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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열/ 시간 헤아리기, 희미해진 기억 앞에 서다

고충환

오래된 것들, 시간에 침식되고 풍화된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 일상에서의 용도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은 어떤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향수는 정작 그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과 함께 했던 사람의 향기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니까 물건 자체에는 향기가 없다. 스스로는 향기가 없으면서 향기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 향기는 말하자면 사람과 물건과 시간이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이처럼 물건이 향기를 암시할 수 있으려면 그기에 삶의 흔적이 배어 있어야 하고, 시간이 할퀴고 간 풍화의 흔적이 녹아 있어야 한다. 시간은 존재로부터 존재를 박탈해가기도 하지만, 존재로 하여금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도 한다. 이렇게 폐기된 물건은 일상의 맥락으로부터 미학의 맥락으로 옮겨지고, 자기목적성과 기능을 수행하던 것에서 미적 향수를 자극하는 어떤 오브제(의미 있는 형식)로 그 정체성이 전이되는 것이다. 유년시절처럼 돌이킬 수 없는 기억도 마찬가지다. 흙바닥이나 시멘트바닥, 담벼락이나 흑판에 낙서하며 놀던 기억이나, 뻥튀기 기계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잔뜩 들떠있던 기억은 다시는 취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만큼 더 절실하고 생생하다. 이처럼 버려진 것들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말하자면 부재하는 것들이 삶을 의미 있게 해주고 풍요롭게 해준다는 사실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이며 미학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폴 클레는 그림이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림이란 말하자면 버려진 것들이나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다시 취할 수 있게 해주고, 부재하는 것들이나 비가시적인 것들이 열어 보이는 어떤 세계 속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린 듯 만 듯한, 어눌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자연스러운, 분명 인위적으로 그린 것이면서도 인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기에 그렇게 놓여 있었던 양 보이는, 시간의 베일을 찢고 돌연 현시한 시간의 화석 같고 흔적의 화신 같은 오세열의 그림은 이런 버려진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부재하는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과 관련이 깊고, 암시와 상기를 통해서만 현현하는 것들과 관련이 깊다. 



시간 헤아리기 

오세열의 그림은 유화로 그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광택의 텁텁한 질감으로 인해 마치 그 이면에 오랜 시간의 지층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고답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작가만의 고유한 방법에 의한 것으로서, 이를테면 기름기를 완전히 제거한 상태의 물감을 사용해서 바탕을 조성하고 그림을 그린다. 또한 흔히 캔버스 표면에 그림을 그리기 마련인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캔버스를 뒤집어 틀에 고정시키고 여기에다 합판을 덧대 보강처리를 함으로써 마치 견고한 바탕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환경을 조성한다. 이렇게 틀이 조성되고나면 작가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바탕처리를 해 특유의 질감효과를 연출해내는 것이다. 결국 작가에게서 바탕처리는 그 위에 얹히는 모티브와 함께, 보기에 따라선 이 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특유의 마티에르 효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작업에서의 인상 즉 오래되고 고답적이고 친근하고 자연스런 느낌은 사실상 이런 마티에르와 함께 바탕화면에서 이미 상당부분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굳이 캔버스에다 합판을 덧대 보강하는 것은 그의 작업이 단순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식이 아니라, 이보다는 더 거칠게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암시해준다. 말하자면 작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식에서 나아가 칼이나 송곳과 같은 그 끝이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그리고, 긋고, 긁고, 갈아내는 등의 여러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을 중첩시켜 화면에다 비정형의 스크래치를 만들어낸다. 이렇듯 텁텁한 질감과 스크래치가 중첩된 화면과 더불어 그 이면에 오랜 시간의 흔적을, 삶의 흔적을, 행위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고유의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림과 함께 각종 레디메이드를 오브제로서 도입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단추, 병뚜껑, 알루미늄 캔 따개, 플라스틱이나 비닐 소재로 된 형형색색의 스티커 등 온갖 기성품을 차용해 일정한 조형요소로 이용한다. 이와 함께 그 쓰임을 다해 버려진 함지박이나 됫박 그리고 대소쿠리와 같은 일상품을 차용하기도 한다. 이 오브제들로는 그 자체를 바탕화면 삼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가장자리 삼아 액자를 대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화면의 내외부에서 생활 속에서 건너간 오브제를 광범위하게 차용하고 있는 작례는 작가의 작업이 다름 아닌 삶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작가의 의식은 회화의 내재적 원리나 예술의 자율성(그 자체 모더니즘 서사의 키워드이기도 한)에 구속받지 않고,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그리고 특히 일상을 사는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활감정이나 생활철학으로 부를 만한 가치론적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타의 숫자들에서도 확인된다. 작가는 화면을 마치 낙서를 위한 벽면이나 흑판처럼 사용하고 있고, 그날그날의 소회나 순간적인 착상을 기록하기 위한 메모지나 일기장처럼 사용한다. 때로는 의미 있게 더러는 무의미해 보이는 무슨 상형문자 같기도 한 그 기호들을 짜맞추다보면 작가의 일상을 어느 정도 재구성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정형 비정형의 기호들 가운데 숫자가 있다. 숫자는 단편적으로 그리고 무분별하게 기록돼 있기도 하고, 일련의 숫자가 연속적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단편적인 숫자들 가운데에는 모르긴 해도 전화번호나 누군가의 생일 그리고 약속 날짜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림을 그리다가 전화를 받고 그 번호를 화면 위에 메모해놓는 식이다. 이런 단편적인 숫자에 비해 연속적인 숫자는 이 보다는 좀 더 심층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숫자가 전화번호와 같은 그리고 그때그때 처리해야 할 셈 같은 그리고 특정 숫자와 관련해 불현듯 떠오른 기억과 같은 일상에서 건너온 것들이라면, 연속적인 숫자는 이런 일상적인 순간이며 사건을 떠받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와 관련이 깊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을 그림으로 그리고 조형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시간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술과 관련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사실 예술에 대한 모든 정의는 임의적인 것이다. 열린 개념이라거나 당대적이라거나 종 다양성 같은 개념들이 이 임의성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임의적인 것이라면 예술에 대한 정의가 까맣게 지워진 상태, 정의 이전의 상태, 처음 상태를 가정해볼 수가 있다. 예술이 그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술로 볼 만한 행위(일상적인 행위와는 구별되는 행위)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저마다 주어진 삶의 시간을 반성하는 자기반성적 행위, 삶의 매 순간순간을 의식하고 기록하는 자기강박적인 행위야말로 가장 정직하고 절실한, 그래서 존재론적인 행위일 수 있다. 예컨대 시간을 숫자로 환원해 시간을 강박적으로 기록하는 행위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캔버스에 숫자를 기록하는 로만 오팔카, 시험지(갱지)에 숫자를 기록하는 한나 다보벤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셈(수학)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숫자를 기록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을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치자면 숫자가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이를테면 풍화된 흔적이나 빛바래고 색 바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작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숫자가 가장 기본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그렇고, 특히 작업에 숫자를 끌어들인 경우가 그렇다. 삶이라는 시간을 의식하고 기록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시간은 누구나 헤아릴 수 있다), 정직하고 절실한(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가장 존재론적인 행위일 수 있다) 행위이고 작업이다. 여기서 숫자들 자체는 그대로 삶의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와 과정과 결과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기록행위는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마치 자신이 매순간 살아내는 시간을 의식하고 이를 일일이 헤아리듯 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림에 기록된 숫자는 그 자의식의 소산이며 흔적인 것이다. 이처럼 삶의 시간을 헤아리고 기록하는 행위는 작가의 작업이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에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경향은 일정한 간격으로 줄이 쳐진 칸 위에 숫자를 기록한 작업에서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된다. 여기서 줄이 쳐진 화면은 편지지(저간의 소식을 묻는)나 원고지(일상의 소회를 기록한)처럼도 보이고, 밭고랑처럼도 보인다. 헤아리는 삶에 더해 소통하는 삶이며 일구는 삶의 메타포를 표현한 것이다. 예술과 삶을, 예술적 행위와 삶의 과정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것이며, 예술과 삶이 혼연일체가 된 어떤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해서, 작가의 이 일련의 작업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시간 헤아리기>라는 주제나 부제를 붙여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기억상자

