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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메이커스/ 패션과 예술, 정념과 양식이 열어놓는 판타지

고충환

판타지 메이커스, 환상 제작자 

판타지 메이커스. 환상을 제작하는 사람들이다. 문자기술시대로 넘어오기 전 구술시대에는 이야기 전수자가 이런 환상 제작자 역할을 했다. 대개는 무당을 겸하기도 하는 그는 단순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할 뿐만 아니라 때로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해서 해석의 역사가 이미 그들로부터 비롯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중세시대에는 마녀, 세계의 형질을 변질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미혹하는) 연금술사, 별자리를 보고 사람들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가, 그리고 환상을 조작하는 마술사가 그 역할을 도맡는다. 특히 마녀에 대해서는 참여 작가 중 배찬효의 사진과 관련이 깊다. <악마의 연회에 참여한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 죄>와 같이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서 마녀를 다룰 뿐만 아니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그리고 <미녀와 야수> 같은 전래하는 동화를 다룬다. 여기에는 동화를 잔혹동화로 다시 읽어내는 재독서의 의미가 있다. 원래 동화의 생산주체는 여자들이었다. 보채는 아기를 달래고 잠재우기 위해 이러저런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준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이후 남성주체 중심의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지배적인 가치체계로 자리매김하면서 이야기의 내용은 달라지는데, 좋은 이야기(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분이 뚜렷한 경우와 같이 부르주아의 도덕관념을 반영하고 계승한 이야기)가 강조되고 나쁜 이야기(도덕관념의 경계가 불분명한, 때로 악이 승리하기도 하는 불순한 이야기)가 배제된 것이다. 마녀 역시 그런데, 세상을 멀리한 채 혼자 사는 남성주체가 은둔자 아니면 수도승으로 추앙 받는 것에 반해, 여자가 숲속에 혼자 살면 마녀로 의심 받기 쉽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고, 악마 숭배가 의심되는 야회를 주재하고, 약초와 파충류를 한데 끓여내 묘약 아니면 독약을 제조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바로 이런 의구심으로부터 파생된다. 작가는 일종의 상황극 내지 역할극을 매개로 한, 자신이 직접 출연한 일종의 자기연출사진을 통해 이렇듯 정통성을 부여받은 서사(동화)에 의해 억압된 서사(잔혹동화)를 발굴하고 캐내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예술가와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이 이런 환상 제작자로서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무의식적 욕망을 매개로 인간 심리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데, 특히 에로티시즘은 비 혹은 초현실적 비전을 열어놓는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참여 작가 중에서 보면 오브제를 매개로 모델과 오브제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마치 또 하나의 오브제를 보는 것 같은 모델을 제안한 조선희의 사진, 이중그림을 매개로 인간내면의 은밀한 욕망을 일깨우는 배준성의 사진, 그리고 무협지에 등장하는 가상적 캐릭터들을 형상화한 이선규의 작업이 이런 초현실적 비전에 연관된다. 특히 모델과 오브제, 사람과 레디메이드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아예 합체된 일종의 사물인격체는 초현실주의의 페티시즘(물화와 물신) 개념과 맞물린 욕망의 작동원리를 알게 해준다. 사물을 인격화하는 초현실주의의 기획(페티시, 초현실주의자들이 왜 그토록 마네킹과 더미, 인형과 자동인형에 열광했는지를 엿보게 해주는)과, 이와는 반대로 인격을 사물화(상품화)하려는 자본주의의 기획이 맞물린 욕망의 메커니즘을 알게 해준다. 초현실주의는 경계 허물기가 핵심이며, 에로스, 리비도, 그리고 욕망을 매개로 경계를 허무는데, 작가들의 작업이 바로 이런 경계 넘나들기 혹은 허물기(각각 사람과 사물, 욕망의 표면과 이면, 현실과 가상현실)를 주지시킨다. 초현실주의의 전형적인 경우로 치자면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허무는 것인데, 막스 에른스트의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와 같은 경우를 비롯해 마르셀 뒤샹의 상당한 작업들이 특히 에로스를 매개로 이런 경계 허물기에 연동된다. 그리고 현대미술로 넘어오면 소위 탈의 논리에 힘입어 이런 경계 허물기가 보편화된다. 대표적인 경우만 보더라도 매튜 바니의 <크리매스터> 시리즈가 이렇듯 에로스를 매개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이런 성적 경계 넘나들기가 스타일 내지 모드로까지 승화된 것이 중성적 스타일의 경우일 것이다. 여하튼, 그렇다면 환상을 제작하고 향유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전유물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외가 있겠지만, 대개 우리 모두는 유년시절에 환상제조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판타지 메이커스는 환상 제작자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환상제조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혹은 만화경의 추억이 그것이다. 