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정향,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타적인 세상을 생각하다

고충환



환상목욕탕 기행. 환상목욕탕에는 바리메디온(潑利-medion)들이 산다. 물을 뿌려 이롭게 하는 영매들이다. 물을 뿌려 이롭게 한다? 물을 뿌려 이롭게 하는 행위가 종교의식을 닮았다. 세례의식과 정화의식으로 나타난 종교적 제례의식을 닮았다. 영매 자체가 이미 현세와 내세, 성과 속을 이어주는 중재자이며 신의 메신저가 아닌가. 여기서 물을 뿌려 이롭게 하는 행위를 종교적인 논법으로 말하자면 물을 뿌려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물을 뿌려 이롭게 하는 행위는 물을 뿌려 거듭나게 하는 행위와 통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덧입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치자면 모든 근심걱정이 해소된 상태를 의미하며, 불교적으로는 해탈의 경지를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근심걱정의 원인이라고 본다. 욕망이 없으면 근심걱정도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해탈은 욕망으로부터 탈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로 규정한다. 욕망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게 해주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인 것(심지어 리비도는 무조건적이기 조차 하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해탈은 결국 인간의 자기부정을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며, 여기에 인간존재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으로 바리메디온은 바리공주의 환생이다. 부왕으로부터 버림받은 막내딸 바리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영약을 구해와 죽은 부왕을 살려내는 바리공주 설화에서 보듯 바리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을 구하는 중재자 혹은 구세주(기독교에서의 예수와 불교에서의 미륵)를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의 번민을 해소해주기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환생한 예수와 미륵의 대리인격체인 바리메디온(무녀들? 성스러운 신도들?)들과 더불어서 위로 받고 치유 받는 환상목욕탕으로 초대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사람들이 흘린 탄식의 눈물을 엮어 만든 눈물목욕탕으로 초대하는 것. 그러므로 바리메디온은 물(사실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뿌려 이롭게 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눈물을 엮는 자이며 밤을 엮는 자이기도 하다. 눈물을 엮고 밤을 엮어 환상목욕탕을 짓는 것. 여기서 세상살이는 번민으로 잠 못 이루는 밤에 저마다 그리고 저 홀로 흘리는 눈물로 규정되고, 바리메디온은 그 번민, 그 밤, 그 눈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력자들의 밤. 조력자들의 밤 시리즈에서 작가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와 같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다룬다. 자신의 경험을 다룬다는 점에서 자전적이고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다룬다는 점에서 여성주의적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작업들에 비해 자기반성적인 경향이 강하고 성적 정체성 의식이 뚜렷한 편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재우고 입히고 씻고 보살피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조력자가 아닌 조력자들인 것은 그래서이다. 조력자들은 말하자면 손들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천안천수관음보살처럼 천 개의 눈으로도 그리고 천 개의 손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무수한 눈들이 그리고 헤아릴 수도 없는 손들이 등장한다.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방향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보는 눈들이며, 동시에 아이를 키우고 재우고 입히고 씻고 보살피는 손들이 등장한다. 그 눈들이 중첩되면서, 그 손들이 포개지면서, 그리고 여기에 살들이 끼어들면서 작가의 그림을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부분이 전체를 대신하는, 그리고 그렇게 대리하는 부분들의 무분별한 혹은 유기적인 집합이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오는 것. 

조력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그의 도움은 무조건적이다. 조력자에게서 피조력자에게로, 엄마에게서 아이에게로 건너가고 건네지는 도움에 조건이 있는 수는 없다. 상식적으로 그렇고 조력자의 의미 또한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여성주체의 모성본능을 다룬 메리 켈리(Mary Kelly)의 작업과 통한다. 메리 켈리 역시 작가처럼 아이를 낳고 기르고 키우는 육아과정을 <산후기록>으로 낱낱이 기록했다. 그러면서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배설물을 치워주고 닦아주고 씻어주고 하는 조력과정이 무조건적인지,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모성애가 여성주체의 타고난 본능인지를 묻는다. 그 물음은 모성애가 혹 여성주체에게 부과된 관습 내지는 성역할은 아닌지, 하는 반문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리고 그 물음 그대로 여성성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관습적인 것인지를 묻는 여성주의의 핵심문제의식과도 통한다. 작가의 조력자들의 밤 연작은 이런 문제의식을 새삼 일깨워준다. 



타니산(呑泥山) 견문록. 작가는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전단지를 발견한다. 전단지에는 타니산(呑泥山), 모든 고민과 어려움을 대신 삼켜드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문의 바람, 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문구는 왠지 모든 빚을 대신 받아드립니다. 이자까지 쳐서, 라는 알 만한 그리고 아리송한 문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모든 걱정을 대신 해준다는 보험회사의 걱정인형을 상기시킨다. 여하튼 여기서 타니산은 모든 걸 삼키는 진흙 산이다. 문구로 봐서 진흙 산이 삼켜주는 건 사람들의 번민이고, 말을 살짝 비틀자면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고 탄식이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한밤중에 옷장을 정리하다가 주머니 속 쪽지를 재발견한다. 그리고 타니산 속으로 여행한다. 여기서 한밤중이라는 시간대의 설정은 중요한데, 작가의 경험이 꿈이거나 최소한 상상력을 재구성한 것임을 암시한다. 

