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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임,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미지극장

고충환

공항 대합실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공항에서 통관절차를 밟고 있는 사람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뭔가를 찾아 기웃거리는 사람들, 서성대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저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 등을 보이고 있어서 혹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는 사람들, 머리가 화면 밖으로 잘려나간 사람들. 


장수임_ lansdowne station_2016 


장수임_ prince of whales_2016



장수임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뭘 기다리고 누구를 기다리는가. 여기서 작가는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을 본다.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후예들을 본다. 극에서 고도는 극이 끝날 때까지 끝내 밝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뭔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다린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걸 그만 둘 수도 없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현실이 되고 당위가 되고 신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부조리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기다리지만, 그럼에도 끝내 유토피아는 오지 않는다. 더욱이 유토피아 같은 건 없다(유토피아는 탈장소이며 부재하는 장소, 없는 장소란 말이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논리에 대한,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말하자면 현대인의 징후이며 증상이 되었다.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정주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행하는 사람들, 부유하는 사람들, 떠도는 사람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해 작가는 이런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을, 그 시대적 알레고리를 그려 보인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는 사람들 위로 이러저런 도시의 아이콘들이 오버랩 된다. 환불창구와 환승창구를 안내하는 표시, 화장실 표시, 방향을 인도하는 화살표, 빨갛게 점등된 비행기 이착륙 시간표, 패스트푸드점 입간판과 로고, 위험 혹은 경고 표지판, 디즈니랜드 리조트 티켓, 붙였다 떼어낸 포장용 테이프의 흔적, 바코드 기호, 찢어지고 구겨진 벽보 위의 희미해진 텍스트, 그 실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들, 그리고 관련사항은 안내실에 문의해주세요, 와 같은 문자들이다. 이 문자며 숫자며 기호들은 다 뭔가. 사람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장치들이다. 사람들 간의 소통을 매개해주면서, 동시에 사람들에 대한 제도의 감시와 통제를 매개해주는 장치들이다. 언어의 양가성이다. 그 장치(언어)가 없으면 소통할 수가 없지만, 동시에 그 장치로 인해 나는 제도에 예속된다. 이런 제도적 인간, 사회적 인간을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라고 부른다. 나는 언제나 어떤 세계, 즉 이미 언어로 구조화된 세계, 제도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나는 언제나 이미 사회적인 존재이며 제도적인 존재인 채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도시적 아이콘을 매개로 작가는 이처럼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존재를, 그리고 그 제도 속에 개인이 함몰되는 익명적인 주체(작가의 그림 중 특히 등을 보이고 있거나 다른 사람 혹은 사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머리가 화면 밖으로 잘려나간 사람들과 최소한의 실루엣으로만 겨우 알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강조되는)를 그려 보인다. 


작가의 그림에선 이처럼 기다리는 사람들 위로 도시의 아이콘이 중첩되고, 익명적인 주체들 위로 제도적 장치(때론 정작 사람들보다도 더 뚜렷한 실체감으로 다가오는)가 포개진다. 중첩된다? 포개진다?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유리창을 통해 본 정경을 그린 것이다. 유리창을 통해 비쳐 보이는 정경, 유리창 표면에 반사된 정경, 유리창 표면에 부착되거나 프린트 된 정경(기호나 문자와 같은)과 같은 현실의 다양한 지층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보이는 정경을 재현한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보이지 않는 벽(아님 보이는 벽?)에 해당할 유리창이 매개가 된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고 유리창에 비쳐 보이는 현실이다. 현실이라고는 했지만, 여기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실체도 현실도 없다. 다만 실체의 반영이며 반영된 현실이 있을 뿐. 다만 무슨 스크린처럼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들, 임의적이고 잠정적인 이미지들, 정주하지 않는 이미지들, 부유하는 이미지들, 이행하는 이미지들, 덧없는 이미지들, 머잖아 다른 이미지로 대체될 이미지들, 그래서 현재의 실체감마저 의심스런 이미지들이 있을 뿐. 

