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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롱, 청화의 풍경 속을 거닐다

고충환

산롱, 청화의 풍경 속을 거닐다 


산롱(San Long, 세 마리의 용)이 전시를 연다. 예로부터 자기로 유명한 중국의 고도 경덕진(징더전)과 한국의 이천을 오가며 도조작업을 하는 김성천, 정길영, 위에량(Yu Liang), 세 작가들이다. 저마다 개별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지만, 산롱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협업을 한다. 저마다 개별 작업 속에서 만들고 그리지만, 산롱이라는 이름 아래 모일 때면 한 작가가 형태를 만들고 다른 작가가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한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그 위에 다른 사람이 오브제를 붙인다. 따로 또 같이, 셋이면서 하나인 경우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 간 경계를 넘나들고 허문다. 저마다의 개별성이 살아있는 경우도 있고, 마치 한 작가의 작품처럼 한 몸을 이룬 경우도 있다. 이 작가구성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작가구성원이 달라질 수 있다. 가변성은 현대인의 생활감정이면서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황이 가변적인 만큼 차후에도 그렇게 변화될 상황에 걸맞게 변신을 시도할 수 있는, 효율적인 그리고 유연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조형예술은 각개전투가 강한 편이서서 좀체 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잘 없다. 외국에는 어떤지 잘 모를 일이나, 적어도 국내에서는 이례적인 일이고 그 만큼 새로운 시도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도조는 도자조각의 줄임말이다. 도자기지만 기(그릇과 용기)보다는 조각에 가깝다. 생활 속 쓰임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관상 혹은 감상을 위한 예술작품이다. 재료와 기법을 차용했다 뿐이지, 사실상 조각의 한 경우로 보아야 하고, 도자의 장르적 특수성과 관련해보자면 현대도예로 범주화할 수 있겠다. 


김성천. 혹자는 천마를 타고 다른 이는 새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른다. 신화 속 이야기 아니면 유년시절 상상을 되불러온 것일 터이다. 혹 현실에 얽매인 현대인의 자유롭고 싶은 욕망을 대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선 유아적인 천진스러움이 있고 순진무구가 있다. 일탈이 있고 해방이 있다. 중년부부를 소재로 한 사람형태의 오브제에서는 설핏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이 묻어난다. 사람형상의 오브제가 그릇뚜껑의 손잡이 역할을 하는, 마치 그릇뚜껑이 언덕이나 동산이라도 되는 양 그 위에 쪼그리고 앉거나 서 있는 작업도 있다. 그릇(그리고 그릇뚜껑) 고유의 형태를 풍경의 한 요소로서 전용한 풍경조각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 일련의 형상들, 예컨대 새와 말 그리고 특히 사람형상에선 신라토우에서나 그 원형적 형태를 확인해볼 수 있는, 격을 벗어버린, 어눌하면서 자연스런 맛이 있다. 미의식으로 치자면 기교를 벗어난 기교, 무기교의 기교(고유섭)에 가깝다. 이러저런 형상이 있고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수영하는 사람이야말로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랄 만하고, 작가의 세계관이며 예술가적 아이덴티티가 함축된 경우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작가의 자소상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아마도 현대인의 보편초상을 대리할 수영하는 사람은 수영모자와 수경 그리고 수영복 팬티 한 장 달랑 걸친 것이 전부다. 왜 이렇게 단출한가. 모른 채 지나칠 수도 있지만, 여기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욕심 많은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을 대비시키는 것과 같은. 공수래공수거와 같은. 그렇게 욕심 없는 사람들이 벽을 헤엄치고, 바닥을 헤엄치고, 수조를 헤엄치고, 그릇 속을 헤엄친다. 실제로 사람들은 속이 빈 탓에 부력으로 물에 뜰 수 있다. 불현듯 인생을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의 절대고독에 비유한 비유가 생각난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혹은 잊은 채) 그저 헤엄쳐갈 뿐인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수조(그리고 그릇)를 비롯해 벽을, 바닥을, 공간을 인생의 바다로 탈바꿈시킨다. 상황적으로 그리고 의미론적으로 작업의 표현영역을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정길영. 작가는 원래 회화를 전공했다. 그런 만큼 그의 도조작업 중엔 도판 위에 청화로 그린 그림들이 많다. 작가에게 도판은 일종의 확장된 화면이며, 회화적 표현을 증폭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화면을 거침없이 내지르는 활달한 붓질과 분방한 필치, 그리고 여기에 때로 모노톤의 그리고 더러는 자유자재한 색채감정이 어우러진 그림들이 서체추상과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드로잉의 감각에 의해 지지되고 종합되는 경우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지지되고 종합된 그림은 주로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그 속에 배가 담기고 집이 담긴다. 그리고 여기에 숫자, 기호, 도형, 땡땡이 문양, 비정형의 얼룩 혹은 우연을 가장한 얼룩이 축약된 형태의 사람형상과 어우러져 일상이 열리고, 서사가 열린다.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종의 회화적 드로잉 혹은 드로잉이 강한 회화가 자기를 실현하는 장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투명유약처리하거나 소금유로 마감하는데, 소금유는 보통의 유약에 비해 마치 토기항아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입자가 굵고 거칠거칠한 질박한 표면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회화와 함께 설치작업에도 능하다. 그런 만큼 처음부터 도조를 도자보다는 조각이며 입체로 받아들이고 풀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도조를 조각의 연장으로 봤고, 설치작업의 확장된 경우로 본 것이다. 조각 중에서는 각종 기마상과 거대 토끼 형상(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에 대한 알레고리?) 그리고 신화적인 경우로서 마두인간(현대판 미노타우루스?)이 상당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금처리마감을 청화와 대비시켜 물성을 강조하고 다채로움을 더했다. 그런가하면 현대인의 초상과 관련해 흥미로운 경우로서 가면을 쓴 사람(아마도 작가 자신의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초상에 해당할)이 주목된다. 알다시피 정체성을 뜻하는 페르소나는 그 어원이 가면에서 왔다. 그때그때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을, 타자가 요구하는 가면을 매번 바꿔 써야 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설치작업으로는 캡슐 형태의 알약 포장지와 골판지, 비자카드와 LG로고 같은 각종 생활오브제 콜라주, 그리고 여기에 폐목과 시멘트와 세라믹이 어우러진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들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세라믹의 범주를 넘어서는, 경계와 영역 넘나들기를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식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 


