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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 상황조각을 통해본 현대인의 초상

고충환


여기에 사거리가 있다. 사거리에 사람들이 서성인다. 스마트폰에 열심인 사람, 헤드셋 아니면 이어폰을 끼고 목이나 발을 까닥이는 사람(아마도 음악에 심취해 리듬을 타고 있을), 거울을 보며 연신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고치는 사람, 빨대로 테이크아웃커피를 마시는 사람, 멍 때리는 사람, 저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지나면 또 다른 사거리가 나오고 또 다른 사람들이 서성인다. 또 다른 사거리지만 먼젓번 사거리와 다르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지만 먼젓번 사람들과 다르지가 않다. 아마도 그렇게 계속 또 다른 사거리가 나오고 또 다른 사람들이 서성일 것이다. 다르지만 같은 사거리가 나오고 다르지만 같은 사람들이 서성일 것이다. 무슨 필름을 되감기라도 하듯 그렇게 반복될 것이다. 
신기하다. 반복이 신기하다.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하는 반복이 신기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신기하다. 무덤덤해서 신기하고 시니컬하게 신기하다. 그게 일상이라는 것, 일상이 꼭 그렇다는 것이 신기하다. 신기하지도 않게 신기하고 하등 신기할 것도 없는 것이 신기하다. 여기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부러 제약한 것도 아닌데, 다들 하나같이 자유의지를 가진 개별주체들인데 하는 일(짓)이 하나같이 똑 같다. 그 똑같은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의지로 벗어나지 않고 자유의지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한다. 꼭 자발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걸 선택한 것 같다. 틀이다. 보이지 않는 틀이다. 양가적인 틀이다. 벗어나지 않는 것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중적인 틀이다. 사실은 벗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틀이되 틀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쩜 스스로 만든 틀이다. 

