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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경, 산책자들의 숲

고충환

보들레르도 보들레르를 인용한 발터 벤야민도 산책자(만보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이렇다 할 목적의식 없이 그저 걷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리 식으론 소요유가 여기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목적 없음은 상식적인 경우 더욱이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에서는 책망 받아 마땅할 일이지만, 적어도 미학적인 견지에서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시사해주고 있다. 미학적으로 목적 없는 의식은 전제가 없는 의식, 열린 의식, 무엇이든 들고날 수 있는 의식, 매번 새로 시작할 수 의식, 그래서 자기가 온통 무방비 상태로 던져진 의식을 의미한다. 현상학으로 치자면 자기를 매번 의식의 영도지점에 놓는 것이며, 그 자체 세계에 대한 예술가의 입장과 태도와도 통한다. 비록 그 결은 다르지만 칸트 역시 예술과 관련해 이런 목적 없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즉 어떤 사물대상이나 현상이 무관심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그걸 미적대상이라 부르고 미적경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무관심적인 것이 목적 없는 의식과 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산책자의 행보와 예술가의 태도는 서로 관련이 깊고, 전제 없는 의식, 목적 없는 의식이 이 둘을 매개시켜준다.

김재경은 그런 산책자를 그린다. 엄밀하게는 산책자를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매달아 설치하고, 영상으로 만든다. 작가의 작업 속에선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산책을 하는데, 감각적 존재가 산책을 하고, 관념적 대상이 산책을 한다.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개가 산책을 하고, 고양이가 산책을 하고, 꽃이 산책을 하고, 나무가 산책을 하고, 날개 달린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공룡이 산책을 하고, 집이 산책을 하고, 빈 말풍선이 산책을 한다. 현실이 산책을 하고, 일상이 산책을 하고, 공상이 산책을 하고, 신화가 산책을 한다. 산책자의 열린 의식을 들락거리는 생각들이 산책을 하고, 사유가 산책을 한다. 특히 빈 말풍선은 산책자의 속말을 의미할 것이고, 관객의 몫으로 채워질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 꼴이 쉼표처럼 생겼는데, 산책자의 자기를 방기한 태도를 의미할 것이고, 소요유를 의미할 것이고, 휴식과 쉼의 계기를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회화와 설치와 영상을 넘나들면서 아우르는데, 특히 회화와 설치를 통해 이런 산책자를 조형한다. 색이 있는 투명한 아크릴판을 커트해 산책자들을 만들고 일일이 낚싯줄에 매달아 설치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다채로운데, 여기에 그림자가 가세하면서 다채로움을 더한다. 그 공간 속을 거닐면서 관객들은 마치 산책자들의 숲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산책자들의 사유를 나누어가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자체 가변적이고 장소특정적인 점도 이런 산책자들의 숲을 조형한 설치작업의 특징이다. 어두운 공간이면 어두운 대로, 밝은 공간이면 밝은 대로, 낡은 곳이면 낡은 대로, 번듯한 곳이면 번듯한 대로 어디에나 잘 어울린다. 여기에 공간 환경이 달라질 때마다 그 표정이며 분위기 역시 매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물론 작가의 감각적 역량이 그렇게 하는 것이며, 평소 예술에 대한 작가의 지난한 사유 끝에 찾아낸 형식일 것이다. 이를테면 예술가를 산책자에 비유하는 것과 같은.

설치작업이 그렇고, 산책자를 소재로 한 회화는 대략 두 버전으로 구별된다. 얼핏 추상화를 떠올리게 하고 분방한 자유드로잉을 연상시키는 경우와, 대개는 허허로운 여백을 뒤로 한 채 화면 아래쪽에 개 한 마리가 저 홀로 그려진 경우다. 아마도 산책자가 산책을 할 때 주와 객의 경계가 해체되고 허물어지면서 상호 간섭되는 차원을 그린 것일 것이고, 바람과 대기, 소리와 냄새처럼 객체로부터 건너온 것들과 주체와의 상호교감을 그린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개 그림은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로 인해 이런 동적인 화면과는 비교된다. 아마도 산책자들을 개개인의 차원으로 한정한 경우일 것이고, 산책하는 개인의 사유로 환원한 경우일 것이다. 그렇게 한정되고 환원된 그림 속 산책자가 외로워 보인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런 것처럼 외로워 보이고, 저 홀로의 생각 속에 사로잡힌 예술가처럼 외로워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산책을 주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예술가의 태도와 입장을 그리고 자의식을 그린다. 흐르는 생각들을 그린다. 산책처럼 분방하고 외로운 사유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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