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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안, 유토피아를 향한 존재의 여정

고충환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진리와 진실, 삶과 죽음, 신과 이상, 형이상학과 같은 큰 이야기(거대담론)를 매개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리고 사사로운 작은 이야기(미시담론)를 통해 감동을 주는 기술일 수 있다. 여기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만 구별될 뿐 사실은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한다.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고,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찾고, 작은 이야기를 큰 이야기로 확장하고 증폭시키는 것이다.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로 수렴되고, 큰 이야기가 작은 이야기 속에 분기(분화돼 기입)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이런 이야기 중에 신화가 있다. 신화는 이야기들의 이야기, 이야기들의 원전, 이야기들의 원형, 원형적인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는 대개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난 주인공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렇고 모세가 그렇고 예수가 그렇다. 이처럼 이미 진즉에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 그것은 이후의 삶이 다름 아닌 그 비밀을 푸는 과정이며 목적이며 운명이며 과제로서 주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며(나는 미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태어난다), 불교식으론 진아를 찾아나서는 여정임을 말해준다. 그 여정에는 장애물(수수께끼)이 등장하고, 그 장애물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해주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존재는 그 조력자의 도움으로 출생의 비밀을 풀고, 진정한 자기를 찾고,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다(실현한다). 모든 이야기는 이런 기본 플롯을 가지고 있고, 그 플롯에 이러저런 에피소드가 끼어들면서 변주된다. 

여기서 장애물은 현실과 현실원칙에 해당하고, 그 현실을 극복하고 마침내 도달한 지점이 이상을 상징하고 이상향을 상징하고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현실은 여하간 극복의 대상이란 점에서 디스토피아에 해당하고,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를 전재로 해서만 성립 가능하다. 디스토피아로 나타난 현실인식이 유토피아를 견인하는 것. 현실인식이 디스토피아에 가까울수록 그만큼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도 커지는 것. 장소를 매개로 보면 디스토피아는 현실 곧 지금여기에 대한 현실인식을, 그리고 유토피아는 초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 미셀 푸코는 일종의 간장소(사이장소)에 해당하는 헤테로토피아를 제안한다.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없으면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장소(관념적인 장소)를 의미하고, 헤테로토피아는 이와는 거꾸로 비록 현재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 잊힌 장소, 일시적인 장소 그러므로 어쩌면 덧없는 장소, 일상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장소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테로토피아는 장소와 장소 사이, 장소와 현실인식 사이, 일상과 일탈 사이, 일상과 이상 사이, 그리고 특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공간일 수 있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현재하면서 현재하지 않는 매개공간일 수 있다. 

표면적으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권주안의 그림은 사실은 바로 이런 사이공간이며 매개공간을 그려놓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인식과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매개시켜주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풍경, 존재론적이고 서사적인 풍경을 열어놓고 있는 것 같다. 그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비록 작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를 재구성한 것(성장서사?)이지만, 알고 보면 그 드라마가 디스토피아로 나타난 현실인식과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난 존재론적 비의(누구나 유토피아를 욕망한다)를 테마로 한 것이란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개인적인 서사가 보편적인 서사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이며,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여로를 그린 그림이다. 모든 여행에는 여행자가 있기 마련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여행자는 얼룩말로 대체된다. 얼룩말은 여행자를 대체하면서 동시에 작가 자신을 대리하고,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를 대신한다. 그런데 왜 얼룩말인가. 얼룩말의 얼룩무늬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내포돼 있는 것인가. 앞서 존재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고, 따라서 삶은 바로 그 비밀을 푸는 과정이라고 했다. 여기서 얼룩무늬는 미처 그 실체가 결정화되기 전의 상태, 미증유의 상태, 모호한 상태, 그러므로 어쩌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얼룩무늬는 위장(신화의 용법대로라면 변신)을 상징한다. 위장은 말할 것도 없이 현실원칙으로부터 자기를 숨기고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사회적으로 치자면 자기(아이덴티티)를 숨긴 채 가면(페르소나)을 자기 대신 내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너를 결코 볼 수가 없다. 나는 지금여기에 없다거나,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는 자크 라캉의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어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수 있는 얼룩말은 바로 그런 미증유의 자기며, 위장된 존재를 상징한다. 

