어버린(혹은 잊힌) 원형을 찾아서 진정한 나와 대면하는 경우를 들 수가 있겠다. 존재론적 원형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에서 예술의 존재이유를 찾는 것인데, 때로 그 여정은 단순한 주체의 범주를 넘어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서 원형도 집단무의식도, 나아가 그 표상형식에 해당하는 문화상징 개념도 칼 구스타브 융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다양의 출처와 유형의 뿌리의식이 여기에 기대고 있다.

 
문창배의 회화의 이면에는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사실상의 주제의식 혹은 지배적인 정서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은 동시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통한다. 그 자체 양면적이고 양가적인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든 그 양가감정이 이런 원형, 집단무의식, 그리고 문화상징 개념에 맞닿아있다. 그건 비록 작가의 개인사에 연유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은 대개 이런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며 그리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주관적인 자의식이 보편적인 경험을 재확인시켜주는 경우로, 개별상징이 문화상징의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상실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잃어버린 원형에 대한, 잊힌 존재론적 원형에 대한 향수를 자아낸다.

그렇게 작가는 고향을 그리고, 상실된 고향을 그린다. 작가는 실제 고향이 제주도다. 여기서 제주도가 그대론데, 작가의 고향이 그대로인데, 라고 항변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작가에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향수를 자아내는 고향은 지금여기가 아니라 그때 그곳에 있다. 엄밀하게는 있었다. 이런 과거시제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향수를 자아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는 내가 가장 순진무구했던 시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관념적인 고향을 그리고, 작가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정서적인 고향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크게 시간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 몽돌 시리즈, 내 마음의 보석상자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바다 시리즈, 그리고 그 결이 조금 다른, 삶과 사물과의 교감을 다룬 사물 시리즈(일종의 사물 초상화 개념에 연동된)로 나뉜다. 이 가운데 몽돌 시리즈와 바다 시리즈가 이런 고향을 주제화한 것이고 상실된 고향을 주제화한 것이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돌, 그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돌, 물에 잘 떠서 부석이라고도 불리는 돌, 거센 파도라도 밀려올 때면 서로 부닥치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는 돌, 바로 현무암 재질의 몽돌은 말할 것도 없이 제주도를 상징하는 돌이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 역시 제주도를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몽돌과 바다로 나타난 제주도의 상징을 매개로 고향을 그리고, 상실된 고향을 그린다.

그리고 작가는 몽돌 그림에다 시간 이미지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 자체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을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겠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이 만들어준 조형을 인정하고 여기에 의미부여한 것일 수도 있겠고, 시간을 거슬러 몽돌에 아로새겨진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온 것일 수도 있겠고, 아예 존재를 넘어서는 아득한 시간 저편으로부터 어떤 원형적 존재와 만나지는 사건 혹은 극적 순간을 의식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어느 정도 이 모든 의미를 함축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그림이 고향 혹은 고향의식에 연동된 것임을 생각하면, 이 가운데 몽돌을 매개로 유년을 호출하고, 이를 계기로 원형적 존재와 만나지는 사건으로 읽고 싶다.

여기서 몽돌은 일종의 타임머신 역할을 한다.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그 향기와 소리가 프루스트의 소설 속 주인공을 유년으로 데려다준 것처럼 몽돌은 작가를 잃어버린 추억 속으로 되돌려준다. 시간 이미지라는 부제도 아마 이처럼 지금여기가 아닌 그 때 그곳을 의미할 것이다. 손에 잡힐 듯 극사실적인 실체에도 불구하고 색을 잃은 흑백사진 같은, 그리고 여기에 알고 보면 편집되고 재구성된 그림이 주는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이 이런 읽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지금여기의 몽돌해변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 때 그곳에 있었을 몽돌해변을 그렸다. 지금여기에는 없는 몽돌해변을 그렸고, 그때 그곳을 떠올려주는 몽돌해변을 그렸다. 아마도 지금도 작가는 그때 그곳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몽돌해변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몽돌에 얽힌 구체적인 추억이나 사건이 없어도 무방하다. 중요한 건 작가가 몽돌을 매개로 상실된 고향을 그리고, 상실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는 사실이다. 존재론적 원형을 그리고, 원형적 기억을 그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는 바다를 그린다. 부제로 부친 내 마음의 보석 상자처럼 빛으로 아롱거리는, 일렁이는 수면과 빛 알갱이가 서로 부딪쳐 희롱하는 환상적인 바다를 그렸다. 여기서 내 마음의 보석상자는 줄임말 같다. 내 마음에 고이 간직된 보석상자의 줄임말일 것이다. 몽돌 그림이 시간을 거슬러 상실된 유년을 불러오고 고향을 불러온 것이듯, 그 보석 상자에는 그렇게 상실된 유년의 추억이, 고향에 대한 기억이 고이 간직되어졌을 것이다. 마치 뚜껑을 열면 몽환적인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리고 그 음악이 잊힌 기억을 되불러오는 오르골보석상자 같은 그림이다.
 

그렇게 작가는 몽돌과 바다를 매개로 상실된 고향을, 존재의 원형을, 그리고 궁극에는 진아 곧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사유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저마다의 그리움과 향수를 일깨우면서 사람들을 그 여행에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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