이 일련의 평면작업들과 함께, 작가의 작업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일종의 박스 형태의 작업들이다. 주로 정방형의 사각형 박스의 바탕 면에다 그림을 그린 연후에, 그 위에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투명 아크릴 판을 덧씌운다. 이때 아크릴 판의 표면에다 무수한 비정형의 스크래치를 조성해 그 이면의 그림이 뿌옇게 보이게 했다. 투명한 소재를 반투명으로 만들어 빛이 직접 투과되는 것을 피하고 어렴풋하게 보이게 한 것이다. 마치 어둠과 빛이 절반씩 직조된 부드러운 음영의 베일을 통해 보는 것 같은 그 그림은 불완전한 기억의 프리즘을 통해 본 것처럼 아득하고, 신기루나 데자뷰처럼 비현실적이다. 어둠과 빛을 직조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교직한 것 같은, 불현듯 부재하는 것들과 대면하는 것 같은 몽롱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든다. 마치 기억의 언저리에 서 있는 것 같은, 꿈과 현실의 애매한 경계에 속한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감흥은 그림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때보다는 바로 코앞에서 볼 때, 시야를 꽉 채우는 풀 사이즈로 볼 때 더 강화되고 더 극대화된다. 적어도 이 작품들만큼은 소위 심적 거리나 심미적 거리를 무시하고 볼 때 더 잘 보이는 것이다. 해서, 이 일련의 작업들에 대해선 우연하고 무분별한, 아득하고 희미해진 기억의 편린들을 차곡차곡 쟁여놓은, 그래서 불현듯 그 기억의 흔적들과 대면하게 만드는 일종의 <기억상자>로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써 오세열의 작업은 새것들이 주는 생경함보다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주는 친숙하고 친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손때 묻은 것들이 그 속에 품고 있는 그 느낌은 결국 어떤 흔적 같은 것으로서, 버려진 것들, 부재하는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 암시와 상기를 통해서만 겨우 존재할 만큼 그 존재감(혹은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과 강하게 연동돼 있다. 이때에 작용하는 미의식은 알고 보면 오랜 미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보편성을 획득하게 해준다.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낙서한 것 같은, 사방치기 놀이에 열심인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셈을 풀 때 나는 흑판에 사각거리는 분필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작가의 작업은 마치 시간의 화신 아니면 존재의 원형과 대면한 것 같은 친숙하고 친근한 느낌을 가만히 건드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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