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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설치를 넘어 공간디자인과 공간연출로 확장되는 큐브

고충환

건축은 조형예술의 꽃이다. 조형예술의 각 형태와 경우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조형예술의 총체이며 일종의 토털아트를 하나의 건축물에다가 오롯이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물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감동을 준다. 특히 고색창연한 성당이 그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성당은 시간의 집(고색창연한)이고 죽음의 집(성당 밑에는 지하묘소가 있다)이다. 지상에 거주하는 산자와 지하에 거주하는 사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는 세속의 성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의 집이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든 성당에 들어서면 천창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빛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에 매료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치 은근하고 부드러운, 그리고 여기에 형형색색의 빛의 질감(빛의 옷)에 감싸인 듯한 안온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바로 빛으로 화한 신의 은총(신의 현신, 성과 속 아니면 감각적인 현실과 환영적인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워지는 경험)과 만나지는 것이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형태와 경우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착색유리(처음부터 아예 착색유리로 제작된 것이거나 맨 유리표면에 그림을 그려 넣어 구워낸)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임정은의 작업과 통한다. 작가의 작업을 스테인드글라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변주와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며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구축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가 그런 것처럼 작가의 작업 역시 공간 친화적이고 건축 친화적인 장소특정성이 강한 경향을 예시해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착색유리를 이용한 설치작업에 주력해왔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점차 이런 공간적이고 건축적인 확장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빛의 아우라, 빛의 질감(빛의 질료?), 빛의 서사(이를테면 신성한 아니면 성스러운?)와 더불어서 앞으로 확장되고 심화될 가능성의 지평으로 봐도 되겠다.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해줄 계기로 봐도 되겠다. 

임정은은 그러나 처음부터 착색유리를 이용한 설치작업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설치작업으로 이행하기 이전에 유리조형 자체를 일종의 독립된 오브제처럼 다룬 일련의 작업을 통한 형식실험에 해당하는 시기를 거친다. 이를테면 유리에칭(엄밀하게는 에칭보다는 샌딩으로 봐야 하는데, 부분적으로 유리의 표면을 갈아내 다른 부분과의 질감상의 차이를 꾀하는)과 큐브 형태의 유리 덩어리(유리 표면에 그려 넣은 큐브가 입체의 형태로 변주되고 확장된), 그리고 여기에 거울이 더해지면서 환영적인 효과를 실험하고 극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리 표면에는 주로 기하학적 형태의 큐브를 평면으로 그려 넣는데, 그렇게 그려진 큐브가 벽면에 그림자를 만들면서, 더욱이 놀랍게도 원래 평면으로 그려진 큐브가 입체 형태의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실재와 그림자가 실체감을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난다. 그림자에 의해 평면이 입체로 구현되는 것이다. 더불어 유리 표면에 샌딩된 큐브가 무색이어서 실체감이 희박한 반면, 오히려 그림자가 더 뚜렷한 실체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렇게 실재와 그림자, 실상과 허상, 실체와 환영의 관계가 전복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그림자조각(오브제와 이로부터 유래한 그림자의 관계가 전복되는, 플라톤 식으론 실재와 이로부터 유래한 감각적 현실 곧 시뮬라크라의 관계가 전복되는)과도 통한다. 

