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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일, 기억과 기억 사이에 숲이 있다

고충환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다. 김건일의 회화는 그 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람을 이해하게 해주는 첩경이라고 믿었다. 사람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관계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여기에 작가의 특이성이 있다.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을 향해 바로 내달리는 대신, 사람과 사람, 대상과 대상이 얽혀있는 관계가 먼저 보이고, 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관계를 통해, 망을 통해, 배경을 통해 주제에 접근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매사에 그런 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사물과 맥락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사물을 이해하고,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통해 기억을 이해하는 식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물을 이해하는, 기억을 이해하는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는다. 여기서 이해는 곧 인식이다. 그렇게 작가에게 회화는 회화 자체보다는, 인식을 위한 매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회화를 매개로 한 또 다른 인식론적 지평을 열어놓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점(그리고 관점의 차이)으로 본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혹은 달라져 보인다). 이해관계의 차이로 봐도 무방하겠다. 욕망의 차이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관점의 문제는 욕망의 문제에 연동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모이고, 욕망의 차이로 인해 흩어진다. 그런데 이해관계도 욕망도 잘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드러나 보이게 만드는가. 인문학적으로 이면읽기와 행간읽기(그리고 어쩌면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가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인데, 작가는 시점의 문제를 끌어들여 이를 수행한다. 의미론적으로 관점의 차이를 형식적으로 시점의 차이로 해결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정면에서 볼 때와 측면에서 볼 때 그림이 다르다. 정면에서 볼 때 왜곡돼 보이고(왜상) 측면에서 볼 때 바로 보인다. 겉보기에 잘 안 드러나는 것도 이면이나 행간을 꿰뚫어보면 잘 읽힌다. 정면에서 잘 안 보이는 이해관계며 욕망도 측면(다른 관점)에서 보면 잘 보인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것, 이를테면 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해야 하고, 이해관계며 욕망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욕망과 이해관계와 같은 비가시적인 것을 그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심리적인 투시도법을 예시해주고 있다. 평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 여기에 브로콜리가 있다. 보통의 식자재다. 식자재가 브로콜리의 일반적인 존재고 상식적인 존재방식이다. 일반적인 존재고 상식적인 존재방식이 브로콜리를 식자재로 만든다. 만든다? 일반적인 존재며 상식적인 존재방식? 그게 뭔가. 맥락이고 상황이고 전제고 문맥이다. 사물대상이 호명되고 지정되고 등록되는 장소이며, 사물대상이 만들어지는 개념공장이다. 사물의 의미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이 사물의 의미를 정의한다.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 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이 의미들의 처소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의미이다. 모든 것은 텍스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 속에서의 일이다. 그러므로 상황과 전제와 문맥과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도 달라지고 정의 또한 달라진다. 브로콜리를 식자재로 만들어주는 일반적인 존재며 상식적인 존재방식은 브로콜리를 정의하는 하나의 개념 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개념 틀이 달라지면 브로콜리의 의미도 다르게 정의된다. 다른 관점, 다른 이해관계, 다른 욕망이 다른 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물의 위치가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가 달라지는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와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브로콜리는 언덕 위의 나무가 되고, 다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숲을 일군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사물대상의 다른 존재며 존재방식을 열어놓는다. 

기억과 기억 사이. 작가는 어느 날 흔한 들풀을 본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연후에 다시 그 자리를 찾는다. 거기에는 여전히 들풀이 있었지만, 더 이상 예전 그대로의 들풀은 아니었다. 예전 그대로의 들풀은 거기에 없었다. 거기에는 예전 그대로의 들풀 대신 예전 그대로의 들풀에 대한 기억이 있었고, 기억과는 다른 들풀이 있었고, 기억과는 차이 나는 들풀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그 다름과 차이를 그린다. 예전 그대로의 들풀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위에 그 기억과는 다른 들풀을 겹쳐서 그린다. 과거의 기억을 그리고, 그 기억과는 차이 나는 현재를 중첩시켜 그린다. 기억을 그리는 것인데, 그 작화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단색으로 화면을 칠한 후(현상학적 에포케? 의식의 영도지점?) 거즈를 감싼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닦아내면서 형태를 재현하는 것인데, 그 꼴이 꼭 불완전한 형태를 더듬어 찾아가는 기억의 암중모색을 닮았다. 기억의 재현기술이며, 기억을 통해 말을 하는, 기억 스스로 말을 하게 만드는 기억의 복화술이라고나 할까. 
