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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희/ 기억의 간격, 예술가의 정원

고충환

서윤희가 자신의 그림에 부친 주제 <기억의 간격>에는 실제 혹은 실재가 빠져있다. 일종의 생략법인 셈인데, 이렇게 생략된 부분을 되살려 복원해보면 <기억의 간격>이란 주제는 사실은 <기억과 실제 혹은 실재와의 간격>이 된다. 여기서 기억은 현재에 속하고, 실제와 실재는 과거시제에 속한다. 그리고 실제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뜻하고, 현재시점에서 그 일을 기억으로 되불러오는 것이다. 그렇게 실제와 기억 사이에는 과거와 현재 사이만큼의 거리가 있고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사실은 시간을 그린다는 것이고, 기억의 간격을 그리는 행위는 사실상 시간의 간격을 그리는 행위와도 같다. 이렇게 실제가 시간과 관련이 있다면, 실재는 욕망과 관련이 깊고 특히 억압된 욕망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기억에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있고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여기서 잊고 싶은 기억이 기억을 억압하고, 그렇게 억압된 기억이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실재계로 밀려난다. 그러므로 기억은 실제와의 간격만큼 모호해지고, 때로 억압된 탓에 애매해진다. 다시, 그러므로 기억을 그리고 시간을 그리는 그림에서는 이처럼 모호해진 실제를, 그리고 애매해진 실재를 그림의 표면 위로 불러내는 것이 관건이고, 다른 유의 그림들에 비해 유독 분위기가 강한 것도 이 관건과 무관하지가 않다. 


멀리서 작가의 그림을 보면 그저 무분별한, 알 수 없는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좀 더 다가가 보면 비정형의 구김과 주름, 섬세한 얼룩이나 크랙과 같은 추상회화의 성분요소들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더 다가가 보면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산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쯤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그림 속 사람들이 점경을 이루기 위해서 그림은 배경화면이 되어야 하고 풍경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추상회화처럼 보이던 그림이 불현듯 풍경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볼 때 다르고, 가까이서 볼 때가 틀리다. 그 풍경은 친근하면서 낯설다. 비록 선입견 속 풍경을 닮았지만, 실제 그대로를 재현한 풍경이 아니기에, 엄밀하게는 작가가 지어낸 풍경이기에 낯설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풍경에 비해 눈에 띠게 점경을 이룬 사람들과의 대비가, 그리고 여기에 도대체 가장자리가 따로 없는 무한정 열린 풍경이 막막하고 아득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든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보는 것도 같고, 망각 진적에 겨우 건져 올린 희미한 기억의 한 자락을 보는 것도 같고, 색 바래고 빛바랜 기억의 화석을 보는 것도 같다. 현생을 넘어 전생의 기억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를 넘어선 기억의 원형 혹은 원형적 기억을 보는 것도 같고, 존재가 처음으로 유래한 흑암, 암흑, 카오스를 보는 것도 같다. 


그림에 보이는 풍경은 사실은 작가가 지어낸 풍경이라고 했다. 비정형의 구김과 주름, 섬세한 얼룩이며 크랙이 어우러져 하나의 가상적인 풍경이 재구성된다. 이러저런 약재로 우려낸 광목천이나 장지로 풍경을 조성하는데, 그 풍경 그대로 기억의 결이며 시간의 질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결이며 질감 속에 서사가 깃드는데, 개인적인 서사와 시사적인 서사, 종교적인 서사와 존재론적 서사가 깃드는 품 같고 주름 같고 자궁 같다. 그 자궁을 작가는 예술가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기억과 실제(그리고 실재)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정원은 그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술이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문제라고 작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작가에게 기억은 치유를 의미한다. 기억하면서 치유하는 것이다. 굳이 약재로 풍경이며 정원을 우려낸 것은 그 치유행위와 무관하지가 않다. 작가의 영상작업을 보면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데, 마치 기억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 같다. 흡사 시간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밀려오는 기억 앞에 서게 만들고, 밀려가는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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