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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충돌하는, 들끓는, 분열되는, 그리고 이따금씩 합체되는 의식

고충환

김주성은 의식을 그린다. 의식이 주제다. 의식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고 색깔도 따로 없다. 어떤 색깔이며 형태로 특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의식을 그린다는 작가의 기획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이고 무모한 기획인가. 그렇지는 않다. 공감각이 있어서 이처럼 색깔도 형태도 없는 것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색깔과 형태가 색깔도 형태도 없는 것을 표상하는 것인데, 이런 표상을 매개로 관념과 의식 그리고 감정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을 그릴 수가 있게 된다. 회화적 재현의 오랜 관습에 의해 습득된 것으로서, 형태지각심리학(게슈탈트 이론)과 같은 학적 성과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사실이다. 공감각은 원래 시각기호와 청각기호와 같은 오감이 서로 호환된다는 사실의 인식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이로부터 관념과 의식 그리고 감정의 표상형식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색깔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어떤 형태가 어떤 관념을 표상하는지를 알고 있다. 소위 차가운 추상과 뜨거운 추상이 어떻게 다른지, 작가의 그림에서와 같은 뜨거운 추상이 어떤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게 작가에게 추상은 추상이 아니다. 적어도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과 같은 추상을 위한 추상은 아니다. 작가에게 추상은 표현이며, 재현의 또 다른 한 형식이다. 외적으로 작가의 그림은 추상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이처럼 추상의 형식을 빌려 의식을 표현한 것이고 재현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추상은 말하자면 추상 자체라기보다는 의식의 표상형식이다. 이러한 사실, 이를테면 영락없는 추상으로 보이는 형식논리를 매개로 의식을 재현하고 표상한다는 작가의 회화적 태도는 전작과의 유기적인 관계에 견주어 볼 때도 일관성과 함께 설득력을 얻는다. 이를테면 전작에서 작가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일화적인 내용, 현실을 비튼 풍자와 해학과 같은 시대적 발언을 서사적인 형상미술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후 근작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자기내면에 주목(아마도 신변상의 변화와 함께 이에 따른 정체성 문제와도 무관하지가 않을)하게 되면서부터는 서사적인 추상미술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쪽으로 발전하고 진화해왔다고 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작가에게 추상은 사실은 서사적 형상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겠고, 그렇게 형상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흩어지고 모이는 양상에 따라서 다른 형상, 다른 서사(이를테면 의식과 같은)를 표상하게 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추상의 형식을 빌려 의식을 재현하고 표현하고 표상한다. 의식을 암시하고, 감정의 응어리를 표출하고, 내면독백 혹은 자기고백을 매개로 한 서사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메시지는 비록 작가의 내면의식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정작 작가 개인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이고 실존적인 조건으로,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확장되고 심화된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의 내면의식이란 것이 알고 보면 서로 크게 다르지가 않다는 사실이 의식을 주제화한 작가의 작업에 공감하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는 의식을 그린다(의식). 작가에게 의식은 삶이다(삶과 의식). 존재 자체이며 자기 자신이다. 의식을 매개로 자기 자신과 조우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의식과의 조우). 의식을 그리면서 자기를 반성하는 것이며, 그 중도에서 그리고 끝에서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나, 자아, 주체, 에고의 실체를 찾아서 떠나는 여로를 그린 것이며, 무슨 연어처럼 자기의 본성을 찾아서 자신의 삶을 역류하고 되짚는 여정을 그린 것이며, 불교식으론 진아(진정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를 찾는 지난한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동안 역사를 그리고 사회를 그리던 작가가 문득 역사가 발원하고 사회가 수렴되는 원천으로서의 자신(개별주체)에게로 되돌아왔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기 반성적이다. 비록 자기를 그린 것이지만, 그 그림 속엔 역사와 사회와 같은 객관적인 지평이, 역사와 사회 그리고 개별주체가 얽히고설킨 관계가, 그리고 그 관계로부터 유래한 상처와 환희가, 존재와 존재, 주체와 주체, 주체와 타자가 상호작용하면서 부침하는 존재론적 사건이 오롯이 녹아있다. 바로 이것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총체로 부를 만한 의식 속에, 작가가 그린 의식 그림 속에 낱낱이 배어있는 것이다. 개인의 내면풍경을 그리고 내적 드라마를 그린 것이므로, 더욱이 추상의 형식을 빌려 그린 것이므로 얼핏 잘 안보이지만 잘 보면 보이는, 그런 그림이다. 