위에량. 작가는 통념을 벗어난 작업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아마도 상식을 넘어서는 스케일 때문일 것이다. 세 작가 중 그나마 도자 고유의 기(그릇과 용기)에 충실한 편이지만, 전통적인 도자에 작가의 작업이 잇닿아 있는 것은 이까지(기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가 전부다. 그의 작업이 예시해주고 있는 형태, 이를테면 그릇과 항아리는 너무 커서 한눈에도 실생활에서의 쓰임새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순수한 관상 혹은 감상을 위해 제작된 일종의 조형물임을 알게 된다. 건축과 결합되거나 조화를 이룬 경우도 있는데, 거대한 기둥이 그것이다. 기둥 자체는 독자적인 개체로서보다는 구조적으로 건물의 일부에 속한다는 점에서 건축과 세라믹이 일체를 이룬 어떤 차원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거대 그릇과 항아리 그리고 기둥 표면에는 전통적인 화조나 산수를 그려 넣어 일종의 화폭을 대신하게 했다. 초현실주의에서처럼 스케일에 변화를 준 의외성으로 도자의 표현영역을 확장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세 작가가 만나 따로 또 같이, 셋이면서 하나인 작업을 선보인다. 저마다 개별성을 유지하기도 하고, 개별성을 넘어 혼연일체가 된 경우도 있다. 도자기지만 기(그릇과 용기)라기보다는 조형물에 가깝고, 생활 속 쓰임새보다는 관상하고 감상하기 위한 예술작품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생활용도로부터 완전히 결별하지는 않는다. 생활과 예술, 일상과 조형, 둘 다를 아우르면서 통합시키는, 그럼으로써 생활 속 예술을 실천하고 실현한다고나 할까. 이 일련의 작업을 작가들은 <산롱이 만든 휴식>이라고 부른다. 현실에 발목 잡혀 휴식을 잊은(그리고 잃은) 현대인에게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휴식이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더불어서 잊힌 자기를 되돌아보고, 일상 속에서 잃은 자기를 되찾는 시간이다. 웃음과 해학(김성천), 일상과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정길영), 그리고 의외성(위에량)과 같은 억압된 계기들(그리고 어쩌면 억압된 자기)과 만나지는 시간이다. 산롱의 작업은 그런 휴식의 계기를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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