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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희/ 허연 밤, 희뿌연 밤, 칠흑 같은 밤

고충환

유독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강한 작가들이 있다. 그런 작가들이 자화상을 주로 그린다. 세계에 자기를 이입하고 사물대상에 자기를 투사하는 능력이 특출한 작가들이다. 이때 반드시 자화상일 필요는 없는데, 뭘 그려도 자화상이 된다. 어떻게 그런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에게 세계는 온통 징후가 되고 증상이 된다. 징후와 증상으로서의 세계가 되고, 스펀지처럼 나를 빨아들이고 내가 흡수되는 세계가 된다. 그래서 뭘 그려도 자기가 된다. 세계가 온통 그리고 이미 자기이므로. 

임춘희의 경우가 그렇다. 그에게 회화란 심리적 자화상(2003년 심리적 자화상)에 다름 아니고, 자기고백(2014-2015년 고백)에 다름 아니다. 흐르는 생각(2013년 흐르는 생각)들을 그리는 것인데,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처음에 생각들은 두서없이 흘렀고 개연성 없이 흘렀다. 초현실주의와 트랜스아방가르드, 자동기술법과 토템, 의식의 흐름과 자유연상기법이 분별된 그리고 때론 무분별한 파편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흐르는 생각의 편린들 그대로를 옮겨 그린(차라리 포착한) 그림들이 질 들뢰즈의 정신분열증 분석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편집증으로 나타난 제도의 관성에 반하는 것이었고, 결정적인 의미에 반하면서 비결정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었고, 정체성의 논리에 반하면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술가의 실천논리(실천논리라고는 했지만,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저절로 수행되는)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분열적이고 파편적인 그리고 무분별한 생각의 조각들이 이후 잦아들고 응축되면서 점차 한줄기의 생각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잦아든다기보다는 응축되면서 오히려 내적으로 더 격렬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러면서 그림도 덩달아 점차 두서를 가지고 되었고 개연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그림은 응축된 생각이 되었고 감정의 덩어리가 되었다. 뭘 그려도 그렇게 되었고 풍경을 그릴 때도 그랬다. 그가 풍경을 그리면 그 풍경은 언제나 자기가 동화된 풍경(2009년 풍경 속으로)이 되었고, 그가 숲을 그릴 때면 그 숲은 어김없이 자기감정과 동일시되는 숲(2010년 창백한 숲)이 되었다. 동화되면서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렇게 풍경을 그릴 때 풍경 속에 스며들어 그 자신 풍경이 되었고, 어둠을 그릴 때 어둠 속에 흡수되면서 스스로 어둠이 되었다. 

무슨 뛰어난 회화적 자질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발가벗음과 절실함과 진정성이 그렇게 만든다. 발가벗은 세계와 발가벗은 내가 만나질 때 일어나는 일이고, 어떤 절박함(결핍과 결여의식?)이 세계의 민낯을 목격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숲 자체, 밤 자체, 어둠 자체에 맞닥트릴 때 일어나는 일이다. 세계와 세계의 개념은 다르다. 세계는 세계의 개념에 가려져 있고, 개념이 세계를 뭐라고 부르든 세계는 세계의 개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자연에 대한 모든 개념을 무효화한다. 개념으로 숲을 만나고 밤을 만나고 어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개념 없이 만나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러자고 감각이 있고 감수성이 있고 예술이 있는 것이다. 개념 없이 만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숲 자체, 밤 자체, 어둠 자체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극적 순간에 동참하자고, 그 떨림과 설렘과 때론 두려움을 나누어가지자고 예술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가.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숲이 많고 밤이 많고 어둠이 많고 물이 많다. 진즉에 작가의 그림 자체가 좀 그랬지만 얼마 전에 바다와 교류할 수 있었고, 그보다 더 전부터는 숲과 교감할 수 있었다. 그 교류와 교감이 작가를 더 물 속으로 끌어들였고 밤 속으로 끌어들였고 어둠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속에서 바다를 보면 바다를 볼 수가 없고 숲을 보면 숲을 볼 수가 없다. 바다가 그리고 숲이 이미 그리고 온통 자기 자신이 되었으므로. 바다로 육화된 자기가 거꾸로 우리를 보고, 숲으로 체화된 자기가 거꾸로 우리를 보는 것이므로. 그렇게 다만 바다로만 보이고 숲으로만 보이는 것이므로. 그 바다에, 그 숲에 자기가 보이고 작가가 보이는가. 

작가에게 숲은, 밤은, 어둠은, 물은 경계와도 같다. 숲을 지나면 평지가 나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어둠이 걷히면 밝음이 오고, 물을 지나면 육지가 나타나리라는 생각은 다만 세상에 떠도는 풍문, 의심스런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경계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경계는 움직이는 경계고 미증유의 경계며 양가적인 경계다. 경계를 지우는 경계다. 그 경계 앞에서 파스칼은 두려움을 느꼈다. 임춘희의 그림은 바로 그런 경계 앞에 서게 만들고 세계 앞에 서게 만든다. 자기분신인 세계(작가에게 세계는 온통 자기분신이다) 앞에 서게 만들고, 세계의 처녀지(개념 없이 맞아들이는 세계는 언제나 처녀지다) 앞에 서게 만들고, 징후와 증상으로서의 세계 앞에 서게 만든다. 알 수 없는 발신자(타자들 그리고 내 속의 타자들)로부터 보내온 사연들로 수런거리는 숲 속에, 밤 속에, 어둠 속에, 경계 속에 서게 만든다. 

그 경계가 열어 보이는 지평을 작가는 낭만적 풍경이라고 부른다. 원래 로맨틱은 금지된 사랑(다르게는 관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다음 생을 기약하는 사랑(이를테면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에서 왔다. 낭만주의 풍경 역시 온통 폐허며 묘혈을 그린 것이다. 낭만주의 당시 고대 그리스 로마 유적이 발굴되었고, 영화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일이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래서 낭만주의 작가들이 그린 폐허며 묘혈은 결국 과거를 그린 것이었고, 과거의 영화를 그린 것이었고, 과거의 영화의 흔적을 그린 것이었다. 현재를 그린 것이지만 현재를 그린 것이 아니었다. 현재 속의 과거를 그린 것이었고, 부질없는 현재에 비해 영원한 과거를 그린 것이었다. 이런 부질없는 현재로부터 덧없음이 나오고, 영원한 과거로부터 향수가 유래한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그린 폐허와 묘혈은 바로 그런 덧없는 향수(상실감을 동반한 그리움,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는)를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그린 낭만적 풍경에서 그런 부박한 현실이며 덧없는 향수가 느껴지는가. 

한편으로 예술가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낭만주의 때 일이다. 보들레르가 그 전형적인 경우로 알려져 있다. 천재와 영감(지금여기가 아닌 저기 그곳에서 오는), 순례자와 수도승(지금여기가 아닌 저기 그곳을 지향하는)으로서의 예술가상이다. 그렇게 낭만주의가 전승한 것에는 광기도 있다. 광기는 밤(그리고 어둠)과 관련이 깊다.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밤을 그린 것이 많다. 밤의 풍경, 아득한 밤, 취한 밤. 취한 밤? 광기에 취한 밤? 알 수 없는 발신자로부터 보내온 사연들로 수런거리는 숲의 광기에 취한 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온통 밤이다. 허연 밤, 희뿌연 밤, 그리고 칠흑 같이 새까만 밤이다. 그 밤이, 그 어둠이, 그 숲이 보는 이를 자기 속에 품어 안으면서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부드럽고 은근하고 강렬하게 사로잡는 힘이 작가의 그림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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