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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고양국제야외조각전

고충환

거리의 가구에서 거리의 조각으로




고양국제야외조각전이 올해로 15회째를 맞는다. 세부적으론 2002년 창립전이 열린 이후, 2005년부터는 고양국제야외조각 심포지엄의 형식으로 열린다. 회를 거듭하면서 그동안 수십 점에 달하는 조각 작품이 고양시에 기증되었다. 이로 인해 고양시는 일산호수공원 내에 자연과 조형물이 어우러진 조각공원을 조성할 수가 있었고, 이제는 고양시의 중요한 문화자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지자체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이며 조각공원이 일반화되었지만, 돌이켜보면 고양국제야외조각전이 이러한 일반화에 상당한 기폭제 내지 의미 있는 계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전시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그 자체 새로운 시도로 봐도 될)가 엿보인다. 전시성격과 관련해 창립전 이후 줄곧 견지해왔던 거리의 가구 개념 대신 거리의 조각 개념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거리의 가구 개념이란 각종 도시 구조물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한편, 여기에 조각이며 조형물이 매개되고 간섭되면서 달라질 도시환경에 방점이 찍힌다. 이런 거리의 가구 개념으로부터 거리의 조각 개념으로 전환하게 된 이면에는 그동안 도시환경의 일부로서의 조각(혹은 조형물)이 기왕의 도시구조물과 상호작용하는 것에 따른 형식실험이 충분했다고 보고, 덩달아 환경조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눈에 띠게 달라졌다(이를테면 친근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보는 자체진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단에 힘입어 이제는 조각 자체의 본성에 집중해도 조각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이를 따라잡을 만큼 충분히 성숙(?)되어졌다고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자체 새로운 형식실험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향후 그 추이며 성과를 지켜볼 일이다. 

오세문_일산호수공원 현장설치



원유진_일산호수공원 현장설치




또 다른 눈에 띠는 변화로는 이번 전시행사를 위한 초대작가로서 외국의 유명 조각가들과 함께 국내 지역조각가들을 초대전시한 것이다. 먼저 외국초대작가와 관련해선 흔히 그렇듯 그동안 여러 경로로 실제 외국에 체류하는 작가들 중 초대작가를 섭외하는 방식에서 탈피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미 국내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외국작가들이 적지가 않다. 이를테면 국내 미술대학에 재직한다거나 각종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번 초대작가 중 일부에 해당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원하는 작가를 지척에서 섭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제 작업을 사전에 직접 확인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정례화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다만 이 경우에 제기될 수 있는 문제로는 작가들의 작업 경향이란 것이 대개는 개념이나 설치미술이기 십상이어서 이를 그대로 조각이나 조형물 작업에 바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은 점이 있지만, 한편으로 작업 경향과 유형에 대한 유연한 이해를 견지하고 있는 작가들인 만큼 상호소통을 통해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역조각가들을 초대전시한 것 역시 지역 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저변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경우로 보인다. 


사람도 그렇고 일도 그렇듯 변하기 마련이고 또한 변해야 한다. 정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강박은 불필요한 일이지만, 당위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 제기된 일련의 시도는 고양국제야외조각전이 그동안 회를 거듭하면서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의 자기변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부각된 것일 터이고, 그런 만큼 향후 성과가 기대된다. 


사랑과 평화를 넘어서, 표면적이고 역설적인
 

전시성격은 그렇다 치고 주제는 어떤가. 사랑과 평화를 넘어서. 여기서 얼핏 사랑도 평화도 진부한 문구며 구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의미란 것이 의미심장한 것보다는 정작 진부한 것, 평범한 것과 더불어 있을 때가 많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는 말도 있다. 문제는 말(여기서는 주제)이 아닌 실천에 있다. 말의 오용과 남용이 아닌, 말이 갖는 원래 의미의 복원에 있다. 이 의미, 이 실천논리에 힘입어 작가들은 평화통일 특별시를 선포한 고양시의 정체성 혹은 지향성을 담았다. 일면적으론 시의 모토에 주제의식으로 화답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차후로도 시의 이해관계와 작가들의 이해관계가 의기투합해서 서로 윈윈하는 선순환구조로 발전하고 정착될 수 있도록 궁리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과 평화가 아닌, 사랑과 평화를 넘어서인가. 사랑과 평화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천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담았다. 사랑과 평화의 의미를 확장하고 확대재생산하는 것인데, 사랑과 평화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공공연한 혹은 사실상 사랑과 평화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러니(역설적 표현)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 작가들은 생리적으로 이런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현실은 부조리한 현실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거나 숨겨놓고 있기 마련이고, 작가들의 감각촉수가 그 그림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이를테면 거리는 삶의 장이다.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부닥치고 충돌하는 장이고, 모순과 갈등이 그 표현을 얻는 장이다. 아예 신문을 안보는 사람도 있고, 뉴스 보기가 겁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헬조선과 같은 자조 섞인 표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삶이 빡빡하고 현실이 살벌하다는 사실을 방증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미명 하에, 상상하는 대로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 이면에서 살해와 폭력과 린치, 비리와 성 농담(성희롱?)이 일상이 되었고, 자살클럽과 고독사가 다반사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난민의 숫자가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다고 한다. 전쟁과 기아 때문에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사실은 값싼 노동력 때문에 받아들여졌다가 이후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변한 이민자정책이 난민문제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언제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나에게만 닥치지 않으면 그저 안도할 따름이다. 이런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현실에서 작가들이 현실보다는 현실의 그림자에 반응하는 것은, 표면적인 의미보다는 역설적인 표현에 민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런 일이다.    


