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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치유와 재생, 여성성의 신화

고충환

실존적인, 히스토리에서 허스토리에로 


Herstory(1998. 덕원갤러리), Green Moon(2012. 고양어울림미술관), 흐르는 섬(2015. 이중섭창작스튜디오), 이지스(2016. 서귀포문화빳데리충전소), 그리고 물결 너머(2017. 프로젝트 스페이스 공공연희). 그동안 작가 박은영이 자신의 작업에 부친 주제들이다. 추상회화에서처럼 그림과 주제가 최소한의 형식적인 구실 정도로만 느슨하게 연결된 경우도 없지 않지만,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서사성이 강한 그림에서 주제는 그렇지가 않다. 우선은 그림을 설명하고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론 그림의 의미며 용량을 확장시키는 계기 역할을 한다. 여기서 주제들은 저마다 고립된 섬처럼 단절돼 있다가도 불현듯 서로 물고 물리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공 너머로 서로가 서로를 견인하고 견인되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만든다. 

그 면면을 보면 Herstory란 말은 없다. History를 비튼 말이고, Hestory를 빗댄 말이다. History를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Hestory처럼 들린다. History가 그 속에 Hestory를 숨겨놓고 있다. 결국 역사란 그 자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기술 같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가부장적 시각으로 본, 가부장적 가치관이며 이해관계를 반영한 주관적 기술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역사가 이처럼 주관적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주관적 기술도 가능해진다. Hestory가 가능하다면 Herstory도 가능하다. 그렇게 작가는 Herstory란 주제에 여성주체로서의 자의식을 담았다. 그 자의식은 꽤나 공격적이다. 통닭을 시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그의 물음에 통닭은 시체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유보적인 답을 하면서도 통닭을 시체에 비유하고 인체에 비유한다. 그리고 사춘기 소녀로 신비화된 성적 굴레를 까발리고 싶다. 그리고 자의식은 자기 분열적이다. 거울을 보며 반영하는 내가 반영되는 너를 위로하고, 의식적인 내가 무의식적인 너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너라고 너는 나라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나는 신이고 악마고 타자고 너라는 랭보의 고백을 닮았다. 물속에 비친 자기를 사랑한 나르시스를 닮았고, 그러므로 어쩌면 죽음(타나토스)을 사랑한 삶(에로스)을 닮았다(나르시스는 물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상이 끝나는 날 핏빛으로 물든 달이 나오지만 세상 어디에도 녹색 달은 없다. 신화에서 해는 남성을 그리고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달이 어둠(그리고 어쩌면 죽음) 속에 생명(그리고 어쩌면 삶)을 잉태하고 있다고 본 것이며, 그걸 여성성과 동일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녹색 달은 생명을 상징할 수 있고(녹색은 흔히 자연의 반영으로 그러므로 생명의 반영으로 알려져 있다), 어둠과 생명, 죽음과 삶이 경계를 넘어 하나로 넘나들어지는 존재의 양가성을 상징할 수 있다. 낯설고 생경한, 이질적이고 신비로운(주술적인?), 우호적이고 때론 파괴적인, 그로테스크한 여성성을 상징할 수 있다. 세상에는 없는, 어쩌면 세상보다 먼저 있었을 신화적인 세계며 원형적인 세계를 상징할 수 있고, 그리고 어쩌면 인류 최초의 사회인 모계사회를 상징할 수 있다. 녹색 달의 녹색은 달 자체의 색깔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의 반영일 수 있고, 숲의 반영일 수 있고, 특히 물빛의 반영일 수 있다. 바닷물이 들고나는 주기가 달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바닷물의 주기와 달의 기울기가 여성의 생체리듬과 그러므로 어쩌면 사사로운 기분과 맞물려있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녹색 달(그리고 달빛)이라는 가상의 달을 빌려 여성성의 신화를 소환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존재론적인, 섬에서 숨으로 


