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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민/ 자연은 어쩌면 몽환적인, 희박한, 하늘거리는 흔적일지도 모른다

고충환



그림에 성별이 따로 있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어떤 그림은 성별이 뚜렷한 편이고 최소한 암시적인 경우가 있다. 안정민의 목판화를 보면 여성적인 감수성보다는 남성적인 힘이 느껴져서 성별과 관련한 이런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의 목판화는 목판화와 관련한 선입견과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목판도 틀리고 칼도 틀리고 판법도 다르다. 이런 다른 판법으로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판화를 예시해주고 있고 덩달아 목판화의 표현 가능성을 넓혀놓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보통의 목판 대신 베니어합판을 판목으로 사용한다. 여기에 날이 주걱처럼 생긴 칼을 손아귀에 움켜잡고 사선으로 그어 내리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묘사한다. 합판은 가로와 세로가 교직되는 중층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 위에 칼을 대고 사선으로 그으면 흔히 그렇듯 목판의 부분이 떠내지면서 이미지가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결이 찢어지면서 이미지가 새김질 된다. 오랜 숙련을 통해 감을 잡을 수는 있지만 이때 결이 어떻게 얼마만큼 찢어질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가 없다. 칼이 지나가는 자리는 계획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칼이 지나가면서 찢어지는 자국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작가의 목판화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상호작용하고 묘사와 표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묘사가 표현을 부르고 표현이 묘사를 확장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목판화에는 물성이 강하고 마치 상처를 즉물적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마구 찢어진 자국이 여실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찢어진 자국이 주는 여실한 상처에, 마치 감정을 가감 없이 직접적으로 표출한 것 같은 질감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단색이나 최소한의 원색을 덧입혀 거칠고 강렬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준다. 판화이면서도 정작 회화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간접표현매체인 판화를 직접표현매체인 회화로 확장시켜놓고 있는 것.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목판과 칼을 도구로 한 전통적인 목판화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을 연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처음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에디션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보다는 찍어내기와 떠내기와 같은 판화의 본질(혹은 본성)을 매개로 자기표현을 확장시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작가의 작업을 판화의 장르 개념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과 입체와 설치 그리고 북아트로까지 확장시켜주었다. 판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판화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견고한 城, 견고한 性> 시리즈(2001-2003)에서 작가는 염화메틸(아크릴용제)을 이용해 투명하고 단단한 아크릴 판(더러 반구나 원통형의 아크릴판)에다가 오브제를 붙였다 도로 떼 내는 식의 작업을 시도한다. 그렇게 떼 내면 오브제(존재?)는 사라지고 다만 오브제의 흔적(존재의 흔적?)만 남는데, 이 프로세스 그대로 근작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작업에 동원된 오브제로는 각각 여성의 팬티를 통해 성소비사회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그리고 남성정장저고리를 통해 제도화된 인격과 권력문제를 풍자한 것이다. 판화의 본질로 치자면 찍어내기(오브제를 직접 찍어내는)를 통해 판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한 것이며, 판화를 매개로 사회적 이슈를 주제화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물론 예외적인 경우로서 민중목판화가 있지만, 이를 감안해보더라도 그렇다). 


