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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국진의 작품세계, 평면회화를 중심으로

고충환


평자들은 대개 강국진의 작품세계를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눈다. 1965년 <논꼴동인>의 출범에서 이후 <신전>과 <청년작가연립전>으로 연이어지는 1960년대 중후반을 1기로 본다. 이 시기 작가는 행위예술과 매체실험작업과 같은, 당시로선 아방가르드적인 작업경향을 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70년대 전반기에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오브제 작업에 주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점 시리즈(1975)를 시작으로 이후 선 시리즈(1975-1979)와 가락 시리즈(1979-1989)로 연이어지는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후반까지의 시기를 3기로 본다. 마지막으로 이후 작가가 작고할 때까지 시도되어졌던 역사의 빛 시리즈(1986-1992)가 4기에 해당한다. (오광수, 1995.11. 월간미술/ 김찬동, 2006, 강국진: 한국현대미술의 잠재태- 주변부의 영역을 확장시킨 경계인.)
 
이상으로 초창기에 작가는 행위예술과 매체실험작업, 개념미술과 오브제작업을 아우르면서 1960, 70년대 한국아방가르드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후 평면작업에 주력하게 되는데, 당시 작가들이 그렇듯 처음에는 서구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로부터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내다가 이후 점차 주체성과 자생성에 눈뜨면서 독자적인 방법론을 찾아간 경우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점 선 시리즈에서 가락과 역사의 빛 시리즈로 연이어지는 주제의식의 변화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해서 본 글에서는 특히 회화적 평면을 중심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작가와 관련해 특이한 것으로 판화(1972-1992)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작가는 국내 최초의 판화교습소(요새 식으론 판화아카데미)를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도입 초창기에 판화는 흔히 회화보다도 더 전위적인 장르로, 형식실험을 선도한 첨단의 장르로 알려져 있어서 이 부분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점 선 시리즈에서 가락 시리즈로 

모든 회화는 하나의 점으로부터 비롯되고 하나의 선으로 소급된다. 점과 선은 회화의 기본이며 회화가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형식요소 혹은 조건이다. 그리고 그렇게 회화가 가능해지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회화의 당위성을 한정하고 환원하는 태도가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이며, 특히 클레멘테 그린버그 식의 패러다임이다. 회화를 재현을 위한 도구며 수단으로서보다는 회화 자체의 본질에 대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회화는 회화다(회화는 다만 회화일 뿐이다), 는 식의 동어반복적인 경우로 보는 것이다. 다르게는 회화란 하나의 풍경이기 이전에 색면이다, 라는 모리스 드니와,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에서 같은 의미를 확인해볼 수가 있다.  
 회화의 본질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이와 관련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들의 이음새가 평면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선조적 특성에 의한 화면의 평면적 해결은 작품으로 하여금 선조에 의한 평면의 고유한 기질적 발현을 성공적으로 표현하는데 목적이 있다. 선조구조와 이 구조를 지지해주는 캔버스와 색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면이라는 조건 등 일체의 지지체를 구조적 통일에 의해 해결하려 했다.(강국진, 작가의 변.)
 

알다시피 그린버그 식 모더니즘패러다임의 핵심개념이 평면이다. 작가는 평면이라는 조건을 특히 강조하고 있고, 선조구조가 평면 고유의 성질(기질)을 성공적으로 발현시켜준다고 본다. 지지대와 지지체(쉬포르 쉬르파스)에 대한 개념도 엿보이는데, 선조구조와 캔버스 그리고 평면이라는 조건이 서로 부합한다고 본다. 알다시피 캔버스의 평면은 날실과 씨실이 하나의 직물로 짜인 선조구조로 이뤄져 있다. 평자 중 유준상이 작가의 선이 베틀구조를 연상시킨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것일 터이다.4) (유준상, 1995, 작가도록.)
 한편으로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그림을 직물구조로, 베틀구조로 보기는 어렵다. 세로로 그어진 수직선만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가 무한반복 선긋기를 통해, 그 무상한 일념 혹은 무상행위를 (유준상, 1995. 작가도록.) 통해 선조구조를 평면이라는 조건에 일치시키려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까지가 소위 모더니즘패러다임에 기대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다만 형식논리의 소산이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작가의 다른 말을 보자. 

나의 하나의 선과 표현은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 단순히 하나의 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닌 것이다. 계속되어지는 선의 반복 혹은 첩첩히 이루어지는 색의 변화는 어떠한 사실(역사)을 이야기(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나의 작품세계의 발상은 우리의 정신문화 유산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며 세필의 기법 또는 반복의 작업에서 자연히 이룩되어지는 보일 듯 말 듯한 형상이나 단색조 또는 여러 색조가 펼치는 조화와 전면화면이 이룩되어 표현되는 것...문화의 형은 색으로, 나와 너의 관계(사건)는 선으로 표현되기를 원한다...오늘을 사는 하나의 인간 기록인 것...무한한 역사적 시간인 것. (강국진, 1980.8, 공간.) 
 