그렇게 얼룩말이 유토피아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 길이 예사롭지가 않다. 대개는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길이며 계단이 연이어지지만, 그렇게 상승작용으로 나타난 성속의 도상학의 관성을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리고 그렇게 그 길이며 계단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유토피아에 당도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길이며 계단을 포함하거나 감싸고 있는 구조물은 보면 볼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든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길도 계단도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끝나는지가 불분명하고, 들어가고 나가는 그리고 연결되는 통로가 애매한 것이 흡사 에셔의 초현실주의 건축을 연상시킨다. 미궁을 연상시키고 미로를 연상시킨다. 보기에 따라서 미궁과 미로 그리고 에셔의 건축에 나타난 길은 안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존재를 가두기 위한 것일 수 있다. 가두는(갇힌) 길? 막는(막힌) 길? 끊임없이 처음으로 되돌려지는 길? 무슨 말인가. 여기서 길은 삶을 의미하고(길은 곧잘 삶의 메타포를 위해 호출된다), 풀어야 할 과제(수수께끼)로서 주어진 것이다. 

용케 그 과제를 잘 풀고 난 연후에도 어김없이 장애물이 남는다. 그림에서 보면 체스게임을 원용한 사자가 유토피아로 연결된 관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그렇다(여기서 작가는 길을 삶의 메타포로서 제안한 것에 이어, 재차 삶을 게임에 비유한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장애물이 있으면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주는 조력자도 있는 법이다. 길을 안내해주는 파랑새가 그렇고, 특히 크라우드 넘버 나인(Cloud No.9)이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움켜쥐고 있는 새가 그렇다. 여기서 크라우드 넘버 나인은 가장 맑은 날 피어오르는 적란운의 고유번호에 해당하며, 단테의 신곡 중 천국 편에서 천국에 이르는 마지막 9번째 계단을 지칭한다. 결국 새가 움켜쥐고 있는 두루마리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상향으로 통하는 길을 알려주는 상징적 메시지를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마침내 얼룩말은 유토피아에 당도할 수 있었고, 긴 여정의 막을 내릴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렇게 얼룩말이 마침내 도달한 지점에 유토피아는 진정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에 유토피아는 없다. 다만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삶의 여정이 있을 뿐. 현실(디스토피아?)과 유토피아를 이어주는 중계과정이 있을 뿐. 혹 그림에 보이는 파란 하늘이 유토피아를 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다만 파란 하늘로 그려놓고 있는 것은 그저 유토피아에 대한 관념 혹은 관습 혹은 관성에 지나지 않을 뿐, 저기 그곳에 유토피아가 있다, 라고 지시하는 것일 뿐, 유토피아가 뭔지, 유토피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나아가 도대체 유토피아는 그림으로 형상으로 옮겨 그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다만 관념으로만 존재한다고 했다. 매사가 그렇지만 관념이 다만 관념일 뿐이라면 그 관념은 의미가 없다. 관념이 의미가 있으려면 여하간 현실과 접속되어져야 한다. 유토피아가 의미가 있으려면 여하튼 현실로 귀환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모든 유토피아는 지상낙원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유토피아는 의미를 얻고 현실성을 획득할 수가 있게 된다. 제도를 바꾸는(전복을 통한)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하는 만사가 헛되다고 한 성경을 인용할 일도 없이, 혁명이 환상과 동의어가 되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그렇다고 혁명의 순수성마저 의심할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혁명이 물 건너간 시대에, 그렇다면 유토피아도 덩달아 종 친 것인가. 더 이상의 유토피아 논의는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유토피아는 꿈꾸기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 출생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저기가 아닌 여기 이곳에서) 마침내 찾아진 저마다의 자기들이며 진정한 자기들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다른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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