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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 존재의 풍경, 땅은 죽음을 먹고 산다

고충환

길섶에 핀 이름 모를 들꽃, 무심한 발길에 밟히는 잡초들, 하늘거리며 흩날리는 꽃잎, 파스텔을 짓이겨놓은 듯 온 산을 노랗게 물들이는 개나리, 그 사이사이로 군락을 이룬 진달래, 시야를 온통 가득 채우며 몽롱하게 아롱거리는 망초, 선혈 같은 육즙을 뚝뚝 떨구는 맨드라미, 흐릿해진 기억처럼 아득하게 멀어지는 길, 무상하게 흐르는 강, 웃자란 갈대숲에 버려진 듯 숨겨진 나룻배, 그리고 하늘을 유영하는 새떼. 

흔하고 아름답고 슬픈 풍경이다. 흔하지만 흔치 않은 풍경이다. 풍경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주체가 매개될 때 비로소 발생한다. 자연에서 주체에게로 주체에서 자연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의 상호작용이 풍경을 발생시킨다. 무엇이 건너가고 얼마만큼 건너오는지가 풍경의 용량을 결정하고 질을 결정한다. 그래서 저마다 같은 곳(것)을 바라보면서도 사실은 매번 다른 것(곳)을 본다. 풍경의 용량과 질은 잡음이 없을 때 극대화된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과 고요 속에서 자연과 대면할 때, 마치 세상에 저 홀로 남겨진 듯 고독과 더불어서 자연과 독대할 때, 마치 생판 처음 보는 것처럼 자연을 볼 때 풍경은 최대치에 이른다. 그때 비로소 풍경은 자기를 열어 보이고 자연이 자신을 내어준다. 혹자는 자연 자체라고 부르고, 혹자는 자연의 본질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자연의 속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어준다. 자신의 존재(개별존재)를 초과하는 어떤 존재(절대존재)에 대한 정향성과 지극한 그리움이 자연을 열고 풍경을 열고 세계를 열고(하이데거의 세계의 개시) 현상을 연다(메를로퐁티의 현상학적 에포케). 그리고 그렇게 비로소 열리는 풍경은 자신의 존재마저 초과하는 것이기에 아름답고(숭고?), 무심하고 무상하고 무감한 풍경이기에, 주체와의 매개를 통해서 비로소 발생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원체는 주체와 상관없는 풍경이기에 슬프다. 

작가 송창은 풍경을 그린다. 그렇다면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풍경은 그저 예사로운 풍경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작가는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그린다. 예사롭게 보일 뿐 사실은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그린다. 예사롭게 보이는 풍경 속에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숨겨놓고 있는 것. 여기서 예사로운 풍경이 풍경의 표면이라면 예사롭지 않은 풍경은 풍경의 이면이다. 풍경이 주체와의 매개를 통해서 비로소 열리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풍경의 내면이고, 사실은 풍경에 삼투된 작가의 내면이다. 그렇다면 풍경에 삼투된 작가의 내면이란 무엇인가. 작가의 내면의 무엇이 자연 쪽으로 건너가서 풍경을 열어 놓는가. 분단현실이다. 분단현실풍경이다. 작가는 모든 풍경에서 분단현실을 본다. 모든 현실인식이 분단현실에서 왔다고 본다. 그 현실인식은 작가의 화력으로 치자면 원체는 치열한 이념투쟁을 반영하고 실천한 임술년 동인에서부터 시발된 것이다. 그런 만큼 근 삼십여 년 전에 멈추어 선 녹슨 시간 위에 정박된 것이며, 이후 현재까지 연장되는 시간과 더불어서 지속되는 것이며, 무슨 유령처럼 과거가 현재 위로 호출되는, 부지불식간에 과거가 출몰하면서 현재의 삶의 질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역사적 현실로 치자면 당연히 작가 이전으로까지 소급되는 것이며, 따라서 작가의 그리고 어쩌면 분단현실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의 질까지도 결정하는 것이다. 