평면이 입체로 구현되는 것도,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실체감을 얻게 해주는 것도 모두 그림자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그림자는 결정적이다. 그리고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작업은 유리라는 일종의 중간자를 통해서 빛과 그림자를 매개시켜주는, 그리고 그 매개양상이 다양한 형태와 질감을 얻는, 그런 작업일 수 있다. 빛도 그림자도 그리고 빛과 그림자를 매개시켜주는 유리마저도 그 존재방식이 하나같이 애매한 것들인 만큼(빛은 물질인가? 더욱이 그림자는?) 작가의 작업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적인 효과는 오히려 이로 인해 더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는 점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미가 있고 묘미가 있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거울이 끼어들면서 현실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무엇이고 실재와 그림자를 가름하게 해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경계며 근거가 지워지면서 현실은 순수한 환영놀이로 이행한다. 이처럼 현실을 예술로, 현실을 놀이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작가의 예술적 아이덴티티가 있다고 봐도 되겠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전기를 맞는다. 임정은 하면 떠올리게 되는 작가의 전형성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이번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들이 발견된다. 예컨대 무색으로 나타난 유리에칭 대신 착색유리(최근에는 착색유리 대신 UV print)를 도입해 시각적 이미지가 더 다채로워졌다. 그리고 종전의 독립적인 오브제 위주에서 부분과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집합을 이루는 설치작업 중심으로의 변화도 눈에 띤다. 여기에 조명을 매개로 반투명한 다채로운 색 그림자들이 서로 간섭하고 충돌하고 스며드는, 음악으로 치자면 합주(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색채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일종의 움직이는 조명 혹은 작동하는 조명 개념을 도입해 감각적인 경험을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이를테면 조광기를 도입해 빛의 세기에 변화를 주는 한편, 타이머를 장착해 그 변화에 주기를 부여했다. 그렇게 비록 이미지 자체는 고정돼 있지만 조작되는 조명으로 인해 마치 미묘하게 움직이는 빛의 스펙트럼을 보는 것 같은, 빛을 색깔로 환치(분광)시켜놓은 프리즘을 보는 것 같은 판타지를 자아낸다(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차후 작업에서 유리판 대신 아예 프리즘을 도입할 수도 있을 것. 그리고 그렇게 프리즘과 프리즘이 서로 부닥치고 충돌하게 만들어 환영적인 효과를 극대화할 수도 있을 것). 흐르는 빛의 질감(빛은 흐른다는 사실)을, 빛의 색깔(빛은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런 다채로운 색채의 향연은 말할 것도 없이 빛에 의한 것이고, 유리판에 그려진 그림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이처럼 유리판에 그림을 그리는데, 주로 기하학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도상과 패턴들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도상은 민속적인 경우와 함께 특히 다양한 출처의 종교적인 아이콘과 관련이 깊고(가장 널리 알려진 경우로는 십자가와 만다라를 들 수가 있을 것), 이는 그대로 빛이 내재한 성스러운 의미(빛은 신의 몸이고 육화된 신이다)와도 통한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태로는 단연 큐브가 지배적인데, 큐브는 알다시피 원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에 속한다. 예로부터(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기하학은 수학으로 여겨졌고 순수관념으로 받아들여졌었다. 다시 플라톤을 인용하자면 실재(이데아)의 물화된 형식으로 봐도 되겠고, 기독교식으론 신(로고스, 말씀, 이성의 육화된 형태)에 해당한다. 대략 존재의 원형, 궁극, 원인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게 큐브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의미가 담긴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큐브를 집으로, 그리고 그 변주된 다채로운 형태를 집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의 양태로 해석한다. 소박하고 일상적인 해석으로 볼 수 있겠고, 크고 작은 큐브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질을 생각하면 쉽게 공감을 얻는 해석으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해석을 큐브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결부시켜보면 결국 현대인은 신이라는 집 아니면 신을 모신 집과 더불어 사는 것이 된다(실상은 신을 상실한 시대에 신과 더불어 산다?). 작가는 빛을 매개로 한 일련의 작업에서 이처럼 일상적이고 이상적인, 세속적이고 탈속적인,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영과 육이 공존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기왕의 설치작업을 공간 친화적인 작업으로 확장하고, 조형과 건축이 일체를 이루는 건축 친화적인 작업을 강화한다. 공간이며 건축 자체를 조형의 일부로서 끌어들이는 장소특정성이 강한 작업이다. 작업 자체의 일정한 변화와 함께 전시 공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인식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기왕의 화이트큐브는 그림을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벽면에다가 비유할 수 있겠고,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완제품을 전시하는 공간 시스템을 견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장소특정성이 강한 작업의 경우에는 전시현장에서 직접 작품이 제작되는 것인 만큼 전시공간과 조형을 서로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 전시공간이며 건축 자체를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인 만큼 전시공간이며 건축 자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수적이다. 자연스레 화이트큐브의 경우에는 독립된 오브제 자체의 완성도에 방점이 찍히고, 장소특정성이 강한 경우에는 형식실험이 용이한 것과 함께 현장성과 기록성(이를테면 아카이브 같은)이 강조된다. 경우에 따라서 단순히 전시 공간 환경이 달라지는 것을 넘어 작업 자체의 체질이 바뀐다는 말이다. 추후 작가의 작업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의 계기로 봐도 되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연한 계기로 초소형 쇼윈도의 공간 환경에서 전시를 하게 되면서 어쩜 불가피하게 선택한 변화일 수도 있겠지만, 이를 계기로 향후 작업의 체질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 최소한 작업의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경우로 보인다. 길거리를 지나치는 무심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는 만큼 오히려 더 유심한 작업과 강도가 요청된다. 그런 고심의 결과로서 이번에는 조형도 움직이게 했고 조명도 움직이게 했다. 착색유리판을 천장에 매다는 식의 모빌 개념을 도입했고, 여기에 조광기를 이용한 움직이는 조명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적용했다. 조광기의 작동 여하에 따라서 설치된 조형이 반응하게 한 것인데, 색채 그림자가 반영되고 굴절되고 왜곡되면서 움직이게끔 유도한 것이다. 움직이는 조형을 포인트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종전에 움직임이 사실상 암시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번에는 움직임 자체가 직접 감각적으로 어필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런 만큼 향후 움직이는 조형에 착안한 본격적인 키네틱아트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봐도 되겠다. 

