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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기행, 도시 아날로지

고충환

도시는 살아있다. 그 삶은 낮보다는 밤에 더 생생하다. 낮에 도시는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도 때로 불야성과 더불어 그리고 더러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속으로 깨어난다. 그렇게 깨어나 생기를 얻고 활력을 충전 받는다. 밤에 도시는 생생하고 오롯해진다. 녹슨 비수가 잠자던 욕망을 깨워 목표물을 겨냥하고 투명해질 대로 투명해진 세계가 자기의 속살을 열어서 보여준다. 그렇게 도시는 낮보다는 밤에 더 도시답다. 

도시는 시공간이 한데 중첩되고 포개져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특히 과거와 현재가 포개져 있다. 그렇게 도시의 현재는 과거를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거느린다. 고도일수록 그렇고 구도심일수록 그렇다. 무슨 영화세트장 같은 그곳을 어슬렁거리다보면 사람은 없고 사람들의 그림자만 유령처럼 남아 어른거리는 것이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이고 친근하고 설렌다. 이따금씩 여전히 그기에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우연히 맞닥트리기라도 할 때면 꼭 어른거리던 그림자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아 서로 경계하기도 한다. 어른거리는 그림자의 실체? 그렇게 맞닥트리는 사람들은 꼭 옛날에 내가 알던 아니면 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와 닮은 것 같다. 사실은 그럴 리가 없지만 두려움이 착각하게 만들고 설렘이 오인하게 만든다. 이런 예기치 못한 맞닥트림과 우연한 만남은 사실을 말하자면 세계를 새로 만나는 것이며, 과부하 된 의식이 재부팅되는 순간이다. 현상학적으론 의식이 순수한 백지상태로 되돌려지는, 그리고 그렇게 모든 걸 새롭게 고쳐 쓸 수 있는 의식의 영도가 실현되는 순간이다. 세계가 온통 시로 돌변하고 감각으로 육박해오는 극적 순간이다. 

그런 고도가 구도심이 밀려나고 있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경제개발의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도시가 구도심과 신도시, 계획도시와 비 혹은 무정형 도시로 재빠르게 재편되면서 기억 저편으로 내몰리고 있다. 구도심도 비 혹은 무정형 도시도 알고 보면 생성철학의 핵심인 리좀을 위한 훌륭한 형식실험의 장인데도 말이다. 좀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자면 미래도시를 위한 도시생태학의 표본이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군산은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도며 구도심을 거의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여기에 터 잡은 창작문화공간여인숙이 이런 지역 특정성에 착안한 프로그램으로 운영해오고 있는 것이 바로 지역읽기이며, 이번 전시 <군산기행>도 그 프로그램의 연장선에서 열린 것이다. 그동안 프로그램을 지속해오면서 군산 읽기를 위한 아카이브가 상당량 축적된 성과를 보여주고 있고, 이번 전시에서 그 또 다른 읽기를 예시해주고 있다. 



박정경, 낡은 놀이공원 같은 도시 

박정경의 그림을 보자면 마치 해방 전후 아니면 전쟁 전후 피폐한 도시풍경을 보는 것 같다. 시기로 치자면 1950-60년대 도시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소재도 그렇고 회화적 분위기도 그렇다. 아마도 당시 모습 그대로 시간이 정지된 채 박제된 구도심 풍경을 소재로 그리면서 자연스레 맞닥트리게 된 정황을 그린 것일 터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사실은 시간을 그리고 향수를 그리고 그리움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재하는 감각적 현실은 다만 구실일 뿐, 의식의 레이더는 온통 과거를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현재는 다만 과거를 되불러오기 위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특유의 정서가 유래하는데, 작가는 그걸 감정 드로잉이라고 부른다. 감정 드로잉? 작가는 말하자면 사물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그린다. 사물대상이 불러일으킨, 아니면 사물대상에 이입된 감정을 그리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그리기에 회화보다는 드로잉이 더 잘 어울린다. 드로잉은 비유를 하자면 서사보다는 시에 가깝고, 견고하거나 결정적인 것(본질적인 것)을 재확인하기보다는 순간적인 것들, 휘발되는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덧없는 것들을 붙잡기에 더 적절한 형식이 되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치 스냅사진으로 한 컷 한 컷 기억을 재생하고 기록해놓은 것 같은(기억만큼 덧없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전주며 군산 구도심의 아카이브를 재구성해놓고 있는 것 같은 그림들이다. 

