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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택/ 구석의 인문학,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의 부분이다

고충환

관념에서 일상으로, 관념적 현실에서 실존적 현실로

 

수묵화의 장르적 특수성으로 치자면 관념과 물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수묵화의 본질에 해당하는 두 축으로 봐도 되는데, 이 두 축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로 통한다. 관념으로 치자면 관념산수를 들 수가 있겠고, 여기에 자연에 귀의하고 사물대상에 내가 합일되는 정신적 차원이며 경지를 담았다. 그리고 여기에 수묵 고유의 물성이 부합하면서 이런 정신적 경지며 차원에로의 승화를 돕는다. 사물대상의 정치한 묘사 대신 분위기(다르게는 아우라?)가 강한 질료적 특질이 관념의 형상화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쩜 전통적으로 수묵화의 행보는 이런 분위기가 강한 질료를 매개로 한 관념의 형상화에 바쳐졌고, 그 기술을 정교하게 발전시켜온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수묵화는 좀체 현실을 표현하거나 일상을 묘사하는 일이 없었다. 모처럼 역사적 현실을 표현하거나 일상적 현상에 주목할 때조차 대개는 신화적 사실(서사?) 또는 설화적 사실에 결부되거나 무속적 사실과 더불어서 각색되는 식이어서 현실과 일상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로 남았다. 말하자면 수묵화는 질료에 대한 형식실험(묵법?)이 됐건 아니면 관념의 표현(자연에의 귀의? 합일?)이 됐건 일상과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지게 고고한 장르며 형식논리로 남았다.


유근택의 회화가 갖는 가장 결정적인 미덕은 바로 이런 틀을 깨고 수묵화를 현실과 일상으로 내려오게 했고, 이런 현실과 일상을 매개로 지금여기의 실존적인 차원을 열어놓고 있는 점이다. 그 일은 현실과 일상 자체만으로는 안 된다. 현실과 일상을 해부(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면읽기와 행간읽기를 매개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과 일상의 궁극에 이르고 이를 드러내는 일이다. 다르게는 일시적인 판단중지를 통한 현상학적 에포케를 수행하는 일이다. 관념을 넘어서 현실을 보는 일이며, 관념 없이 현실을 보는 일이다(관념적 현실 곧 현실이라는 관념과 현실 자체는 다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감각적(그리고 관념적) 현실을 넘어 진정한 현실(실존적 현실? 그리고 어쩌면 회화적 현실?)을 읽고 보는 일이다. 그저 읽고 본다기보다는 사실은 읽어내고 보아내는 일이란 점에서 발견이며 발굴을 수행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죽어가는 할머니를 그렸다. 죽어가는 할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진행과정을 낱낱이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지하철을 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보고 여기에 바로크 시대의 풍속화가 피터 브뤼겔이 그린 원작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을 패러디해 결부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풍자한 그림일 것이다. 작가는 지하철에서 조는 군중의 모습에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갈 뿐인 이 시대의 부조리를, 나아가 인간실존의 부조리를 보았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가시적인 것이 아닌 비가시적인 것을 그리고, 최소한 비가시적인 것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다만 주검을 보거나 알 수 있을 뿐. 마찬가지로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도(그리고 이에 따른 부조리도)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다만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군중의 모습을 보거나 알 수 있을 뿐.


