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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목판화의 현대성

고충환

현대성과 현대미술

21세기 목판화의 현대성이란 주제는 목판화의 현대성이 가능한지를 묻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여기에 현대성을 담보하는 목판화, 소위 현대적인 목판화라는 답을 내놓을 수가 있다. 단순하다. 그러나 동시에 동어반복을 무릅쓴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먼저 현대성이 뭔지가 선결되어야 한다. 현대성은 현대적으로 볼 만한 감수성의 문제며 감각의 문제다. 주체가 세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와 관련된 내면의 문제며 질의 문제다. 그리고 그 내면의 질이 어떻게 외화 되는지, 형상화되는지 혹은 표현을 얻는지와 관련된 문제다. 여기에 현대성은 현대적인 자의식과 현대적인 문제의식과 관련된다. 시대에 대한 주체의 자각과 그 자각이 사회와 만나지는 관계, 말하자면 주체와 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이런 현대적인 감수성, 현대적인 감각, 현대적인 자의식, 현대적인 문제의식의 분별되거나 무분별한 총체가 현대성이다. 여기에 현대성은 시대적 환경, 이를테면 디지털과 같은 기술적 환경, 이미지의 정치학 곧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와 관련된 매스미디어적 환경, 패러다임 혹은 에피스테메와 같은 지적 환경, 그리고 자본주의와 같은 정체적 환경에 연동된다. 이런 당대적 환경이 주체에 영향을 미치고 주체를 만든다. 그렇게 주체 혹은 창작주체는 비로소 현대성을 담보할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조형을 매개로 창작주체의 현대성이 형상화되고 자기표현을 얻는 장이 현대미술이다. 


현대성은 그렇다 치고 현대미술은?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는 결코 고정적이지도 결정적이지도 않다. 이를테면 예술은 사실의 역사도 진리의 역사도 그리고 심지어는 표현의 역사조차 아닐 수 있다. 매번 당대적으로 예술이 어떻게 정의되어지는가의 문제의식에 연동된 정의의 역사(이즘의 역사? 태도의 역사? 입장들의 역사?)다. 이처럼 예술이 다름 아닌 예술에 대한 정의의 역사임을 인정한다면, 예술에 대한 정의는 동시에 항상적으로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의 인정은 예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술의 특수성이며 심지어는 예술의 미덕이기조차 하다. 자기를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와 기획에 대해 반 혹은 비결정성의 논리를 대질시키는, 나아가 아예 반 혹은 비결정성의 논리를 무기 삼아 모든 결정성의 시도와 기획에 개입하고 간섭하고 타파하는 실천논리에서야말로 비로소 예술은 정당화될 수 있고 당위성도 얻을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흔히 종 다양성이란 말은 다양한 형식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상호간 이질적인 정의들이며 상충하는 입장들의 공존으로도 이해되어져야 한다. 물론 현대미술의 정의와 관련한 담론적인 현실과 실제 현실(특히 시장의 논리)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담론적인 현실 쪽이고, 이런 동시대 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는 분분하다. 그리고 그렇게 분분하지만 최소한 합의에 이른 부분(담론적인 현실 쪽)도 있다. 그 최소한의 부분에 기대어 현대미술을 정의해보면 현대미술은 크게 오브제미술(물적 형식에 근거한, 특히 최종 결과물이 물적 형식을 띠는 경우) 이후의 개념미술(물적 형식이 다만 부차적인 차원에 머무는 경우, 나아가 아예 어떠한 물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일 수 있다. 여기서 개념이 자기표현을 얻는 주요 형식은 언어다. 그리고 언어는 의미를 실어 나르는 매개체다. 그리고 그렇게 현대미술은 의미론(기호학)이 되었다. 현대미술에서 전에 없이 담론이 전면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적 형식이 강한 매체들, 이를테면 조각과 회화와 판화(그리고 목판화)와 같은 정통적인 장르보다는 개념성(서사성 그리고 문학성)이 강한 매체들, 이를테면 사진과 비디오와 영화와 같은 미디어가 표면화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하나같이 물적 근거가 희박한, 그래서 오히려 의미와 기호를 매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매체들이다. 