비록 작가가 보는 건 현재지만, 사실은 현재를 투과해온 기억을 보는 것이며, 그런 만큼 작가에게 현재는 다만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계기로서만 존재하고 또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과거가 포개지고 기억이 오버랩 된 현재를 작가는 오래된 낡은 놀이공원 같은 도시라고 부른다. 다르게는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도시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중요한 건 작가의 현실인식이 과거를 상기시켜주는 현재, 기억을 되불러오는 현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고, 이런 과거지향성이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특유의 멜랑콜리를 자아낸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사람이 찾지 않는 낡은 놀이공원 같은 도시, 텅 빈 영화 세트장 같은 도시, 그 앞에서 마치 과거 속 그때처럼 포즈를 취해보는 도시, 아니면 그때 그 장면이 오버랩 되는 도시는 현재인가. 아니면 현재가 밀어올린 과거인가. 이처럼 과거를 상기시킴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얻는 현재와, 그 현재가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군산읽기는 낭만주의와 통한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일련의 전주를 소재로 그린 그림들에 <시간들>이라는, 그리고 군산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에 <밤의 숨>이라는 제목을 각각 붙여놓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전주와 군산의 도시 특정성을 구별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고, 그런 만큼 시간들이라는 그리고 밤의 숨이라는 제목이며 주제의식은 어느 정도 작가가 그린 도시그림 모두에 적용되고 지배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시간은 말할 것도 없이 과거를 향하고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현재를 의미한다. 문제는 밤의 숨인데(아마도 밤에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올라오는 안개에 착상한), 낮의 숨과 비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낮의 숨은 좀 아니지만, 밤의 숨은 말이 된다. 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게 선명해지고 오롯해진다(밤의 아이러니?). 심지어 밤의 숨마저도. 여기서 숨은 아니마 곧 우주적이고 원초적인 호흡이다. 어둠이 열리고, 내면이 열리는, 그리고 그렇게 과거로 통하는 관문이 열리면서 오랫동안 잊힌 자기와 만나지는 시간이고 순간이다.  



조인한, 사건으로서의 장소 

야유회. 한적한 시골마을 사람들이 하루일정으로 모처럼의 야유회를 떠났다. 일정이라 봤자 군소도시마다 하나쯤 있기 마련인 아쿠아리움을 방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새벽같이 대절버스를 타고 이동해 아쿠아리움을 방문하고, 식당에서 해산물 찌개를 곁들인 식사를 한 연후에,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일정상으로 보면 아쿠아리움 방문이 목적이지만, 실상은 딴판이었다. 무슨 전리품 같은 해양생물 표본이나 박제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는 해설사의 기계적인(전문적인?) 설명이 귀에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고, 수족관을 집 삼아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식당으로 이동해 식사를 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찌개꺼리로 올려 질 작은 수족관 속 물고기와 아쿠아리움의 물고기를 대비시킨다. 크든 작든 그들에게 수족관이 집일 수는 없다. 입으로 먹히고(식용) 눈으로 먹히는(관상용) 차이가 있을 뿐, 사람에게 먹히기 위한 그들의 운명은 다르지가 않다. 그렇게 그들은 운명처럼 사람들의 게걸스런 입속으로 삼켜진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야유회의 진정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사람들은 가무를 즐기는데, 어떤 사람들은 단 한순간도 자리에 앉는 법이 없다. 즐긴다고 했다. 즐긴다? 여기서 작가는 혹 광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슬쩍 해본다. 아쿠아리움은 다만 구실이었고,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 목적이었다. 크든 작든 모든 일탈은 광기가 표출되고 자기표현을 얻는 장이다. 그렇게 작가는 야유회에서 광기를 본다. 