그럼에도 정작 작가는 주검(그리고 어쩌면 삶?)을 매개로 죽음을 그리고 있고, 지하철을 매개로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으로 나타난 실존적이고 시대적인 부조리를 그리고 있다. 적어도 그림의 주제로 유추해볼 때 그렇다. 가시적인 것을 매개로 비가시적인 것을 보고, 감각적 현실을 통해 실존적 현실을 읽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이 출몰하는 계기가 되고, 감각적 현실은 실존적 현실이 드러나 보이는 매개가 된다. 조르주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 유령이라고 부른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것을 유령이라고 부른다). 슬라보예 지젝이 자크 라캉을 인용해 실재계라고 부른 것이다(라캉은 억압된 현실을 실재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쩌면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 혹은 소외효과 혹은 소격효과도. 그렇게 작가는 비가시적인 것이 출몰하는 계기로서의 가시적인 것, 실존적 현실이 드러나 보이는 매개로서의 감각적 현실에 관심이 많다. 가시적인 것을 더 깊이 보고, 감각적 현실을 꽤 뚫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억압된 현실이 드러나 보인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꼬마가 어질러놓은 장난감과 이삿짐으로 어수선한 실내정경에서, 그리고 미처 풀지 못한 짐 꾸러미가 생경한 여행지의 외진 방에서 세계의 축소판을 본다. 보기에 따라선 <어쩔 수 없는 난제들>이라는 큰 제목으로 묶여질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정치적 현실의 그리고 삶의 알레고리를 본다. 삶이란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고, 부유하는 것이고, 매번 새롭게 주어지는 어쩔 수 없는 난제들에 봉착하는 일이고, 그 난제들과 더불어서 사는 일이다. 짧은 설렘과 긴 진부함과 더불어서 사는 일이다. 부유하는 삶이고 부박한 삶이다. 도대체 이 삶에는 뿌리 내릴 수도 한군데 정박할 수도 없다. 문제들은 해결된 것 같지만 여전히 미봉책인 채로 남겨지고, 계획과 필연이 삶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저절로와 우연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엔 유독 부유하는,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사물과 정경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소시민적 삶이 물을 주고 가꾼 꿈나무들이 떠다니고, 이국적으로 설레는 꽃다발이 떠다니고(파스텔 톤으로 그린 르동의 몽환적인 꽃? 아파트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놀이?), 미처 내뱉지 못한 속말들이 떠다니고, 잡다한 생각의 편린들이 떠다니고, 이러저런 번민들이 떠다닌다. 그렇게 떠다니면서 실내의 정경은 포화되고 그림 너머로까지 넘쳐난다. 감각적 현실과 관념적 현실이 하나의 화면 속에 포개져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중그림 혹은 다중그림으로 볼 수 있겠다. 소설로 치자면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내러티브가 동시에 진행되는 액자소설로 볼 수도 있겠다. 형식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그림의 용량을 확장시키고 증폭시키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감각적 현실을 통해 억압된 현실이며 실존적 현실(이를테면 미처 못 다한 말들)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유령과 실재계를 불현듯 출몰시키는 미학적 장치로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떠다니는 것 중에 문이 있고 망루가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같은 듯 다른, 얼핏 언제나 그렇듯 그 모습 그대로의 일상이라는 세계가 그기에 있다. 때로 발을 잘못 디디면 추락할 수도 있는. 그리고 공중에 붕 뜬 망루는 이중적이고 다중적이다. 지금여기가 아닌 저기저곳을 향한 이상주의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그 이상주의는 현실에 정박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다. 부유하는 이상? 떠도는 경계? 경계와 감시? 자기검열? 아마도 어느 정도 이 모두를 의미하고 함축할 것이다.


그렇게 비가시적이면서 가시적인 것,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이는 것 중에 불심검문이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불심검문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며 일상에 대한, 그리고 그 일상을 사는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모든 사람은 제도적 주체들이며, 따라서 제도는 그 주체들의 가능하거나 예상되는 일탈을 감시하고 감독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 작가의 불심검문 그림은 말하자면 권력담론을 매개로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를 밝힌 미셀 푸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제도와 권력 앞에서 벌거벗은 인간을 의미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일상을 그린, 일상적 현실을 실존적 현실로까지 확장하고 심화해 그린 일련의 그림들의 중심에 자화상이 있다. 일상을 살고 실존적 현실을 사는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반영된 자연스런 결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의 경우에는 유독 자화상이 많은 편이다. 자기반영성이 강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그 경향이 굳이 자화상이 아닌 다른 그림들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스며든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런데 그 자화상이란 것이 하나같이 예사롭지가 않다. 한눈에도 액션페인팅, 우리말로는 소위 몸그림을 연상시키는, 내적 파토스를 가감 없이 분출시켜 그린 격렬한 그림들이다. 지우고 그리기를 무수히 반복해 그린, 자기부정과 자기긍정의 이율배반적인 과정이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점철된 치열한 그림들이다.