분단현실인식(분단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보는)이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주제인 셈인데, 그 주제의식은 각각 정치적 풍경(혹은 사회적 풍경)과 역사적 풍경(혹은 기억의 풍경)을 경유해 종래에는 풍경 자체(혹은 자연풍경)에 이른다. 먼저 정치적 풍경을 보면 이념대립이 첨예하게 부닥치는, 화법으로 치자면 직설화법이 거침없이 그 표현을 얻는 장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소위 잉여인간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종말처리장을 다룬 난지도 매립지가 그렇고, 인간개조프로젝트를 다룬 삼청교육대가 그렇고, 저 죽을 줄 모르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열탕(열강이 각축하는 살풍경한 현실)이 그렇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잉여를 생산한다고 본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잉여로 호명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예술과 종교 그리고 죽음이 포함된다. 특히 죽음이야말로 반자본주의의 극치이며, 공공연하게는 죽음이 터부시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처럼 잉여는 태생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잉여의 관계는 양가적인데, 자본주의에 의해 배제된 것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대항논리가 된다. 그리고 미셀 푸코는 첨예화된 계몽주의를 말하는데, 신체를 직접 감금하고 억압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개별주체 스스로가 도덕을 내재화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회적 공준을 상식으로서 받아들이도록 훈육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혹은 신냉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잉여와 비 혹은 무정형(특히 예술의 결정적인 실천논리인, 정형을 매개로 상품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반하는) 그리고 계몽주의의 감옥과 같은, 어쩌면 자본주의와 관련해 고전에 속하는 담론들에 대한 자기반성적 사유를 이 일련의 정치적 풍경은 담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 풍경은 이념대립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잊혀진 풍경이다. 원래는 정치적 풍경에 나타난 치열한 이념대립이 첨예하게 부닥쳤던 살풍경한 현장이었지만, 지금은 다만 흔적으로만 남은 풍경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자면 스산한 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옛 노동당사 건물이나, 참전한 1개 대대가 중공군에게 몰살당한 영국 참전군 화장터를 소재로 한 등록문화재 408호, 그리고 길 양쪽으로 콘크리트 방호 구조물이 병풍 혹은 방패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길 같은 그림들이 그렇다. 부재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그리고 그렇게 현재 목도(증언과 현장성에 연동된 목격과는 비교되는)할 수 있는 부재가 때론 멜랑콜리마저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한 풍경이다(모든 죽은 것들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조금은 엉뚱할 수 있지만 그 풍경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풍경이 사실은 잊고 싶은 기억과 함께 잊힐 운명을 태생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쪽에 잊고 싶은 기억과 잊힐 운명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죽은 기억을 되살리려는 기획이 있다. 기념비와 기념관, 기념공원과 기념동상이 그렇다. 그러므로 역사적 풍경은 잊고 싶은 기억과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상호 충돌하는 이데올로기적 풍경이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예식(죽음을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과 관련한 상징투쟁이 맞부딪히는 상징적 풍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연풍경이 있다. 들꽃 같은. 잡초 같은. 꽃잎 같은. 길 같은. 강 같은. 하늘 같은. 그리고 하늘을 유영하는 새 같은. 이 풍경들은 적어도 외관상 인간사와 무관해 보인다. 그 풍경들 어디에서도 치열했던 이념대립의 현장이나, 분단의 상처, 그리고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의주로, 임진강, 임진나루터, 고랑포구(한 때 번창 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민통선 마을), 연천 발 원산 행(옛날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조탑이 서 있는 풍경)과 같이 지명을 특정한 경우, 그리고 금지된 정원, 금단의 땅, 잃어버린 대지, 잃어버린 고향과 같이 심정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을 암시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그곳이 아니어도 무방할, 그저 흔한 풍경들이다. 그 풍경들 위로 꽃잎이 흩날리고, 망초가 몽롱하고, 강이 흐르고, 새떼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파랗다. 