여기에 디지털은 어떠한 물적 형식에도 기대지 않은 채 의미와 기호를 자유자재로 탈맥락화하고 재맥락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는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의외의 의미를 파생시키고, 예기치 못한 기호와 대면하게 만든다. 현실을 숙주 삼아 가상현실과 대체현실을 가공하고, 그렇게 가공된 현실을 매개로 거꾸로 현실을 견인하고 현실인식을 리드한다. 현실을 순수한 의미와 기호로 축조된 가상현실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디지털 환경은 현대미술의 장을 순수한 의미와 기호의 놀이로 변질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화용론이 있다. 하나의 의미란 그 자체 내재적인 것도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언어용법에 연동된다. 상황, 전제, 문맥, 맥락에 연동된다. 하나의 의미가 결정되는 지점은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이며, 따라서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여기서 배열과 배치의 논리가 유래한다. 의미 또는 기호를 어떻게 배열하고 배치하는지에 따라서 현실이 달라지고 현실인식이 달라진다. 여기서 이미지정치학이 나온다. 결국 하나의 이미지란 그 자체 현실이 아니라 조작된 현실이고 가공된 현실이다. 롤랑 바르트 식으론 신화화 혹은 신화적 현실이다. 보기에 따라서 현대미술은 이런 신화화 혹은 신화적 현실(다르게는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 현실)이 형식실험 되는 장이다. 


현대미술을 각각 의미론과 디지털환경 그리고 이미지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거칠게 정의해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담론 위주에서 봤을 때 그렇다는 말이지, 실제 현실과는 다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현대미술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그기에 회화와 조각처럼 물적 형식이 강한 정통적인 장르를 위한 자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판화와 목판화를 위한 자리도 없다. 말하자면 현대미술에서 정통적인 장르가 처한 위기의식은 단지 판화며 목판화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한 형식이며 경우로서의 목판화의 가능성은 요원한 일인가. 나아가 현대미술은 목판화가 반드시 담보해야 할 필수조건이며 덕목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담론적인 현실에서 본 현대미술의 정의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모든 정의는 임의적인 것이고, 더욱이 담론적인 현실에서 본 현대미술은 동시대 미술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미술과 현대성은 다르다. 굳이 현대미술이 아니고서도 현대성의 제반 조건들, 이를테면 현대적인 감수성, 현대적인 감각, 현대적인 자의식, 현대적인 문제의식에 부합하는 목판화는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에서 현대성으로 논의의 키를 트는 것도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유의미한 시도들과 예시들 

여기에 21세기 목판화의 현대성을 점칠 수 있는 유의미한 시도들과 예시들이 있다. 그 자체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론 동시대 목판화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들이다. 
먼저 현실주의 관점에서 보면 오윤과 이후 정원철의 판화가 주목된다. 오윤의 목판화는 선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또한 여백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선이 굵고 각이 뚜렷하며 목판 특유의 칼 맛이 살아 있어서 전체적으로 힘에 넘치면서도 유연한 선이 감지된다. 소재를 중심으로 판화를 보면 대략 당대적인 시대정신에 기초한 도상성과 전형성이 강하게 표현된 판화, 춤사위나 풍물 등 세속적인 풍속을 소재로 한 전통적인 놀이문화에 대한 공감과 해학과 신명을 표현한 판화, 새 등의 자연 소재를 끌어들인 자연 친화적이고 정적이며 서정적인 판화, 그리고 말년의 도깨비를 소재로 한 판화 정도로 구분된다. 이 모든 판화에서 힘이 느껴지며, 그 힘의 이면에는 한의 정서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의 목판화가 하나같이 힘이 넘치면서도 유연성을 잃지 않는 것은 그 힘이 이러한 한의 정서적인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원철은 리놀륨 판화 <대석리 사람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초상> 시리즈를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초상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개인사 즉 개인의 삶의 역사가 집약된 일종의 상징이자 기호이며 삶의 지도로서의 초상이 갖는 의미를 얼굴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작가의 판화를 특징짓는 요소로서 초소형 핸드드릴에 의한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대상의 세밀한 부분까지를 포착해내는 특유의 선묘를 들 수 있다(박영근 역시 초소형 핸드드릴을 이용해 특유의 초상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속도감이 회화적 깊이를 더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생리를 그대로 닮은 유연한 선묘와 스크래치가 초상에 각인된 삶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리고 도장 또는 지문으로 초상을 대체하기도 하는데, 도장으로 대변되는 사회적(혹은 신분적) 주체와 지문으로 대변되는 생물학적(혹은 생체적) 주체로 주체의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기존의 초상과 함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초점은 현실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 