나아가 예술 자체가 이미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술 자체가 이미 사랑의 산물이다. 표면적으로 사랑을 주제화한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외적으로 볼 때 갈등과 반목과 투쟁과 분쟁을 주제화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조차 사실은 그 이면에 깊은 인간애(사랑)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표면적인 긍정보다 더 그럴 수 있다. 말하자면 표면적인 비판의식은 사실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구실이며 계기인 경우가 많고 실제로도 그렇다. 여기에 예술의 순기능이 있고, 역설적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이번 주제는 그 의미며 실천논리를 담고 있다. 


지역을 넘어서 


초대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번 전시에는 각각 외국작가 3명, 영남지역작가 5명이 초대되었고, 여기에 기왕의 고양조각가협회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 작업 경향을 보면, 먼저 프랑스 국적의 로빈 고드(Robin Godde)는 현재 서울아트스페이스 금천에 레지던시로 입주해 있는 작가이다. 그는 사물대상의 고유한 성질과 외부환경에서 발생하는 각종 역학(이를테면 중력과 표면장력과 부력 같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작용하는)의 상호작용성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역학(혹은 역력)은 사물대상을 변형시키려하고, 사물대상은 자기본래의 성질을 고수하려 한다. 처음 성질로 되돌아가려는 관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긴 철 막대를 천장에 매달아 놓으면 땅 쪽으로 휘어지는 것이 그렇고, 수분을 흡수한 나무막대가 부풀려졌다가 건조해지면서 재차 수축되는 식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렇게 휘어진(그리고 아마도 외부환경이 변하면서 다시 처음의 직선 상태로 되돌아갈, 그러므로 잠재적인) 나무막대 형상을 돌에 새겨 넣었다. 보기에 따라서 그렇게 휘어진 막대가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 꼭 괄호 같다. 현상학적 에포케 곧 잠정적인 판단중지 상태를 제안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일본 국적의 조각가 미스노리 코이케(Mitsunori Koike)는 다국적으로도 각종 국제조각심포지엄 활동이 활발한 작가이며, 매번 주제에 작업경향을 맞추는 편이다. 이번 전시 역시 예외가 아닌데, 질감이 다르고 구조가 다른 구조물을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 조합해내는 것을 통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았다. 아마도 상호간 다름과 차이를 넘어서 봉합하는 것(화해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전제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인도 국적의 케르카 수보드 찬드라칸(Kerkar Subodh Chandrakant)은 해안도시인 인도 고아 출신이다. 아마도 출신지역의 장소적 특정성에 착안한 것일 터인데, 각종 자연 혹은 인공 오브제들, 이를테면 홍합이나 어구 그리고 재활용타이어를 쌓아 벽과 같은 구조물을 만들고, 그것들이 바닷물에 침식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에 주력한다. 수명이 짧은 설치작업으로서 덧없는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이번 전시에는 모로 누운 불두(부처의 머리 형상)를 미니멀하게 표현한 것인데, 이목구비가 생략된 브랑쿠지의 얼굴형상을 그리고 불교의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전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국내 초대작가로는 강이수(상형문자를 매개로 원시적 과거를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한편, 상호간 이질적인 질료의 조합을 통해 조각을 확장하는), 박태원(만개한 꽃잎 형상과 입술 모양을 오버랩 시켜 자연과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를 묻는 한편, 자연의 에너지며 생명력을 표현한), 방준호(그 자체 의인화된, 거센 바람에 휘어지는 나무형상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면서 저항하는 존재의 이중성을 표현한), 그리고 도태근과 신동호(다른 질감 다른 색감의 돌을 하나의 조형물로 합체한 경우로서, 각각 조각의 본질에 해당하는 형태에 대한, 구조에 대한, 그리고 물성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의 작업이 주목된다. 이외에 고양조각가협회 작가들이 다양한 형태와 경우로서 완성도 높은 작업들을 예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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