선 자체를 강조하고, 선을 긋는 행위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모더니즘패러다임에 부합한다. 그러나 밑도 끝도 없이 선을 그어나가는 무한반복행위를 통해 내가 지워지고, 나와 행위가 일체화돼 다만 행위만이 오롯해지는 경지는 전통적인 수행의 의미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회화를 수신에 결부시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패러다임도 행위를 강조하고 작가도 행위를 강조하지만, 이를 통해 주체가 배제되는 경우와 행위와 일체화된 주체가 오히려 그 또렷한 실체를 얻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서사를 끌어들이고 관계를 끌어들이고 시간을 끌어들이고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 보일 듯 말 듯한 형상이란 아마도 어떤 매개를 통해 세계를 보고 풍경을 보는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이를테면 창호 문을 통해 본다든지 발을 통해 보는 것과 같은. 한 템포 숨고르기를 거쳐 나와 세계가 만나지는 차원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다만 형식논리로만 보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부합하지만, 정작 그기에 담긴 정신세계는 전통적인 경우에 그 맥이 닿아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세계를 강조하고 극대화한 것이 가락 시리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앵포르멜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평면작업을 추구하다가 선조작업에 다다르게 되었다. 앵포르멜이나 해프닝에서 느끼지 못한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을 늦게나마 갖게 된 것이 가락 시리즈와 빛의 흐름이며 역사의 빛인 것. (강국진, 작가의 변.) 
 

작가의 평면작업이 앵포르멜과는 대척점에 있음을 알겠다. 앵포르멜은 알다시피 소위 뜨거운 추상, 격렬한 추상으로 대변되고, 이에 반해 작가가 추구한 평면작업은 이보다는 좀 더 관조적인 경우로서 차별된다. 여하튼 그 과정에서 도달한 지점이 가락이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석사논문에서도 이런 가락을 주제화하고 있다. <한국미술의 방법연구- 우리 그림의 가락을 찾아서>가 그것으로서, 한국미술에 면면히 흐르는, 그리고 덩달아 자신의 작업에도 면면히 흐르는 정서적 질료 혹은 질감의 실체를 가락으로 본 것이다. 가락이란 리듬, 운율, 내적울림으로 볼 수가 있겠다. 일종의 소린데, 서양회화의 경우라면 소리의 물화된 형식에 주목한 옵아트로 풀었겠지만, 작가의 경우는 이런 물적 형식보다는 그림에서 우러나는 암시적인 경험, 실제로는 소리가 소거된 이후에도 여전히 소리를 듣는 여운, 감각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소리를 듣는 차원의 경험을 강조한 점이 다르다. 흔히 가락을 내적울림 아니면 내재적 호흡으로 형용하는 것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가락을, 내적울림을 매개로 한국미술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세계와 함께 자신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추상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선들이 무한반복 중첩된, 그리고 그렇게 순수하게 선조로만 이루어진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의 화면에서는 그 이면에 어떤 알 수 없는 형태가 얼핏 드러나 보이는 경우들이 많다. 추상화된 산 같기도 하고, 노을 같은 풍경 같기도 하고, 빛과 같은 비물질적 질료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차라리 암시하는 형태들이다. 이런 현저하게 암시적인 형태들은 뭔가. 작가는 말하자면 화면에다가 일종의 레이어를 쌓고 있다. 형태를 그리고, 그렇게 그린 걸 무한 반복된 선으로 덮어서 가린다. 혹은 지운다. 그리기와 지우기, 형태를 정의하고 무효화하기, 차라리 감각적 형태 이면에 잠재된 본질적인 형태를 발굴하는 과정이 중첩된 층을 이루면서 한 몸으로 합체된다. 그 과정을 통해 상관관계를 묻는 것인데,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형식논리보다는 일본의 모노하의 태도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가락은 이런 상관관계로 번역될 수도 있는 일이다. 주체와 자연, 주체와 현상, 그리고 나와 너와의 상관관계가 가락을 만든다. 마치 빛 자체만으로는 감각적 현상 쪽으로 건어오지 못하는 경우와도 같다. 그러므로 가락은 다르게는 어우러짐의 경우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무한반복 선긋기를 통해 내가 지워지고 오롯해지는 수행과 수신의 행위 혹은 실천논리를 매개로, 빛과 가락의 감각현상을 매개로, 주와 객의 상관관계와 어우러짐으로 나타난 존재의 양태를 매개로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을 조형해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빛 시리즈 