Masarap-Na-Kanta(아마도 필리핀인 선원). 매주 토요일 오전 작가는 브루클린 항구를 찾는다. 크루즈 선박 선원들이 항구에 정박해 필리핀 식 식사를 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서다. 그리고 작가는 크루즈 선박에 그들과 동행한다(실제로는 그들에게 촬영을 부탁한 것이지만). 대개는 주방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그들이지만, 굳이 배 밑창에 마련된 그들만의 숙소에서 필리핀 식 식사를 고집한다. 필리핀 식 식사라고 했지만, 여기서 작가는 그저 식습관을 매개로 한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데 관심이 있지 않다. 그들에게 크루즈는 하나의 제도에 해당하고, 주방 역시 예외적이지가 않다. 오로지 배 밑창에 마련된 그들만의 숙소야말로 유일한 예외에 해당하고, 그런 예외적인 공간에서야 비로소 그들만의 필리핀 식 식사도 즐길 수가 있다. 바로 이런 그들만의 숙소로 나타난 예외적인 공간이 포인트다. 모리스 블랑쇼 식으로 말하자면 제도 안에 제도의 바깥을 심는 일이며, 제도에 기생해 제도에 반하는 공간이며 장소를 이식하는 일이다. 미셀 푸코로 치자면 헤테로토피아 곧 실제로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 부재하는 장소, 없는 장소, 유령 같은 장소다. 제도에 반하는, 자본주의에 반하는, 의미화의 기획에 반하는 모반이 도모되는 의심스런 장소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런 의심스런 장소를 사는 의심스런 주민들의 초상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군산(아마도 신영시장). 군산에는 지금도 일제 강점기 쌀을 실어내기 위해 배를 육지 안으로 끌어들였던 철길이 남아있다. 그리고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생긴 마을이며 상가 그리고 시장이 남아있다. 이처럼 군산은 일제와 미군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 우여 곡절한 세월이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주체가 주도하는 삶이 아닌, 타자적인 환경이 거꾸로 주체를 형성시키는 삶의 전형이 보존되고 있는 것. 그 중 작가는 신영시장에서 그 전형을 본다. 미군이 주둔할 때 제법 번창했던 신영시장에는 지금도 그때처럼 시장이 서고 좌판이 펼쳐지지만 그때 같지는 않다. 사는 사람도 없고 파는 사람도 굳이 못 팔아도 상관이 없다. 그저 몸에 밴 습관처럼 좌판을 열고 닫는다. 사는 집 역시 그때그때 돈이 생길 때마다 생긴 돈만큼 달아내고 덧붙인 것이 무계획적이고 비정형적이다. 집과 집 사이에 골목이랄 수도 없는 골목길이 생기고, 그 좁은 틈을 겨우 빠져나가면 뜻밖의 중정에 해당하는 꽤나 넓은 공간을 숨겨놓고 있는 식이다. 처음부터 도시계획과는 거리가 먼 것이 마치 질 들뢰즈의 생성철학의 핵심인 리좀처럼 예측불허의 공간증식을 보는 것 같다. 작가의 군산 읽기는 바로 그런 공간경제학이며 장소정치학을 예시해준다. 

이상으로 다큐멘터리에 기반을 둔, 그리고 여기에 실험영화의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요소들을 수용하는 조인한의 비디오영상작업에서 장소는 결정적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장소는 말하자면 역동적인 상태로서의 장소,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서 상상과 기억, 경험과 결부되어 구성되는 장소, 다층적인 감각을 통해서 구성되는 사건으로서의 장소, 이를테면 광기가 실현되는(버스), 제도 안에 제도의 바깥이 도모되는(배), 예측불허의 삶의 질이 자기표현을 얻는(시장) 계기로서의 장소, 실천논리로서의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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