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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석,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고충환


 

매스미디어를 보면 곧잘 정치인들이 민의를 살피기 위해 일일택시운전사를 자청하는 프로를 볼 수가 있다. 원래 암행과 잠행의 형식으로 수행되던 것이 공공연한 보여주기 식 행정이나 정치 쇼, 이미지 정치학과 코스프레로 변질된 감이 없지 않지만, 여하튼. 그런가하면 아예 택시드라이버를 소재로 한 영화도 있다(택시운전사로 분한 로버트 드니로가 거울을 보면서 자기강박에 사로잡혀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이런 영화며 행태가 작가 홍원석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작가는 삼 대째 택시를 몬다. 할아버지가 택시를 몰았고 아버지가 택시를 몰았다. 그리고 지금 작가는 아트택시를 몬다. 아트택시? 택시를 몰면서 아트를 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택시를 모는 행위 자체가 아트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일종의 행위예술로 보면 되겠다. 택시를 몰면서 아트를 실천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대화한다는 것이며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개인사)이며, 자신의 가족과 혹은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가족사)이며, 승객과 대화하는 것(보편사)이다. 실제로 작가의 작업에서 이런 대화며 이야기는 대개 인터뷰와 기록의 형식을 빌린 영상작업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아트를 실천하는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개인사가 가족사로 그리고 재차 보편사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상호작용하고 순환하는 것임을 증언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 과정에서 택시를 모는 행위는 상호소통을 위한 매개 역할을 하며, 택시 자체는 삶을 들여다보는(삶의 서사를 듣는) 프리즘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택시를 모는 행위나 대화행위 자체가 대개 사적행위보다는 공적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커뮤니티아트에도 맞물린다. 때로 대화를 통해 기꺼이 승객의 입장에 서보기도 하고 승객의 입장에 공감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보면 역할극에도 맞물린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택시를 매개로, 직접 택시를 몰면서 대화하는 행위를 계기로 삶의 예술(현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이든 연출에 의한 것이든 작가의 작업 특히 영상작업에서 삶과 예술은 구분되지가 않는다)을 실천하고, 커뮤니티아트와 커뮤니케이션아트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다름 아닌 소통의 기술(여기서 창작주체는 소통의 계기를 여는 매개자 혹은 중재자로서 나타난다)이며 서사의 기술(여기서 창작주체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 혹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으로서 현상한다)임을 증언해준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택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대대로 택시를 몰았을 뿐 아니라 여기에 군 복무 시절 앰뷸런스를 운전했던 경험이 더해져 작가에겐 택시를 모는 것(택시를 소재로 취한 것, 택시를 매개로 아트를 실천하는 것)이 친숙하고 자연스럽다. 작가의 작업에서 택시는 세상을 보는 프리즘이라고 했다. 그 프리즘을 통해 보이고 들리는 서사는 그대로 삶의 서사에 해당하며, 여기서 삶의 서사는 대개 그렇듯 황금시간대 뉴스를 방불케 하는,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진단을 무색하게 만드는 온갖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점철된다. 스펙터클소사이어티의 압축된 형식을 예시해준다고나 할까. 그 사건, 그 서사 자체는 객관적이지만 사실은 작가 자신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 즉 세계관이며 사회에 대한 관념 그리고 존재론을 반영하고 강조하기 위해 작가에 의해 선택되고 각색된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작가에게 그림은 세계를 비추고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로써 작가는 리얼리즘미학의 핵심논리에 해당하는 거울이론 혹은 반영이론을 실천하는 것이며, 여기서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는 리얼리스트(시대를 보는 눈)임이 드러난다. 이제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작가의 그림에서 확인되는 시간대는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인 한밤중으로, 그리고 이따금씩 어스름한 새벽녘으로 설정된다. 헤드라이트 불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택시의 존재 자체를 부각한다는 형식적인 이점이 없지 않지만, 이보다는 밤 자체가 갖는 상징적 의미(차라리 시대적 알레고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밤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 수가 없고, 은폐하고 싶은 치부며 거래를 가려준다. 그렇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실제로서보다는 심정적으로 더 그런)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곧잘 길을 잃는다. 길을 잃어서 잃는 것이 아니라 정처가 없고 오갈 데가 없어서 길을 잃는다. 현대는 상실의 시대며 증후군의 시대다. 상실감이 현실에 대한 진단(혹은 징후)이라고 한다면, 증후군은 그 상실감에 따른 증상이다. 이런 증상 가운데 결정장애증후군이 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간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는 것이 혹은 가지 않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한다. 심지어 생존이 걸려 있는 데도 그렇다. 그렇게 어스름한 새벽녘에 혹은 칠흑 같은 한밤중에 헤드라이트 불빛에 비켜 서 있는 우리 모두가 어쩜 결정장애증후군에 걸린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에서 칠흑 같은 어둠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실은 같이 같다. 굳이 어둠 속이 아닐 때도 그렇다. 이를테면 한강을 건너고 낙동강을 건너는 택시가 그렇다. 일부러 물속으로 몰아가거나 뛰어든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물 한가운데서 그리고 진흙탕 한가운데서 그리고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택시를 통해 그리고 어쩌면 길 없는 길을 가는 택시를 통해 작가는 오도 가도 못하는 현실을 그리고 길 없는 길에 갇힌 현실을 풍자한다. 이런 현실이 불안하고 낯선 건 당연한 일이다. 작가는 이런 낯선 현실을 일련의 시리즈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데, 이 그림들에는 곧잘 낯선 현실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등장한다. 외계인 자체로서보다는 낯선 현실을 대하는 작가 자신의 당혹감을 표현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런가하면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소년에게도(용산 미스터리) 방파제 위에 서서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소녀에게도 현실이 낯선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게 소위 잉여인간이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리는 비정한 현실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암울한 현실을 증명하고 재확인시켜주는 현장이 택시의 헤드라이트불빛에 포착된다.



