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서울아트가이드 디.에디션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정남/ 때론 촘촘하게, 때론 느슨하게 굽이져 흐르는 자연율

고충환

자연율과 관조적 풍경. 각각 2002년과 2006년 처음 선보인 이후 사실상 지금까지 줄곧 김정남의 회화를 지지하고 견인해온 주제의식이다. 당시 그림을 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만, 적어도 주제의식만큼은 그대로 공유되고 변주되는, 확장되고 심화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자연율과 관조적 풍경은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전제며 원천으로, 인문학적 배경으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당시 그림에서 작가는 상대적으로 회화적 효과에 강한 석판화로 자연율을 표현했다. 변화무상한 자연을, 자연의 무한한 생성과 흐름을 표현했다. 비록 그림 자체는 고정돼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서 간단없는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와 운동성을 암시하는 자연의 본성(자연성)을 표현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자연율은 자연의 본성과 통하고 자연성과 통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자연성을, 감각적 자연과 관념적 자연을, 물리적 자연과 자연의 원인을 구분했다. 자연율은 말하자면 감각적 자연과 물리적 자연의 원인에 해당하는 자연의 본성이며 원형(자연의 원형? 원형적 자연?)이다. 그리고 그 세목이 변화무상한, 무한한 생성과 흐름이며, 간단없고 끊임없는 변화와 운동성이다. 자연율(자연의 성정?)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율 자체는 리듬과 율동, 파장과 파동, 움직임과 운동성, 주름과 결을 의미한다. 무한하게 생성하고 흐르는, 간단없이 변화하는 자연이 그려내고 드러내는 패턴이다. 바이오리듬이고 생명패턴이다. 그게 뭔가. 에너지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자연율이라는 주제의식을 빌려 자연에 내재된 에너지를 그리고, 기의 운동성을 그리고, 바이오리듬을 그리고, 생명패턴을 그린다. 자연율을 매개로 각각 자연의 무한한 생성변화를 조형하고(전작), 그리고 그렇게 변화하는 자연이 그려내는 생명패턴을 형상화한(근작)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자연율이 자연에 내재된 본성(자연성)을 캐내고 발굴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관조적 풍경은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전작에서 작가는 창호문창살을 통해 은근하게 비쳐 보이는 자연을 표현했는데, 자연을 직접 대면하는 대신 어떤 매개를 통해 한차례 걸러진 자연과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 그 매개역할을 하는 것이 관조다. 그렇다면 자연을 관조한다는 것, 그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자연을 어떻게 볼 때 관조적으로 본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관찰이라는 말과 대비시켜볼 때 그 의미는 뚜렷해진다. 관찰이 그런 것처럼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집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반쯤은 방기한 상태에서 그저 보는 것이다. 무관심적 만족의 대상(칸트)으로 보는 것이고, 소요유의 상태(장자)로 보는 것이고, 순수한 즐김과 향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고, 휴식과 쉼의 계기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에 대해 내가 열리고, 나에 대해 자연이 열리는, 그리고 그렇게 상호간 무방비상태에서 서로 들락거려지는 차원이 열리고, 그렇게 열린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자연은 비로소 자기를 열어 감각적 자연의 이면에 숨겨진 자연의 본성을, 자연성을, 자연율을 내어준다. 여기서 각각 관조적 풍경과 자연율로 나타난 주제의식은 하나로 통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자연을 관조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본성을 캐내고 자연율을 캐내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율을 그린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근작에서도 여전히 자연율을 그리지만, 엄밀하게는 자연율을 심화시키고 변주해 그리지만, 그 꼴이며 양상이 전작과는 사뭇 다르다. 이를테면 근작에서 작가는 포맥스와 캔버스, 한지와 알루미늄 패널과 같은 다양한 소재 위에 펜으로 무한 반복되는 세선을 그려 넣는다. 때로 끝이 뾰족한 니들을 이용해 세선을 그리기도 하는데, 단순한 그리기를 넘어 화면에 미세한 요철(아니면 스크래치?)을 만들고 조성하는 판각으로 볼 수 있겠다. 더러는 판각된 요철에 모래를 채워 넣어 선묘를 대신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식실험을 전개해 보인다.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동원된 소재 여하에 따라서 저마다 그 인출되는 표정이 다르다. 이를테면 한지에 펜으로 그려 넣은 선의 패턴이 잉크와 종이가 일체화된 수묵화를 연상시키고,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표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반해 알루미늄 판에 조성된 세선이 빛에 반응하면서 마치 화면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미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보인다. 사실 화면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일루전 효과는 유독 알루미늄 판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지만,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은 작가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성질로 봐도 무방하겠다. 실제로 작가는 화면이 움직이는 효과를 옵아트에서 착상해왔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이와 함께 작가는 산을 그린 세선을 동양화의 준법에서 착상해와, 이를 옵아트와 결합시킨 소위 옵준이라는 신조어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게 가녀린 세선으로 빼곡하고 촘촘한 화면이, 한눈에도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노동집약적인 화면(아마도 그 자체 어느 정도 수행성과도 무관하지가 않을)이 처음 보면 섬세하게 주름진 가녀린 철망을 보는 것 같다. 