유년시절 시장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길목에 가면 흔히 소형회전목마와 함께 이런 만화경을 볼 수가 있었다. 무슨 쌍안경처럼 생긴 도구를 눈에 대고 보는 것인데, 레버를 돌리면 장면이 바뀌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세상 모든 곳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자리에서 세상구경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 꿈꾸게 해주는 기계, 환상기계다. 요새 식으로 치자면 인터넷이 그런데, 당연하게도 인터넷은 창작환경마저 바꿔놓고 있다. 심지어 구글맵을 이용해 하나의 완벽한 허구적 세계를 창조해내는 신종소설장르가 생겨나기도 했다. 여하튼 현실을 재구성한 것이므로 현실을 담보할 수 있고, 그럼에도 실제로는 전혀 가보지 못한 곳(경험하지 않은 일)을 재구성한 것인 만큼 그 자체 허구이기도 한, 그리고 그렇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넘나들어지고 모호해지는 일들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더욱이 지금처럼 예술가와 비예술가, 창작주체와 향수주체의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에 인터넷과 사진기를 소유하고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술가가 될 수 있고 환상 제작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옷을 매개로 스타일과 모드를 선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소위 살아있는 예술, 움직이는 예술, 걸어 다니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옷은 말하자면 개별주체로 하여금 일상을 사는 모습 그대로 예술가가 될 수 있게 해주고, 환상 제작자가 될 수 있게 해주고, 그 자체 예술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런 의미를 묻는다. 옷을 매개로 예술과 일상이, 창작주체와 향수주체가 어떻게 만나지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나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렇게 현대미술에서 옷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누구나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그림처럼 거울 속에서 재구성된 자기를 본다. 사실은 타자의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자기를 본다. 그리고 그렇게 또 다른 자기, 타자로 분열되는 자기를 발견한다. 이번 전시는 표면적으론 옷을 매개로 패션과 예술의 관계를 묻는, 그리고 그렇게 현대미술의 확장된 외연을 짚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꽤나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의미를 탑재하고 있다. 옷은 욕망의 매개체이며(옷은 욕망의 표상이다), 욕망은 그 의미가 꽤나 복잡하고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패션과 예술, 옷으로 환상을 짓다 

옷은 외계의 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한다. 옷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다. 이런 기본형으로부터 치유와 주술이라는 제2의 의미가 파생된다. 요셉 보이스는 군복무 시절 공군으로 참전을 했는데, 전투기가 추락하면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이때 원주민이 발견해 작가를 치료하는데, 지방 덩어리와 펠트 천으로 치료한다. 지방 덩어리는 상처가 덧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펠트 천은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이후 지방 덩어리와 펠트 천은 요셉 보이스에게 치유와 주술을 행하는 상징적 매개물질을 의미하게 된다. 특히 지방 덩어리는 이성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요셉 보이스에겐 심지어 계몽과 교육마저도 치유와 주술을 행하는 것이 되고, 예술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사회조각의 개념이 그렇다. 계몽과 교육이 이성을 보존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그리고 나아가 사회를 보호한다.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코요테와 구대륙을 상징하는 작가가 서로 탐색하고 상호 소통할 때도 펠트 천이 작가를 보호해준다. 이처럼 옷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보호, 치유, 주술이다. 그리고 옷은 신체를 돋보이게 한다. 신체를 꾸미고 장식한다. 여기서 옷은 신체를 직접 보호하는 의미기능으로부터 자유롭다. 흔히 옷이 날개다, 라고 하는 속설에 의해 뒷받침되는 경우다. 여기서 옷은 순수한 심미적(그리고 미학적) 대상이 된다. 스타일과 모드, 욕망과 에로스, 전족과 코르셋, 가채와 하이힐, 가발과 가면, 남성성(남성다움)과 여성성(여성다움), 그리고 사디즘과 마조히즘과 같은 성적 유희가 교환되고 소비되는 모든 현장이 바로 이런 옷의 심미적 대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옷을 소품이나 도구로 사용하는 포르노그래피도. 