작가는 이처럼 실체감이 희박한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채집한다. 그리고 채집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엄밀하게는 최초 사진으로 채집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종래에는 실체감이 희박한 이미지를 얻는다. 그 과정에서 사진 이미지와 연필로 재현한 이미지, 드로잉과 스캔 이미지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층위로 중첩되고 포개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디지털프린트로 출력하는데, 한지를 이용해 부드러운 색감이며 질감을 얻는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도시적인, 일상적인, 익명적인, 그리고 현대적인 삶의 전형성으로 나타난 주제의식을 부각하고 강조한다. 재구성 곧 일종의 콜라주를 통해서 다중적인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현대인의 삶의 구조를 부각하고, 사진과 스캐너와 디지털프린트를 매개로 도시적인 삶의 질감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작가의 작업에서 현실은 표면적인, 표피적인, 스치는, 흐르는, 부유하는 이미지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조합으로 대체된다.  
 
작가의 작업에서 현실은 이미지로 대체된다고 했다. 그런 만큼 이미지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겠다. 여기서 이미지 자체는 현실이 아니다. 다만 현실을 반영할 뿐. 때로 이미지를 현실인 양 착각하는 것은 이처럼 반영된 현실을 현실과 동일시하는 인식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도 믿을 것이 못된다. 때로 인식도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다. 현실과의 영락없는 닮은꼴(이미지의 재현능력) 때문이겠지만, 여하튼 이런 닮은꼴을 매개로 이미지는 반영된 현실을 현실로 믿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미혹하는 이미지이며 유혹하는 이미지이다. 미혹하고 유혹하는 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숙명이다. 
이미지의 어원에 해당하는 이마고는 원래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그림(화상)이며 조상(조각상)을 의미했다. 귀신을, 허상을, 허구를 의미했다(그러므로 이미지의 이면에는 귀신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로 치자면 현실을 대신하는 것 곧 현실의 대체를 의미했다. 존재와 부재의 관계를 적용해보자면 존재를 대신하는 것 곧 존재의 대리를 의미했다. 그래서 어쩜 이미지의 욕망은 현실과 비현실(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넘나들고 지우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론 아예 현실(존재)을 비현실(부재)로 대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장자와 나비,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자몽이 가슴에 와 닿고, 가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설득력을 얻을 수가 있었고, 진실을 대신해 이미지정치학이 득세할 수가 있었다(사람들은 아무도 진실에 관심이 없고 현실에 관심이 없다. 다만 이미지가 결정적일 뿐). 그리고 그렇게 어쩌면 우리 모두는 꿈과 현실이 포개지고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비 혹은 탈현실을 이미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면적인 이미지, 표피적인 이미지, 부유하는 이미지,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 그래서 궁극적으론 실체가 없는 이미지를 현실인 양 부여잡고 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현실이 아니면서 현실을 반영하는 이미지는 그래서 현실과의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 관계가 적나라하게 반영되고 전개되는 장이 유리창이다. 특히 도시의 전형이며 아이콘이랄 수 있는 쇼윈도는 흡사 그 관계가 상영되는 스크린에다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쇼윈도에는 거의 프레임이 모자라거나 무색할 정도의 온갖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미혹하는 이미지, 유혹하는 이미지, 표면적인 이미지, 표피적인 이미지, 부유하는 이미지,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 종래에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는 현실에서 건너간 것(반영된 것)들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동시에 사실은 알고 보면 실체가 없는 것들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잃는다. 이미지는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아픔도 없고 상처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미지 자체는 그 본성상 무색, 무취, 무감이다. 이 삼무를 사회학적 용어로 바꿔놓으면 익명성이 된다. 여기에 이미지는 심지어 해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이미지에 혹하는 것도 그리고 이미지 뒤에 숨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성을 획득하면서 잃는, 그리고 마찬가지 의미지만 현실성을 잃으면서 얻는 마치 만화경과도 같은 이미지극장이 상영되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 이미지극장에로 초대한다. 스크린을 대신한 유리창 위로 공항대합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상영되는, 일상이 상영되는, 도시에서의 삶의 질감(빛바랜 흑백사진이나 색 바랜 슬라이드필름을 보는 것 같은)이 상영되는. 스크린 위로 흐르는 영상은 현실이 아니다. 유리를 통해본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현실이 아닌 현실, 반영된 현실을 예시해준다(그래서 혹 현실은 한갓 이미지이며 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불현듯 떠올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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