1980년대 민중미술과 함께 민중목판화운동이 시대적 이념을 견인했던 사실은 알려진 대로이다. 아마도 소통의 매개체로서의 목판화가 정점을 찍었던 시기로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후 첨예한 이념대립의 시대를 지나쳐온 지금에는 당시의 민중목판화운동을 견인했던 목판 화가들의 정체성도 덩달아 변했다. 그 대략을 보면 삶의 터전으로서의 환경에 그 맥이 닿아 있는 생태주의와 지역주의에 대한 관심(류연복, 홍선웅, 김억의 기행목판화, 김준권의 수묵목판화, 정비파의 태백산맥)과 함께, 전통적인 민화를 차용해 현대적인 어법으로 각색한 민화풍의 목판화(오경영), 삶의 성찰에서 유래한 경구를 축약된 표현과 문기(文氣)가 있는 화면에 실어낸 선불교적 목판화(이철수), 그리고 삶에의 쓰임새에 주목한 장서표(남궁산) 등 여러 생활미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개는 생태주의와 기행 목판화가 변주된 주제의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여기에 특이한 것은 한국화 베이스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의 목판화들인데, 이상국, 유근택, 강경구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목판화도 선 위주고 한국화도 선 위주다. 여백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동일하다. 여기에 먹과 한지를 주요 재료로서 공유하고 있는 것도 같다. 차이점으로 치자면 붓이 칼을 대신하고 칼이 붓을 대체하는 것이 다르다. 붓질처럼 칼질을 하고 칼처럼 붓을 사용한다고나 할까. 형식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서로 부합하는 면이 많다. 

칼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목판화에서 칼은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목판화에서 칼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앞서 살핀 것처럼 정원철과 박영근의 초소형 핸드드릴을 들 수가 있겠고, 임영길의 레이저커팅이나 정상곤의 프로토에칭(과정상 동판이 아닌 목판화에도 적용 가능한) 그리고 안정민의 예가 주목된다. 이 가운데 베니어합판에 주걱 칼로 찍어 내리듯(조각칼로 떠내는 식의 일반적인 목판화법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제작한 안정민의 목판화는 내적 파토스의 가감 없는 표출과 함께 남성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그런가하면 목판에 이미지를 새긴 후 실리콘패드로 떠내기도 하는데, 실리콘을 겹겹이 발라 일정한 두께를 갖는 투명한 패드를 얻는 식이다. 마치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살갗 혹은 피부를 보는 것 같은 실리콘 작업은 베니어합판 작업에 비해 한결 섬세하고 부드럽고 은근한 여성적 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근작에선 약물을 이용해 야생화나 야생초를 투명한 화면에 붙였다가 도로 떼 내는 방식으로 그 흔적을 인출하는데, 콜라그래프(오브제 고유의 질감을 얻는) 기법을 확장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에 성 담론을 테마로 한 설치작업 또한 주목되는데, 현실주의 미학을 실천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실로 형식과 내용과 감각의 스펙트럼을 폭넓게 소화해내는 작가의 역량이 읽혀지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정상곤의 프로토에칭은 비록 동판화로 제작된 것이지만, 사실은 목판에도 적용할 수 있다. 컴퓨터에 새기고 싶은 이미지 값을 입력하면 프린트가 대신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판법(작가가 직접 판을 만드는)과는 다르다. 작가는 진작부터 컴퓨터를 판화에 도입해왔는데, 흔히 그렇듯 아날로그 방식을 디지털 방식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아날로그 쪽으로 수렴해 들이는 식의 일종의 역 확장 방식이 흥미롭다. 중요한 건 디지털의 완벽한 기술적 구현이나 실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의 기술은 당연히 전문가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 중요한 건 기술의 인간화(인간적인 기술)에 대한 형식실험이 될 것이다. 디지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판화의 표현 영역을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가와 관련해서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특히 <도깨비>연작을 제작하면서 임영길이 도입한 레이저커팅 기법 또한 칼의 확장과 관련해 의미 있는 시도를 예시해준다고 볼 수가 있겠다. 


이외에도 김상구(특유의 화면구성과 서정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배남경(빛 혹은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은 색감과 질감으로 오랜 시간과 희미해진 기억을 환기시키는), 이경희(국내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우드인그레이브를 통해 정치한 묘사와 함께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홍인숙(먹지에 대고 그린 그림을 통해 프린트의 개념이며 방법론을 확장시킨), 윤여걸(회화로 치자면 김보중의 순례자에 해당할 숲 사람을 통해 신화적인 서사 가능성을 연), 이승일(프로타주와 한지탁본), 이혜영(페이퍼캐스트)의 작업이 각각 목판화에서 파생되거나 목판화를 확장하는 과정을 통해 뚜렷한 자기형식에 이른 경우로서 주목된다. 그 외에 많은 작가들이 있을 것이지만,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전형적인 경우를 예시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목판화는 무엇보다도 미디어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차가운 미디어와 뜨거운 미디어로 구분했지만, 아무래도 미디어가 진정한 자기표현을 얻는 것은 사회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할 때이다. 앞으로도 80년대와 같은 그런 격렬한 시기는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빈자리를 대개는 생태주의 미학이 차지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목판화가 사회와 상호 호흡할 수 있는 구실을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목판화는 재차 진정한 미디어로서 개화할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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