여기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다. 현실을 순수한 심미적 대상, 미학적 대상, 유희적 대상으로 바꿔놓으려는 기획이 그것이다. 예술지상주의가 그것이다. 비록 그 기원은 오래됐지만, 그 개념이 정식화된 것은 보들레르의 댄디즘(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퀴어)으로 소급된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보다 예술애호가(딜레탕트)를 더 높이 쳤다. 예술애호가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봤다. 진실보다는 예술이 더 중요했고, 현실적 삶보다는 미학적 삶을 사는 것이 더 결정적이었다. 삶 자체를 현실로 보기보다는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계기이며 동기로서 본 것이다. 이처럼 삶 자체를 온통 예술을 위한 계기로서 향유하려는 삶의 태도가 모드화(다르게는 코드화)된 것이 댄디즘이다. 그런 만큼 짐짓 꾸민 말과 과장된 제스처, 연극적인 삶과 철저하게 만들어진 삶을 실천하는 것이 댄디다. 일상과 이상을 구별하고 현실과 예술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적 국면이 강조된 경우라고 하겠지만, 그래서 현실주의 관점에서 볼 때 현실도피라고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하튼 현실을 예술로 대체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댄디 이후로는 바우하우스와 특히 오스카 슐렘머의 기능주의 옷에 대한 형식실험(사실은 옷보다는 건축에 더 주력했지만)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최소한의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된 옷이 도대체 입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여하튼 이 일련의 과정에서 옷은 결정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옷은 단순한 옷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처럼 모드화된 삶의 태도 자체를 의미하고 고도로 연출된 삶의 방식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옷은 이데올로기를 표상한다. 옷이 어떤 이념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그 자체 사회적 기호로서 자리매김 되는 경우다. 그리고 차도르와 히잡처럼 옷 혹은 의복이 특정 종교, 관습,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시 요셉 보이스를 예로 들자면, 팔을 통해 하나로 연이어진 펠트 천으로 만든 저고리(두 개이면서 하나인)가 그렇다. 아마도 협동(아니면 속박? 구속? 양가성?)의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심각한 경우로 치자면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의 옷 무덤을 들 수 있다. 평생을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되새김질하는 것에서 창작의 계기며 동력을 얻는 작가의 옷 무덤이 가스실로 들어가기 전 사람들이 한쪽에 벗어서 산처럼 쌓인 옷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옷이 사회적 기호로서 자리매김 되는 경우로는 각종 제복과 유니폼을 들 수 있다. 특히 군복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를 반영하고, 제도적인 효율성과 기계적인 성질(마치 기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리고 전시성(스펙터클한)을 반영하고, 남성성과 섹스어필을 반영하고, 파시즘과 나치즘을 반영한다. 때에 따라서 군복의 기계적인 성질은 남성성보다는 오히려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성적 모드를 상기시켜 최근에 그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매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옷은 제2의 피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체형이 드러날 만큼 몸에 꼭 들러붙는 소재의 옷이 그렇고, 섹스어필로 치자면 가장 강력한 경우가 되겠다. 