일종의 무릉도원의 환생이며 유토피아의 현대판 버전으로 봐야할 이 산에는 예사롭지 않은 영험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시나리오가 촘촘해졌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며 전작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그 면면을 보자면 달빛 가닥을 실 삼아 짠 수건이 등장하는데, 기다리는 시간을, 걱정과 번민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잊게 해주는 물건이다. 눈 열매는 시력을 회복시켜준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인데,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맞게 대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미지의 정치학의 시대에 대한 풍자로 볼 수가 있겠다(사람들은 아무도 사태의 본질에 관심이 없다. 다만 표면적인 이미지가 중요할 뿐. 우리 모두는 보들리야르의 말처럼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쉼 없이 국수를 뽑는 용이 있어서 그리고 한 번에 여럿을 먹일 수 있는 숟가락이 있어서 누구든지 배불리 먹을 수가 있다(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과 먹방 신드롬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대한 풍자?). 영험한 약초가 있어서 사람들을 영원히 죽지 않게 해준다(불로초의 환생? 노인사회에 대한 풍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의 비틀기? 미셀 푸코는 위생학과 사회보장제도를 건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생물 권력의 한 형태로 본다.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일하다가 죽으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 예사롭지 않은 가위도 있다. 아픔과 고민과 슬픔을 알아서 끊어주는 머리 타래로 만들어진 가윈데, 머리 타래가 많이 뭉치면 커지고 적게 뭉치면 작아진다.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머리 타래가 뭉치는 것이 번민과 비례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멀리 볼 수 있게 해주고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꿰뚫게 해주는 안경이 나오고(혜안? 심안? 이타심? 헤아림?), 허기와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주전자들이 나온다. 모든 사건이며 사연을, 때론 너무 나지막해서 잘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를, 독백을, 혼잣말을 낱낱이 기록하고 전달해주는 필기구도 있다. 이 이타적인 필기구는 역사를 재고하고 거대담론을 재고하게 만드는데, 역사가 기득권 세력의 일방적인 기술일 뿐이라는 반성으로부터 아날학파가, 그리고 미술사가 가부장제도의 일면적인 서술일 뿐이라는 반성에서 신미술사가 유래했다. 이 외에도 길벗이 되어주는 악기(윤리학자인 공자는 감각적인 음악이 최고의 쾌락이라고 했다. 삶의 태도와 향유는 별 개의 문제?), 좋은 인연을 만나면 단단하게 꽉 조여 주는 매듭, 허물을 덮거나 싸서 가려주는 보자기, 좋은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누어 먹는 하나로 연결된 잔과 같은 각종 주물이며 성물이 등장한다. 

환상목욕탕 기행(2008), 조력자들의 밤(2015), 그리고 근작에서의 타니산 견문록(2016)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작업은 현대판 무릉도원이며 유토피아를 환생시킨다. 유토피아는 없다. 실제로는 없으면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만 있는 가상의 장소이고 허구의 장소이다. 없는 줄 알면서 있다고, 있을 수도 있다고, 없으면 안 된다고 고집하는 맹목과 맹신이 유토피아를 소환하고 재소환 한다. 현실이 지리멸렬할수록 그 소환은 더 강력해진다. 유토피아는 그런 현실감에 기생하고, 그 자체가 현실의  바로미트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혹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이 아닌 이미지라고(이미지의 정치학), 낙원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보들리야르의 전언을 실현해야만 한다고(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낙원보다는 지옥에 가까운 것 같다), 슬라보예 지첵의 실재계의 불모의 사막의 도래를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한다고(실재계를 출몰시켜 상징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요구? 동물성 권력으로 식물성 권력을 대체해야 한다는 요청? 혁명은 진즉에 인문학을 싸는 포장지가 되었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서정시가 되었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되었다) 자기최면을 걸고 집단최면에 빠져드는 건 아닌가. 


유토피아의 서사는 필연적으로 분열적이고 이중적이다. 없다는 걸 알면서 요청하는 것이고, 불가능한 걸 알면서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현실, 불모의 현실, 지리멸렬한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데, 그래서 그 독해 역시 이중적으로 읽고 양면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번민을 해소해주는 환상목욕탕은 사실은 사람들이 흘린 탄식의 눈물로 지은 것으로 읽어야하고, 조력자들의 밤은 이기심과 동정 없는 세상으로 읽어야 하고, 타니산 견문록은 사람들의 번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보다는 오히려 번민을 게워내는 화이트홀로 읽어야한다. 그렇게 읽을 때 탈장소(유토피아)가 아닌 장소가 읽히고, 환상이 아닌 현실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작업(예술)은 연민과 유머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의 작업은 이 둘 모두를 갖춘 것 같다. 연민은 물론이거니와 유머보다는 블랙코미디? 그로테스크에 가까운? 


환상으로의 도피가 때론 현실에 대한 무책임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더러는 동정 없는 세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자기반성적 계기로 작동할 때도 있다. 불가능의 경계를 넘어 유토피아가 소환되고 재소환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환상(환상은 기본적으로 개인양식이다)을 그린, 현실을 비틀어서 그린, 그리고 그 전범에 해당하는 원전을 소환해 그린, 여기에 상상력과 각색을 덧붙인, 이 모두가 무분별하거나 유기적으로 중첩되고 포개진 작가의 그림이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