헤겔식으론 부정을 통해 긍정을 얻는 지양에 해당하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불교에서의 진아를 찾는 지난한 여정에 해당한다.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과도 무관하지가 않은데, 옛날 양피지가 종이를 대신하던 시절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에 고스란히 기술된(실제로는 흔적으로 남은) 긍정과 부정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총체가 그렇다. 그렇게 나, 자아, 주체, 에고의 실체는 쉽게 붙잡히지가 않는다. 그래서 작가는 이번에는 목판에다가 아예 칼로 헤집고 들쑤시고 난장을 치는 방법을 택한다. 붓을 칼처럼 칼을 붓처럼 휘둘러 붙잡히지 않는 실체를 붙잡으려는 무모한 행보를 보여준다. 그렇게 작가는 마침내 실체를 붙잡았는가. 진정한 자기와 마주했는가.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작가가 그리고 파낸 일련의 자화상들에는 그 지난한 흔적이며 치열했던 과정이 낭자하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자화상은 일종의 신화소의 형태(그 완전한 형태로 치자면 물과 불과 흙과 공기의 4원소)로 옮겨가기도 한다(신화소를 주체의 근원과 결부시키는 것은 카발라 사상과 관련이 깊다). 물과 불이 그것인데, 특히 물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에서 작가를 대리하는 신화소 중 불이 들불과 연기의 형태로 가끔씩 나타나는 것에 비해 보면,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물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분수가 그렇고, 풍경을 반영하고 관념을 반영하는, 그래서 차라리 의식의 무감한 흐름을 보여주는 호수가 그렇고, 홍수 또는 세계의 기원을 그린, 차라리 매순간 갱신되는 일상의 기원을 그린 소용돌이(휘몰이)가 그렇다. 그리고 물은 심지어 잠을 자기 위한 침대에마저 나타난다. 이불보의 자연스런 구김새와 산맥의 주름, 그리고 물보라마저 이는 파도가 오버랩 된 침대 속으로 풍덩하고 빠져드는 것인데, 뒤척이는 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표현한 것이고, 아마도 잠을 내면으로의 여행에 비유한 몽상적인 해석의 경우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일련의 물 그림들에서 물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를 반영하는 거울에 해당하고, 그 거울은 인류 최초로 자기를 반영한 나르시스의 물거울을 계승한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를 그리고, 일상을 그리고, 실존적 현실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수묵화의 관념적 현실을 회화적 현실(그림 속에서, 그림을 통해 비로소 실체를 얻는 현실. 그러므로 어쩌면 현실을 확장하는 현실)로 확장하고 심화한다.

 

구석의 인문학,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의 부분이다

 