기억은 일종의 인식작용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그 인식작용과는 다른 현실이 있고 차이 나는 현재가 있다. 기억된 인식과 현실인식과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그건(기억된 인식) 사물대상을 정의하는 또 다른 개념 틀이었고, 상황이고 전제며 문맥이고 맥락이었다. 이번에는 여기에 기억이 개입되고 시간이 매개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게 사물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기억에 연동되는 일이다. 그리고 기억은 욕망에 연동된다. 그리고 욕망은 심층적인 층위를 파고든다. 기억의 시간은 과거를 향한다. 과거를 현재 위로 호출하고 되불러오는 것. 이때 각색이 일어나는데, 좋은 기억은 과장하고 나쁜 기억은 축소한다. 그리고 그렇게 축소된 기억은 망각 속으로 밀어 넣어지고, 과장된 기억만 남는다. 여기서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쁜 기억은 이런 망각에도 불구하고 결코 없어지지가 않는데,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잠수를 타고, 억압된 것들이 귀환하는 형태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기억은 왜곡과 축소와 과장과 각색의 뒤범벅이 돼 귀환하고, 억압된 욕망과 과장된 기억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패치가 돼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 뒤범벅과 패치가 현실 위로 착각과 혼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어쩌면 기억이란 착각 곧 도착된 지각이 불러온 여운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 꼴이 꼭 숲 같다고 생각한다. 숲은 겉보기와 실재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 알만한 숲도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리무중이고 암중모색이다. 숲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을 알고 보면 선입견이고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상식과 선입견은 변화무상한 사물대상을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시켜주는 개념 틀에 지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사물대상은 이처럼 자신을 정의하는 개념 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연의 의미는 스스로 그러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그러한 존재를 무슨 수로 개념화할 수가 있는가. 그러므로 개념 밖에서 사물대상을 보는 것, 개념 없이 세계 자체와 맞닥트리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자연은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내어준다. 변화무상한 것이 자연의 본성이다. 살아있는 자연이란 바로 그런 의미이며, 그걸(자연의 본성) 옮겨 그릴 때 비로소 살아있는 그림도 그릴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숲을 그린다. 숲 자체라기보다는 기억을 유비하는 숲을 그린다. 현재의 숲 속에 과거의 숲이 숨어있는 숲을 그리고, 현실의 숲 속에 기억된 숲이 중첩된 숲을 그린다. 과거와 현재, 존재와 부재, 흔적과 현실, 기억과 현실과 같은 시간의 다른 층위들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포개어진 숲을 그린다. 그렇게 그려진 숲 그림이 친근하고 낯설다. 숲에 대한 상식과 선입견을 닮아서 친근하고, 기억과 현실인식이 포개진 것이 낯설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고, 가능하면서 가능하지 않는 풍경이다. 이런 이중성이며 양가성(혹은 이율배반 아니면 자기모순적인?)이 작가의 숲 그림을 어떤 알 수 없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아우라로 감싼다. 거기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미풍이 나뭇잎을 흔들고, 숲 속에 숨겨놓은 호숫가에 나무가 자기를 반영하고, 따스한 햇볕이 수면을 희롱하는 예사로운 숲 같다. 그러면서도 불현듯 랜티큘러의 이중화면처럼 다른 그림이 겹쳐 보이고, 핀홀 카메라로 본 아웃포커싱된 사진처럼 낯설어 보인다. 기억의 표상으로서의 숲을 그린 것인 만큼 캐니(친근하고)와 언캐니(낯 설은)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넘나들어지는, 일종의 심리적인 풍경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저마다의 기억의 숲으로 인도하고 심리적인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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