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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일/ 발굴된 기억, 유년의 기억과 원형적 기억

고충환

땅에서 놀기와 시간의 집적. 장두일의 회화를 지지하는 두 축으로서 서로 다르면서 하나로 통한다. 먼저 통하는 것으로 치자면 <땅에서 놀기> 시리즈가 유년의 기억을, 그리고 <시간의 집적> 시리즈가 한국적 미의식과 같은 원형적 기억을 각각 발굴하고 캐내는 것에 그 주제의식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점으로 치자면 <땅에서 놀기> 시리즈가 그리기에 바탕을 둔 회화적 프로세스에 방점이 찍히는 반면, <시간의 집적> 시리즈가 만들고 구축하기를 통한 입체와 설치경향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 구별되면서 내용적으로 서로 통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형식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의 주제를 지향하는 서로 상보적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시간의 켜를 헤집어 유년의 기억을 캐내고 원형적 기억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박물학적 상상력 내지 고고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 과정에서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을 복원하는 한편, 그렇게 복원된 아이의 눈을 통해 어른들이 그리고 현대인들이 상실한 것들을 주지시킨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며 증상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시대감정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런 시대감정이며 현실인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을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잃은 유년의 기억과 원형적 기억 앞에 서게 만든다는 점에서, 잊힌 자기와 대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예술을 통한 치유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땅에서 놀기. 개와 새, 물고기와 학, 어미 개와 강아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굴렁쇠를 굴리며 내달리는 소년, 집 위에 집이 포개진 풍경, 아름드리나무를 마주보며 껴안고 있는 아이들, 그 모습 그대로 자라서 연인이 된 소년소녀, 바람에 휘는 미루나무 가로수 길을 가는 소년,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낙서하는 소녀,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글자 연습에 한창인 소년.

작가의 그림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 그러나 그건 알고 보면 어른들의 마음속에 유토피아로 자리한 유년의 기억을 되불러온 것이다. 그렇게 현재 위로 호출된 유년의 기억은 이중적인데, 어른들이 상실한 것들을 주지시키면서 동시에 아련한 추억에 빠지게 만든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땅바닥이 그대로 스케치북이 되고, 그 위에 글씨를 쓰면 그대로 공책이 되는 변신과 마술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일상보다는 사실은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민화적인 세계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 알다시피 존재와 존재가 서로의 경계를 넘어(때론 종의 경계마저 넘어서는)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세계는 일상보다는 이상세계에 가깝다. 존재와 존재가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은 비중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도 민화적인 세계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화적 세계관은 말하자면 이상세계의 원형적 표현으로 봐야하고, 작가는 그 원형적 체질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일상의 얼굴을 한 이상세계의 표현으로 보인다.

형식적으로 <땅에서 놀기> 시리즈는 장지에 흙을 발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에서와 같이 흙의 물성을 강조한 그림과 함께, 흙을 바르지 않고 장지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려 한지며 장지 본래의 물성을 강조한 그림이 있다. 여기에 운동장에 물주전자로 금을 긋던 기억 그대로 최소한의 먹선 드로잉을 부각한 그림도 있다. 외관상 땅과 흙바닥과 마당을 재현한 경우와, 이를 재현하는 대신 여백이며 화면 자체로 대체하고 암시한 경우로 구별된다. 여기서 땅을 직접 재현하는 경우도 그렇지만 특히 암시의 경우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화면 자체를 땅이며 마당으로 본다는 것이며, 회화의 경우로 치자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바탕(바닥)으로 본다는 것이다. 작가의 <땅에서 놀기> 시리즈는 말하자면 땅에서 놀기와 캔버스에서 놀기, 흙바닥과 그림을 위한 바탕이 의미론적으로 연결되는, 회화의, 화가의 알레고리를 예시해준다. 회화와 화가와의 관계를, 바탕과 바닥, 캔버스와 그리고 어쩌면 세계와 화가가 서로 대면하는 관계를 예시해준다.

 

시간의 집적. 도자기와 옹기와 기와 파편은 생활오브제지만 거기에는 한국적인 미의식, 한국적인 미의식의 원형질이 스며있다. 생활오브제이면서 동시에 미학적 오브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삶이며 존재의 흔적,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간오브제이기도 하다. 작가는 도자기와 옹기와 기와 파편을 이용한 일련의 입체작업에서 <땅에서 놀기>를 주제화한 평면작업에서의 유년의 기억보다 더 근본적인 기억, 집단무의식 그리고 어쩌면 유전형질로 아로새겨진 기억, 원형적 기억에 주목한다.

그러나 작가는 도자기와 옹기와 기와 파편을 직접 도입하는 대신 파편 그대로 만든다. 골판지와 스티로폼 조각의 표면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위에 채색을 하고 문양을 새기거나 그려 넣는데, 그 꼴이 영락없는 실물 그대로다. 이것들을 모를 심듯 화면에 빼곡하게 채워 넣기도 하고 화면 아랫부분에 길게 병렬시키거나 하는데, 시간을 머금은 오랜 벽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담장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와 함께 일종의 이중그림(소설로 치자면 액자소설) 혹은 다중화면이 시도되기도 한다. 파편작업과 그림이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게 한 것인데, 개별성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집적된 파편과 그림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그리고 그렇게 형식이며 의미가 상호보충적인 경우들이다. 이를테면 가장자리를 파편으로 빼곡하게 채운 화면의 한 가운데 그림을 배치한 작업이 벽면에 난 창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일종의 만든 오브제 혹은 제작된 오브제로 명명할 만한 파편 하나하나는 모나드, 단자, 단위원소에 해당하고, 따라서 작가의 작업은 그 단위원소를 어떻게 배열하고 배치하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 일종의 모듈구조로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오랜 벽면이나 담장이나 창문 같은 재현적인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탈 혹은 비재현적이고 추상적인 경우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집적(아상블라주) 대신 화면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파편들을 배치하면서 여백이 강조되고, 바람과 호흡과 공기와 같은 비가시적 실체가 암시되고, 긴장감과 역학 같은 화면 자체에서 작용하는 조형원리가 실험된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이 재현적인 경우를 넘어서 탈재현적인 경우로 확장되고 변주되고 심화되는 것이며, 그 자체 순수한, 자족적인 형식논리에 천착한 형식실험의 장이 열린 것이며,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이다(누가 바람과 호흡과 공기를 결정화할 수가 있는가).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이 <시간의 집적>과는 구별된다는 의미로 <일편일각>이라고 부른다. 파편 하나하나의 존재며 생리에 주목한 것이며(그 자체 파편을 최소단위원소 혹은 모나드로 보는 것과도 통하는), 마치 수묵화에서의 필이며 획이 갖는 의미에 눈 뜬 것이다(물화된 필? ?). 여기에 화면에 생기는 그림자가 또 다른 재미를 더한다. 오브제로 차용된 파편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탓에 오브제만한 그림자가, 때론 오브제보다 더 크고 또렷한 그림자가 실재감을 놓고 오브제와 다투는, 그림자와 오브제, 실재와 허구가 다투는 감각적 유희가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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