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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원형적인 형상, 영적 체험이 열어놓은 비전

고충환

성경의 창세기는 태초에 흑암이 있었다는 것으로 서두를 열고 있다. 문자 그대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신에 의해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흑암이, 공허가, 혼돈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적시한 것이다.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 천지창조의 전제가 된 것이다. 흑도 어둡고 암도 어둡고 깊음도 어둡다. 이런 어둠 자체며 절대어둠으로부터 빛이 창조되었다. 공허로부터 충일함이 창조되었고,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카오스로부터 코스모스가 유래했다. 이런 천지창조 신화는 다만 그 정도와 표현에 차이가 있을 뿐 세계의 모든 기원신화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빅뱅 곧 최초의 대폭발에서 우주가 유래했다고 보는 자연과학의 입장도 이러한 사실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이처럼 존재는 흑암과 공허와 혼돈으로부터 유래했고, 재차 흑암과 공허와 혼돈으로 되돌려진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유래했고, 재차 죽음으로 되돌아간다. 내어준 것이 재차 돌려받는다. 이처럼 생사순환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 존재의 공공연한 비의이다. 삶이란 그 무한반복운동의 미미한 계기에 지나지 않으며, 그 고리를 끊는 것이 해탈이다. 인식론적 세계(지)는 미증유의 세계(무지)로부터 유래했고, 재차 미증유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인식론적 세계는 끝이 있고, 미증유의 세계는 끝이 없다. 인식론적 세계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는 미증유의 세계의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모든 앎은 임의적인 것이고, 따라서 임의적인 것은 영적인 깨달음을 통한 존재의 거듭남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세계의 그리고 존재의 기원신화며 서사에는 일정한 신비주의가 스며든다. 모든 과학에는 영적 차원이 포함된다. 과학은 미증유의 세계를 밝히는 것이고, 그 처음과 끝에는 항상 영적 차원이 있다.


인간사_생성/상생/환희/무간(현현시대). 작가 김용관이 자신의 영적 체험을 옮겨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 부친 주제며 제목이다. 영적 체험을 비전으로 보고, 그렇게 본 그대로를 그린 그림이다. 기와 기가, 에너지와 에너지가 서로 부닥치고 스미는 생기론을 그린 그림이며, 직관으로 본 영적인 그림이다. 감각적인 세계가 아닌 본질적인 세계며 실재적인 세계(세계의 실재)를 그린 그림이다. 생명과 우주가 창조되는 극적인 순간을 그린 그림이며, 절대어둠으로부터 빛이 창조되는 찰나를 포착한 그림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을 그린 그림이고, 생성과 소멸을 무한 반복하는 존재의 운동을 그린 그림이다. 우주를 떠도는 기운을 그린 그림이며, 아니마 곧 우주의 호흡을 그린 그림이다. 이처럼 무엇 무엇을 그렸다고는 하나, 설핏 작가의 그림은 어떤 대상을 특정해 그린 것이 아닌, 순수한 형식요소와 형식논리에 천착해 그린 추상화 같다. 그저 무분별한 붓질과 비정형의 얼룩들이, 빛과 어둠이, 색과 색이(그리고 아마도 존재와 존재가) 서로 스미고 충돌하는 추상화 같다. 뜨거운 추상? 서정추상?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얼룩들이며 자국들이 어우러져 어떤 풍경을 일구어낸다. 천지가 개벽하는 극적인 순간을 그린 것도 같고, 우주가 움트는 핵(옴파로스? 세계의 배꼽?)을 그린 것도 같고, 우주가 폭발하면서 생긴 가스구름과 성운을 그린 것도 같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파도며 바다를 그린 것도 같고, 번개가 번쩍이는 섬광을 그린 것도 같다. 찰나적인 빛이며 흐르는 빛을 그린 것도 같고,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며 생명의 씨앗을 그린 것도 같다. 정리를 하자면(도대체 정리 자체가 임의적이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그 자체 결정적인 것이 아닌, 항상적으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존재의 운동성을 그린 것이고, 존재의 생기(생기론)를 그린 것이다.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는 미시세계를 그린 것이고, 너무 커서 미처 다 미치지 못하는 거시세계를 그린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내면적인 풍경 같고, 심리적인 풍경 같고, 관념적인 풍경 같고, 특히 영적인 풍경 같다. 


이처럼 00같다는 것, 바로 유보적인 정의며 비결정적인 정의가 테자뷰를 불러일으킨다. 언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친근함을 자아내지만, 사실은 감각적인 세계의 층위에는 속하지 않는 비전이고 풍경이다. 친근함과 낯설음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풍경이다. 회화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널리 알려진 경우로 치자면 회화는 암시의 기술일 수 있다. 그린 것으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을 암시하는. 가시적인 것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말하자면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것인데, 작가의 열린 그림은 바로 그 암시의 기술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 같다. 곱게 빻은 조개껍질(그리고 아마도 이외에도 다른 이질적인 재료들)과 물감을 혼합해 안료 대신 사용하는, 시간차를 두고 흘리기도 하는, 더러 캔버스를 흔들기도 하는, 그리고 그렇게 화면에 변화를 주면서 그린 그림들이다. 안료의 농담과 질감의 강밀도 여하에 따라서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무겁게 침잠하기도 하는, 그런 그림들이다. 미세한 크랙이며 비정형의 얼룩과 자국이 도대체 붓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도유화(도기의 유약으로 그린)를 연상시키고, 서로 스미고 충돌하는 이질적인 층들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마블링을 연상시킨다. 모르긴 해도 그동안 알만한 그리고 알 수 없는 허다한 형식실험이 있었을 것이고, 필연으로 우연을 통어하고 갈무리하는 지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과정이 분별되게 그리고 때론 무분별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종래에는 거침이 없고 자유분방한 차원이며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시원의 풍경, 태초의 풍경, 우주의 풍경, 천상의 풍경, 생명의 풍경, 존재의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인 비전을 통해 본 영혼의 풍경(아마도 일정하게는 선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체험과도 무관하지가 않을)을 열어놓고 있었다. 


불현듯 작가의 그림은 기수련이나 선수행의 한 부분으로서의 그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영적 체험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수행이란 자기에 집중하는 것이고 자기를 지우는 것이다. 자기가 지워질 때까지 자기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마침내 자기가 지워진 공백상태에 밀고 들어오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객관적인 비전이며 원형적인 형상일 수 있다. 기도 선도 하나같이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을 받아들인다. 자연을 상실한 시대, 고도의 인위가 자연을 밀어낸 시대에 작가의 영적 그림은 우리가 무엇을 잃었고 잊었는지 되돌아보게 하고, 저마다의 자기를 돌이켜보게 한다. 감각적이고 표면적인 시대에 원형과 본질과 실재와 같은 거대담론의 가치를 새삼 되새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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