그리고 작가는 욕조에 몸을 누인 채 상념에 빠져든다. 자기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인데, 물 속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 어둠을 지나 심연에 이른다. 그리고 내면여행으로부터 돌아와 불현듯 눈을 떴을 때 반쯤 물에 잠긴 채 그 절반이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이는 한쪽 발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발이 꼭 섬 같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섬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그 섬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다고 생각했다. 존재론적인 섬이다. 존재론적인 고독을 고도 곧 저 홀로인 섬에다가 비유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저마다 고독한 섬들이다. 불교에선 존재를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다. 세상천지에 오직 나 홀로뿐이니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그런가하면 조르주 바타이유는 존재가 고독한 이유를 삶과 죽음(어쩌면 자기내면에서 맞닥트린 어둠과 심연으로 유비되는)과의 불연속성에서 찾는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경제제일주의원칙과 효율성극대화의 법칙에 의해 가동된다. 이로써 경제성이며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금기시되고 터부시된다. 그리고 죽음이 지극한 금기로 지목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분리되는데, 바타이유는 존재가 고독한 이유를 바로 그 불연속성에서 찾는다. 그런 만큼 존재가 고독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처음 상태, 원래 상태, 자본주의 이전 상태 그대로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회복하고 복원할 것을 주장한다.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신화적으로 하강운동은 죽음에의 지향성을, 그리고 상승운동은 삶에의 지향성을 각각 상징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존재(아마도 작가 자신의, 그리고 어느 정도 우리 모두의 분신일)가 물속 어둠을 지나 심연 속으로 내려갔다가 재차 수면 위로 되돌아오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 자체 삶과 죽음과의 연속성에 대한 존재론적 알레고리를 표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존재는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게 된다(사실을 말하자면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하튼). 자기내면으로부터 어둠과 심연에 속하는 것, 죽음에 속하는 것, 억압된 자기와 무의식적인 자기에 속하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고 화해하는 것, 그럼으로써 자기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드라마는 존재 일반의 드라마로 확대 재생산된다. 이를테면 작가의 그림에서 섬과 섬이 물결로 연결돼 있다. 고도와 고도, 존재와 존재가 연속성을 회복하고 있는 것. 그리고 섬과 물결이 상호작용하면서 종래에는 섬과 물결,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넘나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때로 물결은 존재가 발하는(존재에서 퍼져나간) 기의 운동성을 표현한 것 같고, 존재가 숨 쉬는 호흡에 형태를 부여해준 것 같고, 바이오리듬과 같은 존재의 생태지도(생체지도?)를 기입해놓은 것 같다. 의식적인 자기와 무의식적인 자기가, 섬과 물결이, 주와 객이, 그리고 나아가 섬과 섬이, 존재와 존재가 이처럼 둘이 아닌 하나다. 물아일체고 주객합일이다. 현상학으로 치자면 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이다. 나는 세계에 세계는 나에게 속해져 있어서 나(주체)와 세계(객체)를 분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계는 없고 언제나 지각된 세계가, 이미 그 자체로 나 자신인 세계가 있을 뿐이다. 물은 또 어떤가. 물은 부분과 전체를 구분할 수가 없다. 부분이 전체고 전체가 부분이다. 그리고 물결은?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물결은 자잘하게 쪼개진 파문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돼 있다. 존재와 존재가 구분되면서 구분되지가 않는다. 저마다의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유기적인 전체를 일궈내고 있다. 서로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면서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불교의 거울그물 곧 인드라망을 닮았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발을 섬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몸을 섬이라고 부른다. 자신을 섬이라고 부르고 존재를 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후 모든 것이 섬이다. 우는 것이 섬이고 웃는 것이 섬이고 보고 싶은 것이 섬이고 그리운 것이 섬이고 생각하는 것이 섬이고 생각을 비우는 것이 섬이고 흐르는 것이 섬이고 부유하는 것이 섬이고 맺히는 것이 섬이고 풀리는 것이 섬이다. 숨 쉬는 것도 섬이고 홀로 서는 것도 섬이고 사는 것도 섬이고 죽는 것도 섬이다. 작가는 이 모든 섬들을 수묵으로 그리고, 그렇게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수묵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그림을 그릴 때면 약초를 달인 물을 재료로 사용해 치유와 재생의 의미를 담았다. 삶이란 비록 쓸쓸한 일이지만, 그 쓸쓸함을 끌어안을 때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화적인, 이지스와 설문대할망 


작가는 자기 자신을 고대 이집트 나일강의 여신 이시스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지스박이라고 부른다. 이시스는 살해되어 몸이 조각난 채 버려진 남편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내 결국 살려낸다. 오시리스의 시신을 짜 맞춰 미라로 복원하고 사자의 신으로 부활시킨 것이며, 오시리스와의 사이에 난 아들을 통해 복수한다는 것이 이시스 신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여기에는 파괴와 재생, 신의와 희생, 부활과 복수의 드라마가 있다. 여기서 핵심이 재생인데,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재생을 위해선 죽어야 하고, 거듭나기 위해선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 아마도 매순간 죽음과 함께한 나머지 마침내 죽음이 무던해진(감각이 무뎌진 경우와는 다른, 차라리 친근해진?) 삶이며, 이로써 순간순간 거듭나는 삶이며 갱신되는 삶이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수면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재차 아래쪽에서 위쪽으로의 반복운동을 보여주는, 의식적인 자기와 무의식적인 자기가 화해하는, 삶과 죽음이 서로 끌어안는 존재의 양태를 통해 이런 파괴와 재생,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재해석(연극으로 치자면 재연)하고 있다. 이로써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 여성성의 신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주목하는 또 다른 여성성의 신화가 설문대할망이다. 창세 신화의 일종으로서, 설문대할망은 제주도(탐라)를 창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론 부삽으로 흙을 퍼다 날라 제주도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세목이 더 중요한데, 창세과정에서 오줌과 방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신을 죽인 시체로 세상을 창시한다거나, 자신의 오물을 이용해 세상을 창시하는 것이 창세신화의 대략적인 경우임을 생각하면 그다지 낯선 경우는 아니라고 봐도 되겠다. 문제는 오줌과 방귀를 이용한 창세신화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사실을 살피는 일이다. 미하일 바흐친 식으론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겠고,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인용하자면 애브젝션(신체 분비물과 같이 지리멸렬한 것)이 자기를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짐짓 진지하게 볼 때가 그렇고, 일반적으로 해학과 풍자가 반영된 경우로, 그리고 요새 식으론 유쾌 발랄 통쾌가 만든 이야기로 볼 수가 있겠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여성성이 발현되고 자기실현을 얻는 장이며 계기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손수 만든 봉제인형으로 온몸을 가린 채 일련의 퍼포먼스를 전개해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설문대할망을 캐릭터화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역할극을 수행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로써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순간을, 유쾌 발랄 통쾌한 여성성의 이야기가 자기실현을 얻는 현장을 재연한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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