여기에 털 소재와 가죽 소재처럼 피부 자체를 직접 상기시키는 경우를 포함하며, 다른 경우들에 비해 촉각적인 점이 특징이다. 자연주의 스타일의 유행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반드시 자연 소재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고무나 레자 같은 인조 소재가 인공피부를 떠올리는 경우(외계인? 인조인간? 파충류인간? 중성적인?) 도 있다. 옷과 피부가 구별되지 않는 경우로서, 각 백인과 흑인과 유색인이 비록 서로 피부색은 다르지만 같은 심장 속에 같은 피가 흐른다는 메시지를 통해 피부색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는 반인종차별 담론의 전언을 담은 베네통 광고가 유명하다. 형식은 다르지만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로서, 색조 화장품 팔레트의 색상 그대로 확대해 그림으로 옮겨 그린 바이런 킴의 코스매틱 페인팅도 있다. 그런가하면 고기를 누더기로 기워 만든 옷(피부보다는 살에 가까운?)처럼 급진적인 경우도, 문신과 피어싱처럼 도발적인(?) 경우도 다 여기에 포함된다. 원주민 커뮤니티가 가히 이를 위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풍부한 사례를 예시해주고 있는 편이다.

특히 문신과 관련해서는 욕망이 의식에 아로새겨지듯 몸에 새겨진 욕망(체화된 욕망?)의 또 다른 한 형태로 보는 경우, 자신의 몸을 대지 삼아 몸 위에 산수를 그리는 경우, 문신을 직접 새기기보다는 자유자재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스티커 문신의 경우, 그리고 여기에 가죽그림을 수집한다는 좀 그로테스크한 경우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다. 문신은 말하자면 신체를 꾸미는 장식품이 되었고 모드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 모드의 성분은 그로테스크와 장식 사이, 스펙터클(전시되는 몸)과 과시 사이를 넘나든다(흥미롭게도 피에르 부르디외는 장식을 죄에 결부시키기도 한다). 찢어진 청바지가 원래 저항의 아이콘이었다가 이후 점차 자본주의의 매력적인 상품 아이템으로 포섭되듯, 원래 불온과 부랑을 상징했던 문신이 장신구처럼 보편화된 현실이 주목된다. 선과 악, 미와 추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자리바꿈 되는 일도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미하일 바흐친은 이분법을 억압의 계기로 보고, 양가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미적으로 적절한 것만큼이나 미적으로 부적절한 것 역시 감각적으로 어필될 수 있다(감각적 쾌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미적 부적절성의 법칙을, 그리고 여기에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삼키고, 이미지가 그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현실(이미지도 모든 것을 삼킨다)을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옷은 신체를 보호하고 신체를 돋보이게 만든다. 이데올로기를 표상하고 사회적 기호로서 자리매김 된다. 그리고 제2의 피부로서 신체의 표면을 꾸미고 때론 신체의 이면(무의식)을 파고든다. 옷은 욕망의 아이콘이지만, 신체 자체가 된 옷, 그래서 더 이상 신체 자체와 구별되지 않는 옷은 이미 그 자체로 욕망의 물화된 형식이다. 옷이 곧 욕망이 되고 신체가 곧 욕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욕망은 더 이상 억압되지도 은폐되지도 않는다. 공공연하게 전시되고 과시된다(바네사 비크로프트?).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사실은 예술과 디자이너를 넘나드는)이 다양한 형식과 경로를 통해 이처럼 옷으로 지어낸 환상이 정박되고 개화되는 지점들을 예시해준다. 옷의 의미론적 지평을, 욕망의 감각적 스펙트럼을 예시해준다.  

