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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섭/ 자연의 기억, 자연의 흔적을 인출하다

고충환


작가 한영섭은 1941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났다. 이후 6.25를 전후해 남하한 작가는 1960년대 초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대학 1학년 재학 당시 이미 작가는 국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는데, 연신 기차가 들고 나는 <서울역 부근>(1961) 정경을 역동적이면서도 암시적인 인상파풍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켄트지에 수채로 그린 당시 작품을 두고 언론은 비록 특선에 그쳤지만 실제로는 최고상 감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가 진즉에 회화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 났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향후 작가의 그림이 망향 곧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정조준하게 될 것임을 예감케 한다. 기차 자체가 이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이후 자연에 대한 그리움, 자연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주될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지금은 개인전이 일반적이지만, 당시만 해도 개인전보다는 동인활동이 활발한 시절이었고 담론생산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다. 아카데미 풍의 구상미술이 국전을 장악하면서 소위 제도권 미술로 자리매김했던 시기였고, 이에 대한 대항논리로서 추상미술의 세력화를 주도했던 것도 이런 동인활동에 의해서였다. 한마디로 추상미술이 한국현대미술을 선도한다는 소명의식으로 팽배했던 분위기였다. 작가 역시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일군의 추상미술 작가들과 함께 논꼴동인을 창립한다. 당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창립된 동인들을 보면 대개 외국어 표기가 많았는데(예컨대 그룹 악튀엘이나 오리진 같은), 순 우리말로 동인명을 정한 것도 이색적이고, 여기에 한국 최초의 미술 동인지 논꼴아트(1965)를 발간한 것도 남달랐다. 아마도 수입이 아닌 토종 추상미술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고, 그 고민은 그대로 자생성과 주체성 논의로 이어졌을 것이다. 참고로 논꼴에서 논은 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땅과 흙과 대지를 의미하며, 나아가 자연과 체질을 의미하고, 우리 식의 생활철학과 생활감정이 우러나는 바탕을 의미하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 바탕을 자연의 본성에서 찾는데, 그 본성을 찾기까지 일정한 과도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거친다. 이 시기의 회화경향을 각각 <단청과 콩크리트>(1969), 그리고 <관계>(1985)에서 엿볼 수가 있다. 작가는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단청과 콩크리트>에서 화려한 원색이 어우러진 단청과 무미건조한 회색도시를 상징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대비시켰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작가는 흔히 한민족은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오방색이나 단청에서 보듯 이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화려한 원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담았다고 한다. 작가의 이 생각은 그대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무희들의 의복에 나타난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인 패턴에서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을 찾는 미술사적 경향과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한영섭_한지에 탁본(1)

한영섭_한지에 탁본(2)