문민은 자신의 근작을 <나를 비롯한 그대들>을 위한 에피소드 2라고 부른다(그 전에 에피소드 1이 있었다. 대략 사람 형상의 빙 둘러선 조각 가운데 좌대를 설치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저마다 자기를 전시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다. 이를 통해 그 자신 스스로 조각의 일부가 되게 했다). 무슨 연극제목 같다. 제목이 그렇고 작업도 그렇다. 무슨 상황극(어떤 상황을 극화한) 같고 부조리극(부조리한 인간상황을 극화한) 같고 소극(단편처럼 스냅사진처럼 극적상황을 압축한) 같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전형을 제시한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전형을 창조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혼미한 일상, 지리멸렬한 현실을 재료로 보았을 것이고, 그 재료를 꿰뚫는 핵심을 추출해내는 작가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능력을 창조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전형을 제시하고, 그리고 어쩌면 전형을 창조한다. 전형이란 틀 화된 인식을 말하는 것인 만큼 누구나 한 눈에 보면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다. 비록 작가의 자의식(혹은 문제의식)을 조형하고 제안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전형을 어떻게 제안하고 있는가. 현대인의 일상이라는 전형을 제안한다. 현대인의 일상적인 모습, 전형적인 모습을 제안한다.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하는 반복적인 일상을 제안하고, 채 바퀴, 그러므로 틀, 어쩌면 스스로 만든 틀에 갇힌, 그 틀에 안주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제안한다. 자유의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자유의지가 무색할 만큼 별 볼일 없는 그렇고 그런 고만고만한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않는(혹은 그리고 동시에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일상을 제안하고 삶을 제안한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그가 다름 아닌 비극을 상실한 것에 있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아님 전형적으로 부조리는 비극적인 삶(혹은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 연동되고 운명론과 관련이 깊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대인은 더 이상 비극적인 삶을 살지도 운명론을 믿지도 않는다. 운명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계시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다. 쿤데라 식의 역설적인 비극이다. 현대인은 바로 그 역설적인 비극의 삶을 살고, 작가는 그 삶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거리는 삶의 축도다. 사방으로 길이 열려 있어서 아무 때로나 다 갈 수가 있다. 자유의지다. 그러나 그 모든 길을 다 가볼 수는 없다. 오로지 한 길로만 갈 수가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의 함정이다. 그렇게 삶은 함정이다. 사방으로 열려 있지만, 사실은 저마다 한 길을 선택해 그 길을 가는 순간 뒤쪽으로 다른 길들이 닫히는 함정이다. 또 다른 틀이다. 그 틀 위에, 그 틀 속에 사람들이 저마다 고립된 섬처럼 서성인다. 저마다 자기에 빠져 있어서 결코 서로 만나지는 법이 없다. 그리고 종래에는 스스로 또 다른 사거리를 만든다. 여전히 자기에 빠진 채 사방을 향해 서는 것이다. 그리고 페이드아웃 되면서 연극은 끝난다. 그리고 작가는 흩어져있던 사거리의 모서리들을 모아 한 덩어리로 짜 맞춘다. 이로써 비록 현실에서는 만남도 관계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소외와 불통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관계가 회복되기를 꿈꾼다. 더불어 사는 삶과 소통하는 삶을 꿈꾼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연극을 닮았고 상황극을 닮았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작업의 한 부분으로서 연극적인 요소를 도입한 것일 뿐 연극은 아니다(연극이 아닌 퍼포먼스로 봐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조각이다. 상황조각이다. 스토리가 있는 조각이고, 사연이 있는 조각이고, 상황이 있는 조각이다. 어떤 상황, 말하자면 저마다 스스로 만든 틀에 갇힌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전형적인 상황을 조형하고 연출한 조각이다. 모르긴 해도 연극이 끝난 후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또 다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할 것이다. 똑같지는 않지만 똑같은 것에 진배없는 어슷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고, 그 상황에 참여할 것이고,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은 완성된다. 관객의 참여에 의해서 완성된다. 에피소드 1에서도 그렇듯 상호작용성이라는 미학적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은 무슨 연극무대를 위한 소품 같다. 연극이 끝나면 무대 위에 소품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조각들이 지킨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똑같지는 않지만 똑같은 것에 진배없는 어슷비슷한 상황을 연출한다. 침묵으로서 상황을 연출하고 상황에 참여하는 무언극이다(여전히 작가의 조각은 연극의 주변을 맴돈다. 그만큼 연극적이다). 그들은 네모인간이다. 크고 작은 네모진 상자들을 연이어 붙여 사람형상을 만들었다. 여기서 사방이 막힌 네모상자는 틀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렇게 틀들로 축조된 사람형상은 저마다 스스로 만든 자기라는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을 상징한다. 머리는 있지만 얼굴도 눈코입도 없다. 심지어 팔조차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아마도 불완전한 인간을 상징할 것이지만, 희한하게도 풍부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의 관절구조로 된, 다만 상자를 연이어 붙인 형태들이 쳐다보고, 생각에 빠져있고, 어깨를 움츠려 걷는다. 저마다 특유의 정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인데, 평소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과 표정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애정이 뒷받침되어졌을 것이다. 
작가는 금속을 재료로 이 사람들을 조형한다. 금속은 양가적이다. 다루기에 따라서 차갑고 기계적이고 무표정하고 중성적인 분위기를 낼 수도 있고(특히 스텐), 친근하고 따뜻한, 유기적이고 풍부한 표정을 연출할 수도 있다(특히 철). 아마도 어느 정도 작가의 성정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친근한 쪽을 택한다. 여기에 에피소드 1에서는 단조를 통해, 특히 에피소드 2에서는 알루미늄 주조를 통해 흡사 흙의 질감이 감촉되는 풍부한 표면질감을 조성하고 이로써 유기적인(인간적인?) 맛을 더했다. 비록 저마다 스스로 만든 자기라는 틀 속에 갇혀있지만, 자기내면(아니면 상처)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것일 것이다. 그 내면이 외화된 것이고, 그 성정이 질감으로 화해진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저마다 자기라는 틀 속에 갇혀있는, 그리고 그 틀 속에 자기내면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자기를 가두면서 보존하는 현대인의 이중적인 초상을 예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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