의식은 잠잠하다가도 들끓는 도가니와도 같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와도 같다. 상호간 이질적인 삶의 경험의 조각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깔때기와도 같다. 그 의식이 때론 같은 꿈을 꾸고(의식-같은 꿈을 꾸는), 더러는 다른 꿈을 꾼다(의식-다른 꿈을 꾸는). 같은? 다른? 같거나 다르다는 것은 둘 이상의 복수를 전제로 한 개념이 아닌가. 최소한 두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속엔 두 개의 의식이 산다. 의식과 더불어 의식이 유래한 원천으로서의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깊은 무의식이 산다. 의식과 더불어 의식에 의해 추방되고 유폐된 억압된 욕망이 산다. 의식이 분기된, 혹은 의식의 다른 이름인 자아와 초자아가 산다. 주체로 치자면(의식은 곧 주체다)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가 산다. 페르소나는 알다시피 그 어원이 가면에서 왔고, 따라서 제도적 주체며 사회적 주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아이덴티티는 그 가면 뒤에 숨는 주체, 억압된 주체를 의미한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의 의식은 이중분열 되고 다중분열 된다. 여기에 삶의 부조리가 있고, 모순이 있고, 이율배반이 있다. 


니체는 이 분열을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표현했다. 각각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의식(코스모스)과, 해체와 혼동을 통해 강인한 생명력을 얻으려는 의식(카오스, 위대한 무질서?)에 해당한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삶의 충동(에로스)과 죽음충동(타나토스)으로 표현했다. 각각 자기를 보존하려는 의식(자기보존법칙)과, 주어진 자기의 용량을 낱낱이 소진하고 탕진해 바닥을 보려는 의식(프로이트의 리비도?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인 의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자크 라캉의 쾌락원칙?)에 해당한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 두 의식이, 두 충동이 서로 싸우는 것이다. 의식을 도가니에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이 부조리하고, 자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바로 그 두 충동이 충돌하고 두 의식이 부침하는, 때로 두 의식이 하나로 합체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분열되는 마음속 역동적인 현장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4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심장한(소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40년이라는 세월은 그동안 그림을 통해 자기를 표현해온 작가의 화력과, 그리고 고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이주민으로서의 삶의 연대기와 겹칠 것이다. 크게는 회고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회고적 의미답게 의식을 주제화했고, 자기를, 존재의 삶을 주제화했다. 그렇게 작가가 그림을 통해 전개해 보이는 의식의 스펙트럼은 곧 자신이 걸어온 삶의 스펙트럼이기도 하다. 그 전망 가운데에는 환희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고, 말 못할 속사정을 털어 놓은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고국을 떠나게 된 배경이며, 이주민으로서 부닥치고 풀어야 할 난제 같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래한 정체성 문제 같은. 그리고 여기에 작가로 하여금 한때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게 했던 지병 같은. 


그렇게 작가는 자신의 삶의 경험을 담담한 그리고 때론 격정적인 그림으로 풀어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감정(마음씨가 따뜻한 여인의 의식)을 풀어냈고, 트라우마(내 의식에 아로새겨진 주홍 글씨)를 풀어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꼭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는 과정과도 같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마치 살풀이와도 같고, 주술(때론 스스로에게 주술을 거는 자기주술)과도 같다. 의식 저편에 억압된 무의식(마치 얽히고설킨 실타래와도 같은)을 의식의 수면 위로 되불러와 대면하고, 그리고, 치유하는, 그리고 그렇게 의식을 그리면서 치유가 되는, 그림 자체가 구원이 되고 카타르시스가 되는, 그런 그림을 작가는 그려놓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비록 작가 개인의 내면풍경이며 내면드라마를 그린 것이지만, 그 풍경이며 드라마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이고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사건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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