여기에 구석이 있다. 구석은 작가가 실제로 특정해 그린 소주제이기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전작을 관통하는, 작가가 세계를 보고 그림을 대하는 관점이며 태도를 지지하는 전제로 볼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구석이라는 개념으로 묶일 수 있고, 그런 만큼 구석이라는 개념을 프리즘 삼아 작가의 작업을 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구석은 무엇보다도 장소적 개념이고 공간적 개념이다. 그건 분명 장소며 공간이지만 잘 보이지도 인식되지도 않는, 장소 속 비장소이며 공간 속 비공간이다. 여기서 구석은 장소적 개념이며 공간적 개념을 넘어 인식론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즉 인식론적으로 구석은 인식론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그럼에도 여전히 인식론의 대상인 채로 남아있는 존재와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인식할 수 없는 대상, 인식할 수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모리스 블랑쇼를 인용하자면 인식론적 바깥, 인식론 안의 바깥이 존재한다. 시야의 범주 안에 있으면서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사각지대라고 하는데, 그 감각적 한계를 인식론적 한계로 대치하고 확장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초장소)도 그렇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유토피아라고 한다. 유토피아를 이상세계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세계다. 이에 반해 헤테로토피아는 분명 존재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를 의미한다. 푸코는 군대, 감옥, 정신병원, 휴양지(그 목록은 사실상 무한하며, 최근의 사례로는 가상현실과 특히 SNS를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를 그 예로 들고 있는데, 여기선 억압의 계기들이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차곡차곡 쟁여지기만 하기 때문에 사회와 제도의 입장에서 볼 때 위험요소며 잠재적인 혁명의 계기가 된다. 자크 라캉의 실재계(억압된 현실의 계)와 쾌락원칙(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과 오브제 아(여하한 경우에도 대상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불가지)도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가시적인 것을 부르는 유령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에서 구석은 알 수 없는 모종의 일들이 도모되는, 일탈적 행위가 도모되는 의식작용을 구석의 공간적 개념에 빗대어 표현한 것인데, 특히 서재가 그렇고 샤워가 그렇다. 각각 독서와 휴식의 계기를 내세운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세계를 읽는 일과 철저하게 혼자인 시간을 표현한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독서와 휴식은 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인 행위이며 계기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인식론적으로 구석은 비가시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어떤 만찬>은 표면적으로 선남선녀들의 만찬이고 말들의 성찬이지만, 잘 보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해관계가 보인다. 이런 비가시적 실체며 은폐된 실체를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면 작가의 만찬 그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정치적 담론을 주제화한 것인데, 또 다른 경우로는 근작에서의 핵을 매개로 한 6자회담의 주체들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내세운(내몬?) 그림이 있다. 여기서 가장자리는 또 다른 구석이고 바깥에 해당한다. 그렇게 삶은 언제나 가장자리(아니면 구석)로 내몰리는 삶이며 위태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구석은 그리고 가장자리는 위태로운(어쩌면 불안정한) 삶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구석 자체는 장소적 개념이고 공간적 개념이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의식작용(특히 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인)을 빗대어 표현한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공원, 정원, 울타리, 그리고 산책을 주제화한 일련의 그림들이 이처럼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개념을 빌린 의식작용을 표현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표면적으로 공원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지만, 때로 이데올로기적인 장소(모든 공원에는 어김없이 기념비적인 동상이 하나쯤 있다), 일탈이 도모되고 부랑이 움트는 장소, 의심스러운 장소일 수 있다. 그리고 정원은 실제적인 장소로서보다는 마음의 정원을 의미하며, 사유의 유목을 의미한다. 그 핵심개념이 산책이다.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에게 산책은 만보가 즉 아무런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면서 걷는 사람의 의식 상태를 의미하고, 우리 식으론 소요유가 여기에 근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점이 공통점이고, 그 자체로 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이란 점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목적 없음은 결정적인 미학적 덕목이기도 하다. 즉 전제된 의식, 사전에 결정화된 의식이 아닌 열린 의식을 의미한다. 그렇게 열린 의식과 더불어 산책을 할 때면 몸도 산책을 하고, 감각도 산책을 하고, 물론 의식도 산책을 한다. 바람과 대기와 공기의 질감처럼 그 존재방식이 모호한 것들도 산책을 하고, 걷잡을 데 없이 흐르는 생각처럼 잡다한 것들도 산책을 한다. 모호한 것들, 잡다한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비가시적인 것들, 유령들도 산책을 한다.


작가는 산책을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출몰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영상으로 옮긴다. 영상도 그렇지만 때로 작가의 그림은 배경과 모티브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체화된 것처럼 보이고, 모티브가 배경의 일부처럼 보이고, 배경으로부터 모티브가 불현듯 출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산책의 경우 배경은 숲 아니면 나무이기 쉬운데, 숲 사이로 아니면 나무 뒤편에서 모티브(공기의 질감? 흐르는 생각?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적인 경험? 숲의 비의? 숲의 순례?)가 스미는 것처럼도 보이고 배어나오는 것처럼도 보인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인데,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그 실체를 얻는 회화적 사실 혹은 회화적 현실이 열리는 순간이며 사건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산책은 무엇보다도 유목을 의미하며, 사유의 유목을 의미한다. 그저 풍경이고 사물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유목하는 과정에서 사유된 것들이 거꾸로 풍경을 흔들고 사물대상을 간섭하는, 그런, 물과 아(주체)가 상호작용하는 사건이며 장을 열어놓는 그림들이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에게 회화는 세상을 산책하고 사유하는 일이며, 인식론적 구석을 탐색하는 일이다. 의미화 되지 않는 것들, 의미화를 거부하는 것들, 양가적인 것들, 인식론의 그물에 포획되지는 않으면서 다만 감각되는 것들, 인식론(그리고 어쩌면 인식?)의 균열과 틈새를 탐사하는 일이다. 그 탐색과 탐사는 현재진행형이며, 이로 인해 한국화는 또 다른 지평을 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열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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