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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스님, 삶은 어쩌면 투명하고 깊은 밤에 망을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

고충환


흔히 선화(禪畵)란 선 수행을 위해 그린 그림을 말한다. 보통은 스님이 그린 그림을 말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이유와 목적이 선 수행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스님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실제로도 사실상 선 수행에 다를 바 없는 경우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와 목적을 찾는 속인들이 없지가 않다. 특히 하나의 형식, 하나의 패턴을 반복 심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종래에는 자기가 지워지고 무화되는 지경에 이르는, 그리고 그렇게 그림수행과 자기정체성 문제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사실은 한국의 전통적인 예술관과도 통하는데, 특히 선 수행을 위해, 마음공부를 위해, 심신의 정진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문인사대부의 고상한 취미(서양으로 치자면 그랜드매너)와 덕목으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했다. 

그림의 경우는 아니지만 사운드퍼포먼스로 유명한 존 케이지도 선사상에 남다른 이해와 깊이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선사상을 자신의 예술을 위한 구실로 삼았다. 다음과 같은 선에 대한 그의 정의는 선사상과 예술과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예시해준다. 이를테면 선에는 좋고 나쁨의 구분이 없다. 마찬가지로 추와 미의 구분도 없다. 예술을 삶과 구분해서는 안 되며, 삶 속에는 오직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가득차고, 다양하며, 무질서하고, 단지 순간적인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인 삶을 사랑하자고 했을 때 케이지는 이미 선승이었고 스님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선화(線畵)로서 선으로 그린 그림이 있다(보통 선화보다는 선묘란 말을 많이 쓰지만, 여하튼). 선화(禪畵)가 그림을 대하는 창작주체의 입장과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면, 선화(線畵)는 그림의 형식논리와 연관된다. 법관스님(법관스님은 스님이면서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선 스님보다는 작가이므로 앞으로 작가로서 표기)의 경우가 공교롭게도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두 선화가 만나지고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해있다. 작가는 말하자면 선 수행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데, 반복적인 선 긋기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흔히 그림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선 긋기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림이란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는 것만큼이나 하나의 선을 긋는 행위로부터도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선을 긋는 작가의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림이 하나의 점에서, 그리고 하나의 선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하나의 점이며 하나의 선은 그림이 시작되는 최소한의 근거란 점에서 회화의 원점이며 회화의 영도(현상학적 에포케)에 해당한다. 회화의 원점? 회화의 영도? 여기서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부지불식간에 모더니즘패러다임에 접속된다. 그림으로 하여금 그림이게 해주는 원인이며 계기를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내용보다는 그림을 이루는 형식요소와 형식논리에서 찾는 경우다. 이를테면 점, 선, 면, 색채, 질감, 그리고 평면성이라는 조건(클레멘테 그린버그)과 같은 형식요소와 이런 형식요소 간의 상호작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회화는 상대적으로 형상미술보다는 추상미술에 더 부합한다. 실제로 그동안 작가가 그린 그림을 보면 일부 먹그림을 비롯해 형상을 그린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추상미술(이를테면 색면 콤포지션)이 지배적이다. 이런 추상미술과 더불어서 형식요소와 형식논리를 매개로 한 형식실험을 두루 거친 것으로 보이고, 마침내 근작에서 선긋기의 반복수행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행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인식론적인 이해로서보다는 직관적인 체득(감득?)의 과정을 통해서 이르렀을 이 경지와 더불어서 작가의 그림 그리기는 회화의 동시대성과 회화의 정점(좋고 나쁨의 의미로서보다는 회화의 원점 혹은 회화의 자기반성적인 속성)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그린 화면은 무수한 선들로 빼곡하다. 사실은 미세하게 차이나는 색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지만, 그리고 그렇게 세세한 차이를 포함하고 있지만 크게는 같은 색조(주황색과 같은 다른 색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청색계열)로 그려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단색화 같고 모노크롬 같고 색면회화 같다. 그렇게 평면성이 강조되고 색면이 두드러져 보인다. 멀리서 보면 그렇고, 가까이서 보면 색면은 사실은 촘촘한 세선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된 것임이 드러난다. 때로 사선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가로와 세로로 선긋기를 무한반복하면서 교차된다. 
그리고 그렇게 무한 반복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점차 주체가 줄어들고 행위가 오롯해진다. 그리고 종래에는 아예 주체가 지워지고 행위만 남는다. 행위가 주체가 되고 주체가 행위가 되는 것. 물아일체 곧 행위(혹은 사물대상 혹은 세계)와 주체가 일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주체가 지워지고(무아) 새로운 주체(진아, 메를로퐁티라면 주체와 객체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우주적 살이라고 했을)가 열리는 것. 서양의 논리로 치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지향하는 익명적인 회화를 실현한 경우가 되겠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모더니즘 추상회화에는 창작주체의 자의식을 위한 자리가 없다. 수사적 표현이지만 이때 그림을 그리는 진정한 주체는 창작주체가 아닌 그림 자체인 것이며, 이를 예술의 자율성 혹은 회화의 내재율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창작주체는 회화의 자기실현을 돕는 매개자의 위상에 머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고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연동된다. 