아름답지만 다가갈 수 없는 풍경이다. 아름답고 슬픈(다가갈 수 없어서 슬픈, 그리고 그렇게 다가갈 수 없음과 슬픔이 공명하면서 아름다움을 증폭시키는) 풍경이다. 그래서 다시, 인간(그리고 인간사)과 무관한 풍경이다. 특히 잃어버린 고향이라는 수사적 표현이 도저한 상실감을 뒷받침하는 풍경이다. 여기서 잃어버린 고향의 의미는 다중적이다. 분단현실을 의미하기도 하고, 실제로 금지된 땅을 의미하기도 하고, 저마다의 무의식을 파고든 상실감을 의미하기도 하고, 뿌리 없음에 대한 존재론적 자의식을 뜻하기도 한다. 비록 여전히 주체가 매개되는 풍경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주체와 상호작용하면서 열리는 풍경이지만, 적어도 외관상 분단현실인식이 불러온 분단현실풍경이라고 특정할 만한 풍경은 그기에 없다. 그렇다면 풍경을 통해 분단현실을 본다는 작가의 주제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자연풍경은 자연풍경만이 아니다. 그것은 진즉에 정치적 풍경과 역사적 풍경을 겪었고, 사회적 풍경과 기억의 풍경을 품었다. 시간적으로 정치적 풍경과 역사적 풍경을 경유해 종국에 가닿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풍경은 사실은 이질적인 풍경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진 지층이다. 정치적 풍경과 역사적 풍경 그리고 자연풍경이 하나의 지층으로 중첩된 단층인 것. 그러면 문제는 적어도 외관상 자연풍경으로 하여금 어떻게 그 이면에 숨겨놓고 있는 정치적 풍경과 역사적 풍경을 드러낼 것인가가 될 것이다. 여기서 결국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가시적인 것으로 하여금 어떻게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할 수 있는가가 될 것인데, 작가는 그걸 형식적으로 질감(질료)에서 찾고, 내용적으로 땅의 생명력으로 해결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형식적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특징으로 치자면 질감과 붓질을 들 수 있다. 먼저 붓질로 치자면 붓을 칼(나이프)처럼 그리고 칼을 붓처럼 사용한다. 붓질과 칼질이 여실한데, 미술사적으로 표현주의적 화법에 부합하고, 생리적으로 소위 몸 그림(액션페인팅)과 통한다. 표현이란 원래 내면적인 것이 외적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내면의 무엇이 외적으로 분출되는가. 분단현실인식이다. 분단현실인식이 에너지로 화해진 것이다. 에너지로 화해진 분단현실인식이 분기되는 지점들, 이를테면 분노와 정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연민이 응축된 에너지에 부합하는 색을 얻고 질감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질감을 위해서 작가는 물감과 함께 이러저런 오브제를 도입하는데, 마 끈, 종이 끈, 조화, 나무껍질, 짚, 녹슨 철판조각, 쇠못 따위를 도입한다. 이 중 조화는 질감과 함께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는데, 종전 작업에서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을 통해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이후 물신과 물화된 인간을 표현한 경우와 비교된다. 알루미늄 캔과 인간(아마도 인간의 욕망?)을 동일시한 것이 물신을 의미한다면, 조화는 죽음과 주검을 상징한다. 실제로 작가는 죽음의 현장(이를테면 묘지와 같은)에서 이 형형색색의 조화들을 수거해왔는데, 죽음과 주검의 상징적 의미에 진정성을 더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조화는 말하자면 주검에 대한 예의를 상징하고 죽음에 대한 오마주를 상징한다. 여기에 조화는 키치를 상징하고, 가짜(죽음에 대한 코스프레?)를 풍자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물화된 인간을 표현한 알루미늄 캔 인간과도 통한다. 꽃에서처럼 아름다움과 죽음이 격렬하게 붙어있는 다른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조화에서만큼 쉽게 취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는 다른 경우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게 작가는 플라스틱 조화를 매개로 꽃(아름다움)이 갖는 상징적 의미(죽음)를 곱씹게 만들고, 죽음에 대한 예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땅의 생명력을 위한 것이다. 붓질이 그렇고 칼질이 그렇다. 질감(질료)이 그렇고 오브제가 그렇다. 땅의 생명력이 아니라면 이것들은 다 아무 것도 아니다. 땅이 생명력을 얻을 때 자연풍경이 정치적 풍경과 역사적 풍경을 자기표면 위로 밀어 올리는 것도,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일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땅은 죽음을 먹고 산다.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땅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다만,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인.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라야 비로소 다른 살아있는 생명체를 낳을 수도 있는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죽음을 먹고, 정치를 먹고, 역사를 먹고, 기억을 먹고, 망각을 먹고, 시간을 먹고, 그리움을 먹고, 연민을 먹고, 존재를 머금은 자연을 그리고 풍경을 그린다. 그 땅 위로 저마다 들꽃으로, 잡초로, 꽃잎으로, 길로, 강으로, 하늘로, 그리고 새로 환생한 존재의 풍경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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