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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곤, 표면과 깊이가 상호작용하는 풍경

고충환


완제품에 앞서 시제품으로 만들어보는 모델을 프로토타입이라고 한다. 보통은 3D 프린트를 이용해 모델을 만드는데, 같은 원리를 2차원 패널에 적용해 전자기기 부품에 필요한 기판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원리 그대로 판화에 원용한 것이 프로토타입 혹은 프로토에칭이다. 정상곤은 근작에서 이런 프로토에칭 기법을 원용한 일련의 동판화를 제작해 보인다. 보통 판화는 판 제작과정에서부터 작가가 일일이 수공으로 판을 만들기 마련인데, 프린트가 판을 대신 만들어주는 점이 다르다. 이미지의 크기와 복잡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하나의 이미지가 새겨진 판을 얻기 위해서 하루가 꼬박 걸리거나 이틀 이상이 경과될 때도 있다. 이 기계적인 공정을 거치고 나면 최초 원본의 입력된 값 그대로 이미지로 새겨진 동판을 얻을 수가 있다. 보통은 이렇게 얻어진 동판을 프린트해 동판화를 제작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의 판화는 상식적인가. 비록 최초 원본을 입력한 것은 작가이지만, 이외에 일체의 공정을 프린트가 대신해준 기계적인 산물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어떻게 그렇지가 않은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작가는 진즉에 디지털 매체며 방법론을 도입해 판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해왔는데, 특이한 것은 매번 아날로그를 디지털 쪽으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아날로그 쪽으로 수렴해 들이는 식의 확장(역확장?), 아날로그 쪽에서 보자면 디지털을 아날로그의 일부로서 포함하는 식의 내포적인 확장을 꾀해왔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하이테크놀로지보다는 로우테크놀로지에 창작주체의 관심이 쏠려있는 일부 의미 있는 테크놀로지아트의 현상이며 생리에도 부합한다. 테크놀로지 자체의 기술적인 구현과 완성도보다는 테크놀로지와 존재(혹은 실재)와의 관계를 묻는 인문학적 실험을 위한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근작 역시 예외는 아닌데 작가는 기계적인 과정을 공정의 일부로서 도입하지만, 여기에 작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해 기계적인 과정이 원활히 수행되지 못하게 방해한다. 방해한다? 작가 식의 표현대로라면 흔들어놓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해하고 어떻게 흔들어놓는가. 알다시피 기계는 최초 원본의 입력된 값 그대로를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작가는 이 기계적인 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최초의 입력 값에는 없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로 원본에는 없는 라인을 만든다. 이를테면 입력된 값 중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오가는 직선거리를 반복 수행하게 조작함으로써 인위적인 선을 얻는 식이다. 그리고 여기에 트리밍의 과정이 부가된다. 원하는 부분을 강조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지워 없애는 것인데, 때로 여기에 흔들리고 겹쳐 보이는 이미지를 부가하거나 아예 판에 새겨진 이미지 자체를 사포로 지우기조차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면서 최소한의 흔적이며 얼룩을 남긴다.


