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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선/ 빈 의자, 보이지 않는 신과 동행하는 삶

고충환

사람은 누구도 저 혼자서 살 수는 없다. 한문에서도 사람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국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이듯 서로 의지하면서 살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언에서도 이러한 형국은 확인되는데, 여기서 사회적 동물은 관계를 전제로 한다. 주체와 타자가 나와 네가 관계로 맺어질 때 비로소 사회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여기서 관계는 다르게는 동행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즉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와 그리고 때론 무엇인가와 동행하면서 산다. 그렇게 나는 너와 동행한다. 너는 산 사람(동반자로서의 너)일 수도 그리고 때론 이미 죽은 사람(추억을 상기시켜주는 너)일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나와 동행하는 파트너가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때론 진리와 진실, 신념과 가치관 같은 추상적 관념과도 동행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산 사람과 동행하고 죽은 사람과 동행한다. 사람들(타자들)과 동행하고 추상적 관념과 동행한다. 더러 어긋난 관계며 잘못된 동행(다르게는 만남)도 있을 수 있지만, 대개 동행은 삶의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된다. 

작가 전미선은 자신의 그림을 Accompany-Hidden Power라고 부른다.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다. 대략 동행, 보이지 않는 힘 혹은 숨겨진 힘 혹은 내면적인 힘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말하자면 삶 속에서 누군가와 동행함을 느끼고, 그 느낌은 삶의 힘이 된다.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하는 느낌을, 위로 받고 위안 받는 느낌을 그림으로 옮겨 그린다. 그게 누군가(작가는 누구와 동행하는가). 신이다. 그게 무엇인가(작가는 무엇과 동행하는가). 죽은 아버지의 기도다. 작가는 말하자면 신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죽은 아버지의 기도와 더불어 위로 받고 위안 받는 삶을 산다. 그리고 그 삶을, 그 생활감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얼핏 주관적인 경험에 한정된 주제의식이고 그림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 마련이고, 그로부터 위로 받고 위안 받는 어떤 계기며 동기 아니면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신과 아버지와 기도 그리고 사실상 그로부터 유래하고 변주된 대상(이를테면 어떤 원형적 존재나 대상)이라면 진즉에 공유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개별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상황논리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 삶이며 생활감정을 어떻게 그림으로 풀어내는가. 작가의 그림은 크게 두 경향의 회화로 구별된다. 그렇게 구별되면서 이면에서 서로 통한다. 색채 위주로 볼 때 흑백 모노톤의 그림이 있고 컬러 그림이 있다. 소재 중심으로는 부엉이(올빼미?)가 등장하는 그림이 있고 빈 의자에 방점이 찍히는 그림이 있다. 먼저 의자를 그린 컬러 그림을 보자. 그림에는 그저 빈 의자만이 덩그렇게 그려져 있다. 하나의 의자가 단독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 세 개의 의자가 등장한다. 그림 속에 비록 사람은 없지만, 동행을 암시하고 대화를 암시하는 연극무대를 보는 것 같다. 빈 의자로 사람을 암시하고, 빈 의자들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며 동행이며 대화를 암시한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암시하는 부재의 미학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투사한 사물극이나 사물인격체를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무엇보다도 암시의 기술일 수 있다. 그린 것으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고, 부재를 통해 존재(존재의 흔적)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빈 의자를 매개로 관계며 동행이며 대화를 암시하는가. 작가의 그림에는 대개 두 세 개의 의자가 등장한다고 했다. 작가는 의자들을 저마다 다르게 그려놓고 있는데, 의자 본래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재현한 경우가 있고, 실루엣 형태로 축약 표현한 경우가 있고, 최소한의 라인으로 형태의 가장자리만을 정의한 경우가 있다. 라인은 직접 그려 넣기도 하고, 더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자개를 연이어 붙이는 방법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다양한 형식의 의자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중첩 표현된 것인데, 그저 의자를 변주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이런 형식논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존재감이나 현존성 아니면 실물감에 차이를 둔 것이다. 이를테면 실재적인 존재와 내재적인 존재, 감각적인 실체와 관념적인 실체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동시에 시간의 차이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감각적 실체는 온전하게 그리고 관념적 실체는 최소한의 형식으로만 표현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현재에 가까운 이야기(대화)는 또렷하게 그리고 현재에서 멀어질수록 아득하게 표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컬러를 매개로 대화의 다채로움을 더했다. 이로써 외관상 보기에 의자를 중첩 표현한 것은 사실은 존재를 중첩 표현한 것이고, 나아가 시간의 차이를 중첩 표현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렇게 작가는 감각적 실체와 관념적 실체가 동행하고,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상황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로 흑백모노톤의 그림에 등장하는 부엉이는 무엇이고 누구인가. 부엉이는 알다시피 낮에 자고 밤에 사냥하는 맹금류다. 밤을 지새우는 새, 어둠을 지키는 새, 어둠을 밝히는 새, 새벽을 여는 새다. 이런 실질적 의미로부터 예사롭지 않은 상징적 의미가 파생된다. 이를테면 비이성의 어둠에 빠진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실제로 그 의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지혜를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서도 확인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으니 지혜고, 세상이 어둠 속에 빠지는 걸 지켜내니 파수꾼이다. 그렇게 작가는 일상 속에서 지혜와 동행하고, 파수꾼과 더불어 대화한다. 신과 동행하고, 아버지의 기도로 인해 위로 받는다(공교롭게도 기독교에서 신을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영적인 아버지?). 작가의 그림에서 부엉이는 이처럼 관념적 실체를 상징하고, 보이지 않는 힘이며 내면적인 힘을 의미한다. 

상징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그림은 이면에서 기독교도상학의 전형이며 상징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를테면 기독교도상학에서 빛과 소금은 각각 어둠을 밝히고 정화하는 것을 상징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자면 등불(램프)이 그것이고 등불이 암시하는 빛이 그렇다.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서 빛은 각각 어둠을 밝히는(아마도 그 자체 정화를 의미하는 소금의 상징적 의미와도 통하는) 부엉이로 그리고 아예 등불로 대리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루시앙 골드만은 신의 속성으로 은폐성과 편재성을 들고 있다. 신은 숨어 있으면서 도처에 있다.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가 않지만, 도처에 있어서 잘 보면 보인다. 작가는 그렇게 잘 보이지가 않지만 잘 보면 보이는 신을, 신과 동행하고 대화하는 생활감정을 빈 의자로, 그리고 빈 의자에 앉아있는 부엉이로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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