여러 면에서 역사의 빛 시리즈는 앞선 가락 시리즈와 구별된다. 우선 유화와 아크릴이 다르다. 그 다름은 단순한 재료적인 차이를 넘어서는데, 중성적이고 관념적인 색채감정에서 원색적이고 감각적인 색채감정으로 옮아온 것이다. 그리고 무한반복 중첩된 선조와 분방한 붓놀림이 구별된다. 각각 내화와 외화로 형용할 수도 있을 것인데, 절제와 내재화를 통해 내적울림이 암시되는 경우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방임과 방출을 통해 약동하는 생명에너지가 강조되는 경우로 비교해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치자면 형식적으로 추상적 접근을 꾀하는 경우와, 형상과 서사를 그림 속에 끌어들여 일종의 이야기 구조를 전개해놓고 있는 점이 비교된다. 
화면은 대개 이중 혹은 다중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 작가들에게서야 낯설지 않은 경우라고 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선구적인 경우로 봐도 되겠다. 또 다른 경우로는 김흥수에게서 그 선구적 예를 확인해볼 수가 있다. 
 일종의 겹구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현대소설의 한 경향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이를테면 큰 이야기 구조 속에 작은 이야기 구조가 들어있는, 그렇게 큰 내러티브와 작은 내러티브가 동시에 진행되는 식의 액자소설이 그렇다. 내러티브와 내러티브가 따로 가다가 결말에서 만나지기도 하고, 각자 결말로 흐르기도 한다. 영화로 치자면 옴니버스 식인데, 이야기들이 포개져 있는,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긴밀하게 상관관계를 맺기도 하고, 최소한으로 느슨하게만 상관관계를 맺기도 하는, 서로 부합하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 서로 보완적이기도 하고 어떠한 유기적인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기도 한, 그런 이야기구조를 닮았다. 결국 이중화면 혹은 다중화면은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시공간을 해체해 재구조화하는, 그럼으로써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더 입체적으로 구조화하고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이야기에 집을 지어주는 방식이다. 이야기의 건축술이다. 
아마도 역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시간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작가에 의해 착안된 형식일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그림은 전통적인 모티브를 재현해놓고 있는 화면이 한 축을 이룬다. 이를테면 괴석이나 매화 같은, 색동천이나 일원곤륜도 같은, 신라토우와 잉어 같은 전통적인 민화에서 차용해온, 그리고 여기에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차용해온 모티브들이다. 그리고 이 화면과 짝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화면에는 대개 삼각형이나 마름모꼴 같은 기하학적 도형들과 그 변형되고 변주된 도상들이 포진해 있다. 아마도 각각 감각적 형상과 관념적 형상에 해당할 것이다. 현실적 생활감정과 그 이면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세계를 각각 표상할 것이다. 역사의 물적 형식과 그 관념적 실재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때로 크고 작은 붓질로 두 화면을 넘나들면서 가로지르는데, 아마도 상관관계 혹은 상호작용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의 역사관을, 작가가 보는 혹은 보아낸 역사의 빛을, 역사에 있어서 빛의 작용을 표상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기하학적 도형은 정신세계를 표상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내적질서의식을 표상하기도 할 것이다. 자기 내면에 지은 질서의 집을 표상하기도 할 것이다. 

판화 

1975년경부터 여러 기법의 판화를 시도했다. 목판, 실크스크린, 에칭 같은. 판화는 손으로 시작해 기계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그 과정이 본인의 구상을 객관화 간접화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객관화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판화의 특징일 것). (강국진, 1978, 주간경향.) 
 

작가는 1971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한국최초의 판화교실을 개원했다. 당시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 판화 프레스를 직접 제작하고, 김상유, 이상욱을 초빙해 판화교육에 앞장섰다. (이성석, 강국진의 삶을 중심으로 한 예술 개관, 2007, 경남도립미술관.) 
 판화공방도 그렇거니와 특히 판화교육에 관한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학파들이 하나둘씩 귀국해 국내미술대학에 판화과가 개설되기도 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판화시장이 형성되기도 전이어서 당연히 공방체제도 정착되지 않았던 불모의 시기였다. 그런가하면 벤호, 라는 상호명의 수제 프레스기가 드문 수요에 부응해 주문 제작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로 기억된다. 그렇게 옛날에 작가들은 프레스기도, 니들 같은 도구도 직접 만들어 썼다. 
이런 열악한 현실에서 작가는 목판, 실크스크린, 에칭, 석판화, 메조틴트, 그리고 모노프린트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거의 모든 판종과 판법을 두루 형식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회화와는 다른 형식가능성을 보았고, 회화로는 미처 충족될 수 없는 다른 조형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을 것이다. 작가연구를 해보면, 국내에 판화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작가들은 판화를 회화보다 더 전위적인 장르로 보았던 것 같고, 실제로도 분방한 형식실험과 상당한 성과가 확인되고 있다. 아마도 작가 역시 그랬을 것이다. 작가의 증언에도 보면 기계적인 프로세스와 간접화와 같은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이 지적되고 있는데, 회화가 직접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에 비해, 판화는 기계적인 공정에 대한 이해와 판이라는 중간매개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회화와는 다른 표정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작가의 회화 작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회화와 판화가 서로 견인하는 상관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가락 시리즈에서 선을 매개로한, 선긋기의 행위를 매개로한 모더니즘패러다임의 형식논리와 동양의 정신세계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 시도와 성과는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소위 단색화와는 그 결이 사뭇 혹은 많이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의 빛 시리즈에서는 이중화면 혹은 다중화면을 매개로 다중복합적인 이야기구조, 서사구조를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판화를 통해서는 회화와는 다른 간접화의 방식을 실험하는 등 시종 형식을 따라가기보다는 형식을 선도하는 작가적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삶은 한국근현대미술사의 공백을 채워 완성시키는 의미 있는 행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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