다시, 작가의 화면은 무수한 선들로 촘촘하다. 흡사 가로와 세로를 날실과 씨실 삼아 직조한 것 같다. 그 과정(다소간 수행적인)에서 주체가 지워지고 행위가 오롯해진다고 했다. 그렇게 오롯해진 격자 패턴(그 자체 행위의 부산물인)이 어떤 관념적 실재를 떠올려준다. 관념적 실재? 격자 패턴은 일종의 네트, 그물, 망에 해당한다. 그런 망들이 촘촘하다. 여기서 망들은 일종의 존재에 해당한다. 그림은 그런 존재의 망들로 촘촘하다. 그리고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진 존재의 망들이 인과의 망(인드라망)을 떠올려주고, 억겁의 세월을 돌고 돌아 하나로 만나진 인연의 망(연기설)을 떠올려주고, 너와 내가 물고 물리는 상호간섭적이고 상호내포적인 관계의 망(네트워크)을 떠올려준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각각 인과의 망, 인연의 망, 그리고 관계의 망으로 나타난 존재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은 이런 관념적 실재와 더불어서 감각적 실재도 떠올려준다. 작가의 그림은 청색조의 스펙트럼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중 특히 짙은 군청색조의 화면이 마치 칠흑 같은 밤을 상기시키고, 그 밤을 배경 삼아 아롱거리는 헤아릴 수도 없는 별빛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세상의 끝에서 밑도 끝도 없는, 칠흑 같은, 투명하고 깊은 우주와 독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그렇게 고독한 자기에 맞닥트리게 만든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성근 격자 패턴의 망구조가 바람과 숨결이 들락거리는 숨구멍(바람 길과 숨길)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청명하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만든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은 가로와 세로를 날실과 씨실 삼아 직조한다고 했다. 그 과정이며 구조만 놓고 보자면 무슨 직물 같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바탕재로서 도입된 캔버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직물이다. 그럼, 작가의 그림은 직물 위에 직물을 그린 것인가. 그렇다면 색은? 색즉시공공즉시색, 즉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말이다. 색을 색이라 하고 공을 공이라 하는 것은 순전한 마음현상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래서 마음 바깥에서 보면 색은 공이고 공이 곧 색일 수 있다(여기서 모리스 블랑쇼의 바깥의 사유는 불교와 통한다). 물론 색깔 있는 직물이 없지 않지만, 여기서 문제는 색깔이 아닌 직물에 있다. 감각적 실재가 아닌 본질에 있다. 그 본질(엄밀하게는 구조)만 놓고 보자면 작가는 직물 위에다 또 다른 혹은 똑같은 직물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직물을 그리면서 다름 아닌 캔버스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고 구조를 드러낸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직물을 그리고 캔버스를 그린다. 직물을 그려 다름 아닌 직물임이 드러나게 하고, 캔버스를 그려 영락없는 캔버스 자체가 드러나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메타창작(그림을 통해서 그림이 뭔지를 묻는, 회화를 통해서 회화가 가능해지는 조건을 묻는 모더니티의 자기반성적인 경향으로서 그림 속에 일정한 비평적 행위를 포함하는)에도 연동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선긋기라는 최소한의 형식요소와 형식논리를 심화한 것이란 점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실현하고, 그리고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마침내 자기가 지워지고 다른 자기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수행적인 그림 그리기의 한 사례를 예시해준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동일한(사실은 마치 호흡이 그런 것처럼 다만 한 순간조차도, 다만 하나의 선긋기마저도 동일하지가 않은) 행위의 반복 자체가 일상을 닮았고 삶의 행태를 닮았고 존재의 꼴을 닮았다. 존재는 말하자면 무한순환반복운동 속에 그 조건이 있는 것. 말하자면 차이를 그 본성으로 하는 반복, 그 속에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으로 정의할 수가 있을 것.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회화의 실재를 드러내고 존재의 실재를 드러낸다. 관념적 실재를 드러내고 감각적 실재를 드러낸다. 때론 칠흑 같은, 알고 보면 투명하고 깊은 우주와 대면하게 하고, 더러는 청명하고 서늘한 바람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관념적이면서 감각적인, 그리고 특히 서정적인 감성의 질감과 색감에 감싸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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