이처럼 작가는 낯선 현실을 그린다. 사실은 낯설지 않은 현실(캐니)이 어둠 속에 숨겨놓고 있는 낯선 현실(언캐니)을 그리는데,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에 연동되고 프로이트의 언캐니에 연장된다. 여기서 친근한 현실은 그 이면에 낯선 현실을, 캐니는 언캐니를 각각 은폐시킨다. 작가의 낯설게 하기는 말하자면 그렇게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고 폭로하기 위해 일종의 이면읽기며 행간읽기를 실행하고 실천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 눈(택시의 헤드라이트불빛으로 대리되는 시대를 보는 작가의 눈)에 싱크 홀이 포착된다. 여차하면 택시를 삼킬 것 같은 싱크 홀 역시 싱크 홀 자체로서보다는 왠지 사회를 위협하고 존재를 위험에 빠트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에 대한 시대적 알레고리로 보면 되겠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 알레고리를 샷이라고 부른다. 샷은 알다시피 골프에서 온 말이다.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해 부조리한 현실을 강조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의미론적으로 극(골프 홀)과 극(싱크 홀)을 결합시켜 불합리한 현실을 강화하는 것에서 급진적인 읽기(독해)가 감지된다.

그렇게 택시 드라이버로서의 작가의 눈에 비친 현실은 낯설다. 그리고 그렇게 칠흑 같은 한밤중을 질주하면서, 그리고 더러는 어스름한 새벽녘을 건너면서 시대적 서사를 보고 현실적 서사를 듣는다. 현실을 목격하고 변방의 삶을 기록한다. 죽음충동에 사로잡힌 현실을 증언하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알레고리를 증명한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그림의 경계를 넘어 설치로, 영상설치작업으로, 커뮤니티아트를 실천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주로 아트택시 프로젝트와 길에 대한 메타포로 귀결된다. 서두에서 살핀 것처럼 아트택시프로젝트는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르포와 다큐,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매개, 연출과 각색 그리고 팩션이 상호작용하는 접점에서 소통의 계기를 여는 것.

그리고 길에 대해서는 작가가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이보다는 설치작업에서 그 흥미로운 사례가 확인된다. 이를테면 긴 각목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그리고 각목과 각목을 노란 비닐테이프로 싸서 고정시켜놓은, 그 위에는 흰 부직포로 싼 패널을 얹어놓은, 아니면 판목들을 하나로 엮어서 무슨 울타리처럼 짜놓은, 흡사 부실공사 현장을 방불케 하는 설치작업을 작가는 길이라고 명명해놓고 있다. 길은 길이되 길 없는 길이며, 뚝뚝 끊어지는 길이며, 막다른 길이며, 마구 얽혀있는 길이며, 다람쥐 채 바퀴 돌듯 자꾸만 원점으로 되돌려지는 길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반복의 덫에 갇힌 닫힌 길이다. 삶에 대한 메타포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길은 가장 결정적인 경우라고 할 수가 있다. 오죽하면 로드무비라는 영화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다. 삶은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길에 대한, 그러므로 삶에 대한 작가의 진단은 암울하다. 그리고 그 진단은 사실을 알고 보면 우리 모두의 현실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어서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미술을 하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미술에 대한 작가의 입장과 태도 그리고 정의를 표명한 것일 터이다. 사실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예술의 전제이며 지향이기도 하다. 커뮤니케이션아트가 그렇고 소통미학이 그렇다. 그럼에도 유독 커뮤니케이션을 발췌하고 강조한 것은 작가의 작업이 예술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며 실천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임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 과정에서 택시가 호출되고 길이 호명된다. 그 길은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인 암울한 길이며, 알 수 없는 행성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눈에 비친 낯선 길이며, 마구 끊겨있는 막다른 길이며, 마구 얽혀있는 종잡을 수 없는 길이며, 무엇보다도 길 없는 길이다. 그렇게 작가는 길 없는 길에 서 있고, 우리 모두는 지금여기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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