근작에서 작가는 같은 공간 환경에서 연이어 작업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는데, 이번에는 착색유리판을 설치하는 대신 예의 기하학적 형태며 큐브 형태를 공간에다 직접 설치하고 재현하는 방식을 취했다. 전시장 자체를 캔버스 삼아 공간에다가 각 빨간색(넓은 선을 통해 근거리를 표현)과 파란색(좁은 선을 통해 원거리를 표현) 띠를 붙이는 방법으로 큐브 형태를 대신한 것이다. 공간 본래의 지형 위에 색 띠를 붙여나간 것인 만큼 그렇게 재현된 큐브 형태는 지형에 맞춰 서로 겹쳐 보이기도 하고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관점 여하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하고 보이게끔 유도한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론 큐브 형태 스스로 변주하도록(사실은 관객의 시점에 반응하도록) 잠정적인 운동성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색띠와 공간이 매개되는 것이 포인트일 것인데, 그 개념이 다니엘 뷰렌을 상기시킨다. 주지하다시피 뷰렌의 작업은 관공서 건물이나 고색창연한 건축 그리고 미술관과 같은 제도적 공간에다가 각종 색띠를 붙여 장식하는 경우(물론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공간에 대한 간섭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공간경험을 유도하는 한편, 무엇보다도 건축물 자체가 내재(은폐?)하고 있는 제도적 공간성(혹은 공간기능)을 은연중 드러내고 강조한다(폭로한다?). 고도의 정치적 미술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향후 어떠한 형태로든 작가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면서 생산적인 변화를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작가는 통제된 우연이라고 부른다. 최소한으로 주어진 공간 환경 자체를 한정적이고 제약적인 조건 곧 통제로 보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예술혼?)을 우연이라고 본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제와 우연, 한정과 자유가 때론 충돌하고 더러는 화합하면서 일궈내는 작업의 생리를 주제화한 것일 터이다. 이 주제는 다르게는 계획된 우연, 가장된 우연, 그리고 기우뚱한 균형(김지하)으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인데, 만사에 여유가 있고 유격(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인리히 뵐플린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에 나타난 미술양식을 비교설명하면서 부조화를 통한 조화, 불균형을 통한 균형을 바로크 미술의 양식적 특징으로 꼽았는데, 대동소이한 의미로 봐도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유리를 매개로, 기하학적 형태며 큐브로 나타난 엄정한 형식논리를 매개 삼아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면서 무한 변주되는 판타지를 열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통제된 우연을 즐기고 기우뚱한 균형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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