그렇다면 그렇게 남겨진 흔적이며 얼룩은 뭘 말해주는가. 작가에게 지우기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우면서 드러내고 지움으로서 비로소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은 뭔가. 존재증명? 원본에 대한?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부터 원본이 유래한 것에 대한?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대한? 아예 처음부터 원본 같은 것은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작가가 원본으로 차용한 정보적 사실, 이를테면 창덕궁 정경과 그 일부인 그 수령이 500년도 더 된 한 쌍의 회화나무는 화면에서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감각적 실재로서 존재하는가. 정보적 사실과 감각적 실재는 동일시될 수가 있는가. 작가의 작업은 감각적 실재 자체보다는 정보적 사실로 화해진 감각적 실재를 재현하는 쪽에 방점이 찍힌다. 여기서 지우기는 결정적인데, 다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이고(표면적인 이미지, 특정 주제를 강조하는 이미지, 선동하는 이미지, 유혹하는 이미지를 폭로하기 위한) 개념적인 이유(사람들은 결코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그 이면에,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한) 때문에 그렇고, 때로 여기에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이유(물질적인 이미지, 질료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혹은 정보적 사실로부터 감각적 실재를 구제하고 복원하기 위한) 때문에 그렇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친 작가의 작업은 정보로 화해진 원본 이미지를 얼추 어림잡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입견에 의해서 겨우 회화나무와 숲과 기와집 정도를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접하는 이미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들은 사실은 많은 경우에 한갓 정보며 개념이며 선입견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작업은 그리기와 지우기, 드러내기와 숨기기, 기계적인 과정과(건축설계도면 혹은 청사진을 연상시키는) 아날로그적인 과정이(감각적 실제를 비켜가는 드로잉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스크래치) 상호작용하면서 특유의 물성을 부각한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여하한 경우에도 실재 자체며 존재 전체를 인식(그리고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의 인정일 수 있고, 흔적과 얼룩과 그리고 특히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다만 암시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의 주지일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암시되는 현실 말하자면 세계가 화면 속에서 재구조화되는 지각적(혹은 회화적) 현실을 제안한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감각적 실재가 정보적 사실로 화해지면서 누락된 것들, 이를테면 바람과 공기, 흔들림과 머뭇거림, 첨부되고 첨삭된 것, 이행과 생기와 같은 자연과 주체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것들의 오롯한 복원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동판화와 함께 석판화를 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의미작용 역시 크게 다르지가 않다. 이를테면 집에서 키우는 화초를 볕이 잘 드는 마당 한쪽에다 내놓는다. 그러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햇볕의 기울기가 달라짐에 따라서 그림자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그림자, 짙은 그림자와 엷어진 그림자, 중첩되고 포개진 그림자, 그 자체 시간의 추이며 경과를 증명하는 그림자를 얻는다. 동판화 작업이 감각적 실재가 정보적 사실로 화해지면서 누락된 물성을 복원하는 것에 바쳐졌듯, 석판화 작업에서 감각적 실재가 추상적 실재로(실루엣) 화해지면서 탈락된 시간을 복원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실재의 궤적을 복원한다. 그렇게 복원된 궤적을 그저 무분별해 보이는 붓질과 구별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실재는 진정 복원된 것인가. 시간을 복원하고 바람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감각적 실재와 정보적 사실, 감각적 실재와 추상적 실재와의 관계를 묻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삭제되고 덧붙여진 것들, 실재 자체와 주체에게서 실재 쪽으로 건너간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묻는다.

 

작가가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에 부친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대략 다시 읽는 풍경, 피부의 깊이, 풍경처럼, 그리고 결핍의 풍경 정도로 정리할 수가 있겠다. 하나같이 풍경들이다. 예외적인 경우로 피부의 깊이를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그러나 여기서 피부란 주체가 풍경과 만나지는 주체의 표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경우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피부의 깊이란 풍경의 깊이에 그리고 특히 표면의 깊이에 다름 아니다. 모든 표면은 깊이를 가지고 있다. 표면은 그저 표면이 아닌, 깊이가 자기를 밀어올린 것이다. 정보적 사실은 감각적 실재가 자기를 밀어올린 것이고, 그렇게 그림자에는 감각적 실재가 함축돼 있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런 표면과 깊이와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표면을 통해서 표면을 그리고 깊이를 통해서 깊이를 이야기하기는 쉽다(미시담론과 거대서사에서처럼 양분된 담론의 지형도가 흔히 그렇듯).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표면을 통해서 깊이를, 정보적 사실을 통해서 감각적 실재를, 추상적 실재(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평면을 통해서 움직이는 것을, 정지(혹은 순간)를 통해서 시간을 이야기하기란 쉽지가 않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남다른 의미가 있고 예사롭지 않음이 있다. 다시, 작가의 작업은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을 아날로그 쪽으로 역확장한다. 세계를 기호화하는 것이 디지털의 기획이라고 이해한다면, 세계를 개념화하는 것(인식작용)에 이미 디지털은 예고되고 있었다.


여기서 풍경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세계가 개념화되고 기호화되는 과정에서 누락된 실재를 복원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풍경은 기호와 개념이 파열되면서 그 틈새로 자기를 밀어올린 실재의 살(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이 전개되는 지평이다. 그렇게 작가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풍경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실재의 꼴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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