아니면 철망을 단색조의 색면 위에 포개놓은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보면 지형을 세세한 부분으로 자른 후 한데 결합해 놓은 등고선을 연상시키고 주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재차 다시 보면 비로소 첩첩산중이 보이고, 중첩된 산맥이 보이고, 준령이 보인다. 화면이 서 있는 상태에서 볼 때가 그렇고, 평면으로 화면을 누인 상태에서 보면 물이 들고 빠지면서 뭍에 남겨진 흔적처럼 보이고, 파도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산처럼도 보이고 바다처럼도 보인다. 여기서 바다에서 나고 산이 키워준 감수성 운운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까. 최소한 작가의 무의식으로 침잠된 감수성이 부르는 대로 산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자연을 그리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화면을 부분적으로 지운다. 애써 그린 그림을 마치 비로 쓸어내듯 큰 붓으로 지우고 뭉개면서 산맥과 산맥 사이의 골짜기를 표현하고, 준봉 위로 그리고 준봉과 준봉 사이사이로 흐르듯 스치는 안개를 표현하고, 몽실몽실한 운무를 표현하고, 수면과 같은 물웅덩이를 표현한다. 여기서 세선은 비록 산처럼 보인다고는 하나 분명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따라 그린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관념을 그린 것이고 자연의 관념을 좇아 그린 것이다. 관념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여기에 부분적으로 지우고 뭉개기가 도입되면서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실재감을 더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자연을 매개로 관념적인 그리기와 감각적인 그리기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층위로 스며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지우고 뭉개기는 자연의 감각적 실재감을 더하면서, 동시에 보기에 따라선 그 자체 정지된 화면에 미세한 움직임을 도입하고 암시하는 것 같은 속도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아마도 한쪽 방향으로 쓸린 붓질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선이 뚜렷한 부분과 흐릿하게 지워진 부분이 대비되면서 입체감을 조성하는데, 마치 초점이 나간 사진 혹은 인위적으로 초점을 조절한 사진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은 비록 2차원적인 평면이지만, 동시에 3차원적인 입체감을 불러일으키고 일루전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그림은 관념적인 그리기와 감각적인 그리기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층위로 스며있다고 했다. 실재와 허구가 하나로 결합된 것이다. 비록 실재하는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순수하게 작가가 그려낸 가상의 풍경인 것. 데자뷰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을 연상시키지만, 그럼에도 엄밀하게는 존재해본 적이 없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풍경이며 허구적인 풍경이다. 작가의 관념이 투사된, 작가의 관념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풍경이다. 나아가 사실 작가의 그림을 그저 풍경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일이다. 비록 자연을 연상시키고 풍경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저 맹목적인 그리기와 이에 따른 수행적인 과정이 우연하게 자연풍경을 연상시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의 결, 파, 주름, 호흡과 같은 관념적 실재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어쩌면 가상현실 시대에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워지면서 자연이며 풍경을 재해석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자연풍경에 대한 전혀 다른 존재방식을 제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미디어시대에 걸 맞는 자연풍경의 존재방식이며 형식논리를 나름으로 제안한 것일 수 있겠다. 실제로도 작가의 그림은 사물대상을 입체로 시뮬레이션해 보여주는 컴퓨터그래픽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관념적이고 허구적이다. 문제는 비록 관념적이고 허구적이지만, 그 그림이 다름 아닌 자연을 겨냥하고 있고 자연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념적인 자연? 그게 뭔가. 유토피아고 아르카디아고 이상향이다. 작가의 그림엔 이러저런 삼각형으로 다져진 대지가 등장하는데, 원래 중국의 진시황이 곧잘 머문 것으로 알려진 원정원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상적인 도형을 상징하는 삼각형을 빌려 이상향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삼각형은 때로 멀리 깃발이 보이는 골프장으로 대리되기도 하는데, 이상향에 해당하는 현대판 버전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했다. 모난 데가 없고, 사나운 데가 없고, 모든 상황이며 형편을 하나같이 다 수용하고 끌어안는 자연의 순리며 무한한 포용력을 상징한다고 봐도 되겠다. 때로는 촘촘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굽이져 흐르듯 연이어지는 작가의 산맥 그림은 사실은 바로 이런 자연의 순리며 포용력을 그린 것이고 자연의 성정을 그린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 속에 도입해놓고 있는 유토피아는 특정의 그림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사실은 작가가 그린 모든 자연 그림에 면면히 흐르는 것일 수 있고, 이로써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자연의 성정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지상에 유토피아를 세우는 일임을 침묵으로서 웅변하는 그림일 수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110-020 서울시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5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