찍어내기는 그렇다 치고 떠내기는 어떤가. 떠내기 곧 캐스팅 작업은 성을 소재로 한 작업 이후 일정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유래한 것이 일련의 실리콘캐스팅 작업이다. 주로 눈 덮인 도시의 고즈넉한 정경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폭포 등 일련의 풍경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원하는 이미지를 목판으로 제작한다. 그리고 그 형태 그대로 실리콘패드로 떠낸 것인데, 실제로는 실리콘을 겹겹이 발라 일정한 두께를 갖는 투명한 패드를 얻는 식이다. 
그렇게 제작된 작업들이 여전히 목판화에 의한 것이면서도 종전 목판화와는 그 분위기가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실리콘으로 떠낸 탓에 세부가 살아있고 섬세하다. 마치 반투명한 살갗(혹은 피부)의 이면에서 은근하게 내비치는 것 같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색감과 함께 촉각적인 성질마저 감지되는 편이다. 성별 얘기로 서두를 시작했지만, 베니어합판에 주걱 칼로 찍어 내리듯 제작한 목판화가 내적 파토스의 가감 없는 표출과 함께 남성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면, 실리콘패드로 떠낸 목판화는 한결 섬세하고 부드럽고 은근한 여성적(최소한 중성적인) 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실로 감각의 양 극단을 자유자재로 소화해내는 작가의 폭넓은 역량이 읽혀지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는다. 대략 2007년 즈음 파주 작업실에로의 이주를 계기로 자연주의 혹은 생태주의로 부를 만한 일련의 작업들에 천착하고 심취하게 된 것이다. 주제 면에서도 그렇고 소재 면에서도 그렇다. 주제와 소재가 서로 부합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업에는 달맞이꽃, 칸나, 민들레, 진달래, 개나리, 엉겅퀴, 부들, 억새, 씀바귀, 왕고들배기, 도라지꽃, 더덕, 할미꽃, 맨드라미, 갈대, 산국, 코스모스, 달뿌리풀, 망초, 강아지풀, 화해초, 사데풀, 수크렁, 부추꽃과 같은 더러는 이름마저 생소한 야생화와 잡초들 그리고 각종 풀씨들이, 거의 자연도감 내지 식물도감을 연상시키는 온갖 식물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작업은 주제와 소재가 서로 부합한다고 했다. 소재가 자연에서 건너온 것이라면 주제는 또한 어떻게 자연의 본성을 실천하고 자연주의와 생태주의를 실현하는가. 작가의 작업실 부근에는 자연이 더불어 있어서 작업 속에 자연의 본성이 스며든다. 이를테면 사계절에 대한 단상이며 계절감각과 같은. 그리고 작업실 인근에는 공동묘지로 유명한 용미리가 지척이어서 흡사 무덤을 머리에 이고 사는 꼴이다. 해서 그곳에서 보면 삶과 죽음이 넘나들어지고 존재의 있음과 없음이 교차된다. 무시로 그렇고 스스럼없이 그렇고 덧없이 그렇다. 자연이 그렇고 존재가 그렇고 내가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속에 생성에서 소멸로, 그리고 재차 소멸에서 생성으로 무한순환 반복 운동하는 자연의 섭리며 생리가 배어든다. 작가는 그 섭리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작은 한 계기에 지나지가 않는다. 작가의 작업 속엔 이런 자각 혹은 깨달음도 둥지를 튼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들을 <은골단심>이라고 부르는데, 예로부터 은이 많이 난 곳이라는 지명에서 얻은 이런 자각 혹은 깨달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작업으로 하여금 어떻게 그 자각이며 깨달음을 형상화하고 자연주의와 생태주의의 주제의식을 조형하는가. 일전에 성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작가는 아크릴 판에 오브제를 붙였다 도로 떼 내는 과정을 통해서 오브제의 흔적을 남겼었다. 이번에는 인공오브제 대신 자연오브제가 소재로서 차용된다. 투명 아크릴 판 또는 폴리카보네이트 판에 염화메틸을 이용해 더덕 도라지 등 잡초를 실체 그대로 붙였다가 도로 떼 내는 방식으로 그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과정이며 방법이 장난이 아니다. 작업에 비록 피는 없지만 피 말리는 작업이고, 노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지만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작가가 소재로서 차용한 잡초며 야생화란 것이 대개는 그 생긴 꼴이 여리고 섬세하고 미시적인 것들이다. 그 풀씨며 이파리 하나하나를 낱낱이 떼 내어 해체한 연후에 아크릴판에다가 그것들을 일일이 다시 붙여 원형 그대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과정에서 염화메틸을 주입한 유리주사기를 주사하면서 풀씨며 이파리가 잘 붙도록 손으로 눌러 압착시키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고착되고 나면 재차 그것들을 떼 내어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러저런 변수들이 생긴다. 말끔하게 제거돼 흔적만이 오롯해지기도 하지만 더러 풀씨나 털처럼 워낙 미세한 것들의 일부가 그대로 남겨지기도 하고, 꽃잎 같은 경우에는 아크릴판에 꽃잎 물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주사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여백에 액이 튀거나 흘러 예기치 못한 비정형의 얼룩을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그렇게 생긴 얼룩이며 자국을 조형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그래서 대개는 투명한 흔적이 여실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화사하게 핀 꽃무더기를 보는 것 같은 환상적인(환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론 오브제(실체)가 제거되고 오브제의 흔적(실체의 흔적)만 남는다. 결과적으로 보면 실체가 아닌 실체의 흔적에 목적이 있고, 존재가 아닌 존재의 흔적에 방점이 찍히는 작업이다. 그 흔적은 투명한 탓에 실체감이 희박한데, 빛을 받아 그림자를 만드는 순간 실체감은 오히려 뚜렷해진다. 흔적이 자기그림자와 실체감을 두고 다투는 일이 일어나고, 실체보다 흔적이 흔적보다 그림자가 더 또렷한 실체감을 얻는 일(역감각현상?)이 일어난다. 무슨 일인가. 작가의 작업은 실체감과 관련한 선입견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만든다. 실체보다 실체의 흔적이 뚜렷하고, 흔적보다 그림자가 또렷하다. 존재보다 존재의 흔적이 뚜렷하고, 존재의 흔적보다 존재의 그림자가 또렷하다. 존재의 그림자? 삶보다 삶의 흔적이 뚜렷하고, 삶의 흔적보다 삶의 그림자가 또렷하다. 삶의 그림자? 아마도 여기서 존재의 그림자는 부재를, 그리고 삶의 그림자는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존재와 부재,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 경계는 서로 넘나들어지고 상호간섭적인 계기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평면적이면서 공간적인, 얕으면서 깊은, 정적이면서 동적인, 희박한 실체감이 오히려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것 같은, 꽃잎을 온통 흩뿌려놓은 것 같은, 실체와 비실체의 경계를 허무는 자연의 또 다른 실체, 아마도 몽환적 실체를 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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