옷으로 환상을 짓는다고 했다.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다소간 건축적이고, 공간 확장적인 성질을 암시한다. 이런 공간 친화적인 경향성과 관련해 참여 작가들 중 특히 김주연, 김정혜, 그리고 피에르 파브르의 경우가 주목된다. 김주연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식물을 키우는 작가다. 식물은 누구나 키우고, 또 식물을 키운다고 저절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가가 식물을 키우는 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그 예사롭지 않은 방식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개념이 이숙이다. 다른 방식과 종류의 성장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고, 그 방식들이 다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았을 것이다. 그럼 이 개념이 작가의 작업에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보통 식물은 땅에서 생장한다. 이숙이 아니다. 작가는 땅 대신 드레스에, 스웨터에, 저고리에, 소파에, 침대에, 그리고 심지어 신문다발에다 식물을 심는다. 이숙이다. 그리고 그렇게 식물이 심겨지고 생장하는 토양(환경)이 달라지면서 매번 그 의미도 달라진다. 말장난을 좀 하자면 이식이 이숙을 부른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생육기간이 짧은 식용식물을 키운다는 것이다. 생육기간이 짧아야 한자리에서 생과 사가 물고 물리는 생사순환고리를 보여줄 수가 있다. 작가의 작업은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로 옷을 대지 삼아 식물을 생장시킨다는 점에서 흔히 에코페미니즘으로 분류되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생생한 현장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바니타스(무상한 삶)의 또 다른 버전으로도 읽힌다. <존재의 가벼움>이란 의미심장한 제목도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김정혜는 스커트의 형태를 구조화한 텐트(집)처럼 보이는 구조물을 설치했다. 옷 속을 들락거리면서 사실은 몸속을 드나드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점에서 나나(신화로부터 취해온 작가의 분신)의 몸속을 여행하게 한 니키 드 생팔의 설치작업이 연상된다. 관객참여로 인해 구조물이 계속 덧붙여지고 부풀려지는, 그리고 그렇게 무슨 생물처럼 항상적으로 변형되고 이행하는 상황논리의 제시도 흥미롭다. 그리고 피에르 파브르의 설치작업은 그저 공간을 확장시킨다기보다는 아예 공간 특정적이고 장소 특정적이다. 작가가 주요 소재로 사용하는 실을 매달고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공간에 얼기설기 실을 설치하고 동력을 이용해 실을 움직이게 했다. 여기서 실은 현에 해당하고, 전시공간은 거대한 공명통에 해당한다. 그래서 사실은 바람이 현을 흔들어 연주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소리를 실제로 들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소리는 그저 들을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보고 만지는 감각경험을 통해서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보다 적극적으론 탠저블사운드(보고 만져지는 소리), 그리고 최소한 공감각을 통해 감각경험을 확장시킨 경우로 보면 되겠다. 

현대미술의 키워드는 네트워크다. 장르와 장르, 형식과 형식, 개념과 개념, 분야와 분야를 네트워크 시켜 의외의 의미를 열어놓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제안하고, 억압된 의미를 폭로한다. 의미는 배열과 배치에 연동된다. 그 자체 결정적인 의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배열과 더불어서 그리고 배치 여하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고 결정된다. 결국 예술은 배열과 배치의 기술이고, 의미를 열고 확장시키는 기술이다. 여기에 예술과 패션이 네트워크 된다. 사실은 이미 진즉에 예술은 패션이었고 패션이 예술이었다. 흥미롭게도 패션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양식과 정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술과 패션의 관계는 정념과 양식의 관계와 같다. 여기서 양식을 정념이 외화 되고 물화된 형식, 곧 정념이 자기를 실현하고 구현된 형식이라고 본다면 그 관계는 더 밀접해진다. 그동안 현대미술도 현대미술 너머로 외연을 확장해왔고, 패션도 패션을 넘어 외연을 확장해왔다. 그렇게 자기를 넘어서는 확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외연에 예술과 패션이 만나지는 접점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패션(양식)과 패션(정념), 예술과 패션, 패션쇼와 퍼포먼스가 그 경계 너머로 자기를 확장하고 서로 만나지는 그 접점들을 확인해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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