그리고 <관계>는 자연석의 표면에 탁본한 설치작업으로서 이후 한지를 이용한 본격적인 탁본 작업으로 넘어가기 이전의 과정을 이해하게 해준다. 당시 작가는 자연 그대로의 질감과 물성을 탐구하기 위해 나무와 돌 위에 직접 탁본을 실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탁본인가. 탁본은 작가에게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작가는 탁본을 통해 자연의 질감과 물성을 떠낸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의 본성을 떠낸다. 작가의 회화적 의식은 시종 자연의 그러므로 존재의 바탕이며 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탁본에서 그 바탕이며 본 그대로를 인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자연 그러므로 존재 자체가 스스로의 본성을 실현하도록 돕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참고로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청색과 적색이 대비되는 것이 남북관계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실제로도 <관계>라는 제목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이데올로기적 해석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의 해석 역시 가능하고,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일관성과 연관해볼 때 어쩌면 그 해석이 더 중요하고 결정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 자체와 탁본된 자연 혹은 인출된 자연과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고, 그 관계는 그대로 자연 자체와 자연의 개념(개념화된 자연)과의 관계(그러므로 의미론적인 층위에서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작가의 작업은 본격적인 한지를 이용한 탁본 작업에 이르고, 향후 지금까지 변주 심화되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작가는 한지 이전에 자연석의 표면에 탁본했었고, 나무의 표면질감을 탁본으로 인출했었다. 이번에도 여전히 자연이 소재로서 등장하지만, 그 소재며 방법이 더 섬세해졌고 치밀해졌다. 아마도 오랜 실험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전과는 다른 결정적인 뭔가를 발견했을 것이고, 이로써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며 아이덴티티에 부합하는 형식 가능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이렇다. 추수가 끝나 바싹 마른 들깨줄기다발이나 옥수숫대를 발로 지그시 밟으면 조직이 부드럽게 으깨진다(물론 이외에 싸릿대와 같은 다른 자연소재도 있을 것이지만, 대개는). 그렇게 적당히 거칠면서 부드러운 원하는 조직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다 한지를 덮는다. 그리고 먹을 묻힌 솔(때로 바랜)로 한지를 문질러 표면질감을 얻는다. 이때 재료의 종류 여하에 따라서, 조직의 거칠고 부드러운 그리고 균질하고 불규칙한 정도 여하에 따라서, 솔에 묻힌 먹의 농담 여하에 따라서, 솔 자체의 뻣뻣하고 부드러운 강도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여기에 한지 자체의 다양한 두께며 재질감이 더해지면서 다채로운 표정의 표면질감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얻어진 종잇조각을 큰 화면에다가 붙여나가는데, 인출된 화면이 전면을 보도록 붙여 거친 질감을 그리고 배채법에서처럼 뒤집어 붙여 은근한 질감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붙여진 전체화면을 봐가며 최종적으로 가필해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본적으로 탁본과 콜라주를 주요 방법론으로서 취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단순한 탁본이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다양한 표정의 표면질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인데, 때로 여기에 우연성이 개입되면서 표면질감은 더 변화무상해진다. 전체적인 혹은 대략적인 과정은 계획하고 의도하고 조절할 수 있지만, 정작 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은 철저하게 우연적이고 가변적이고 예측할 수가 없다. 그래서 똑같은 탁본의 과정을 거친 것이지만 정작 똑같은 패턴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매번 일회적이고 매순간 다른 표정이 인출된다. 그게 뭔가. 그렇게 매번 일회적이고 매순간 다른 표정으로 인출되는 것이 뭔가. 그렇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뭔가. 자연이다. 자연의 본성이다. 자연은 흐른다. 자연은 얼핏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 순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다만 한 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머무는 법이 없다. 매순간 변화하고 생성하고 소멸하고 부패하고 재생하고 이행하는 운동의 연속이 있을 뿐이고,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건너가는 연장된 순간들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반복 속의 차이라고나 할까. 


작가의 작업에서는 자연의 본성이 인출된다고 했다. 단순한 탁본이지만, 희한하게도 자연이 연상된다. 추수가 끝나 텅 빈 들판이 연상되고, 겹겹이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이는 바다가 연상되고, 잔잔한 수면에 마른 갈대가 흔들리는 호수가 연상되고, 턱턱 갈라진 논밭이 연상되고, 그 위로 노을이 드리워진 갈아엎은 토지가 연상된다. 자연을 탁본한 것이므로 이로부터 자연의 본성이 인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바다를 탁본한 것이 아닌데도 그렇고, 호수를 떠낸 것이 아닌데도 그렇다. 무슨 말인가. 자연은 모조리 한 덩어리로 통한다. 그게 뭐든 자연은 한 몸이고 하나의 유기체이며 생명이다. 그래서 다만 자연인 한 그게 뭐든 하나로 통한다. 이는 결코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작가의 화면에서 연상되고 발견되는 것들이다.

 
도대체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작가는 자연을 탁본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자연의 본성을 감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바람, 숨결, 대기, 습기, 공기, 안개, 빛, 어둠, 그림자, 에너지, 기운, 파장, 파동, 미동, 소리, 기미, 분위기와 같은 자연의 본성과 더불어서 호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건 알고 보면 망향의식의 소산이었다. 내면을 파고들어 무의식으로 각인될 만큼, 물과 아가 일체될 만큼, 그 사이가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세계와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지극한 그리움의 산물이었다. 이런 지극한 그리움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흐르는 강물을, 수면에 일렁이는 빛 조각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망향의식은 상실의식이기도 하다. 결핍의식이며 결여의식이기도 하다. 결핍의식이 그리움을 지극하게 만들고, 지극한 그리움이 세계를 불러오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소위 한지조형작가로 분류되면서도 단순한 한지조형작업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다른 한지조형작업을 보여주고, 단색화 작가로 범주화되면서도 그저 단색화로 한정되지는 않는 다른 단색화를 예시해준다. 탁본은 평범한 것이지만, 탁본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을 연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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