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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노의 회화, 그 미술사적 의의

고충환


유형화는 대표적인 개념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세세한 차이가 묻힐 수도 있다는 점이 단점이고, 그럼에도 혹은 동시에 세세한 차이를 손에 잡히는 실체로 전이시켜준다는 점이 장점이다. 모든 개념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인데 유형화 역시 그렇다. 이런 유형화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경우로 치자면 추상과 구상의 구분을 들 수가 있다. 이런 추상과 구상의 구분에도 세대 간의 차이는 있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에서 추상과 구상의 구분은 별반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일관성을 견지하기보다는 일관성을 문제시하는 자기변신과 자기부정이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의 경우, 더욱이 작고작가인 경우에서처럼 세대를 소급해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일관된 형식을 견지하고 심화하는 것이 아이덴티티를 정립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 이러한 동일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하다. 


이양노는 추상과 구상을 아우른다. 그것도 그냥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닿는 지점마다 곧 정점인 것만큼 뚜렷한 자기형식을 성취하고 있다. 이런 성취는 그가 실제로 몸담고 있던 동인활동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가 있는데, 추상미술을 넘어서 사실상 한국현대미술의 산실로까지 알려진 악튀엘(앵포르멜 경향으로 대표되는)의 핵심작가였고, 이후에는 한국구상미술의 산실인 목우회 작가로서 오랫동안 참여해왔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든 것도 이례적인 일이고, 하나같이 대표동인으로서 이력을 쌓은 것도 남다르다. 보기에 따라선 지금보다 오히려 헤게모니 투쟁이 치열했던 화단환경1)에서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작가의 행보는 이례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여하튼 이런 추상으로부터 구상으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남모를 속사정이 있겠지만, 짐작컨대 헤게모니 투쟁에 회의를 느낀 것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정황은 그렇다 치고 좀 더 거시적인 관점 아니면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작가처럼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유명작가들이 적지 않다2)는 점에서 오히려 자연스런 일로 볼 수도 있겠다. 작가는 그렇게 추상과 구상을 아우르면서 뚜렷한 자기형식을 성취하고 있는데, 작가의 그림이 변모해온 시대적 양식을 보면 대략 1948년에서 1950년 인물화 시리즈, 1957년에서 1965년 앵포르멜 시기, 1970년에서 1986년 인물화와 풍경화 시리즈, 1986년에서 1999년 지난날과 오늘의 이야기 시리즈, 2000년 이후 말러를 듣는 사람 연작, 2005년 풍경화 시리즈 정도로 구분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3) 작가의 그림들이 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특히 뚜렷한 자기형식을 성취하고 있는 경우로는 1957년에서 1965년 앵포르멜 시기4), 1986년에서 1999년 지난날과 오늘의 이야기 시리즈, 2000년 이후 말러를 듣는 사람 연작, 그리고 2005년 풍경화 시리즈 정도가 주목된다.
 

1948년에서 1950년 인물화 시리즈 


당시 작가의 그림은 자화상을 비롯해 모친과 친구와 같은 주변사람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그 중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려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는 친구의 초상도 있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 속 인물들에게서 해방 직후에서부터 전쟁발발 직전까지 어수선한 시대며 질곡의 세월을 견뎌낸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대개는 칠흑같이 어둔 배경화면 위로 부유하듯 부각되고 있는 초상들이 낭만주의에서 아카데미즘에 연이어지는 초상화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개 작가들이 본격적인 자기형식이랄 만한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기를 흔히 습작기로 분류하지만, 작가의 그림을 단순한 습작기로 보기에는 좀 그런, 놀랄 만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심리적인 정황이나 시대감정과 같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표정 위로 불러내고 있는 능력이 이미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이 그림들이 고교 시절에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고, 작가의 천부적인 소질을 예감케 한다. 

1957년에서 1965년 앵포르멜 시기 

한국현대미술에서 1957년이란 시기는 결정적이고 중요하다.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신조형파, 창작미술가협회와 같은 주요 그룹들이 동시에 결성된 해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미술가협회는 반국전을 기치로 내건 추상계열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1961년 60년미술가협회와의 연합전을 마지막으로 해체된다. 그리고 이 연합전을 계기로 역시 60년미술가협회와 함께 그룹 악튀엘로 통합된다. 악튀엘은 1962년 8월에 창립전을 연 이후, 1964년 2회전을 끝으로 해체된다. 1957년에서 1964년 사이에 현대미술가협회, 60년미술가협회, 그리고 그룹 악튀엘로 연이어지는 경향과 운동은 격렬했고 결정적인 것이었다. 비록 그 시기는 그리 긴 것이 아니었지만, 아카데미 풍의 국전 중심의 화단을 쇄신하고 헤게모니의 흐름을 바꿔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여기에 역시 1957년에 시작된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이 주로 국전에서 소외된 현대적인 조형정신을 소유하고 실천한 작가들을 위주로 초대전시한 것이 한 몫을 했다. 그 일군의 작가들이 소유하고 실천한 조형정신이 말하자면 앵포르멜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양노는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현대미술가협회, 60년미술가협회와의 연합전, 그룹 악튀엘, 그리고 현대작가초대전으로 연이어지는 운동에 때로는 창립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전시참여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을 인정받아 1965년에는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으로 제4회 파리 비엔날레에 선발 출품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미협이 주관해 비엔날레 작가들을 선발했는데, 참여 작가들 대부분이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 그리고 그룹 악튀엘 출신 작가들이어서 화단이 시끄러웠다고 하는데, 당시 그 위상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되겠다5) 국전 중심의 제도권 미술과 국외전시를 이끌었던 현대미술 작가들이 충돌하면서, 서서히 후자 쪽으로 헤게모니 흐름이 기울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앵포르멜6)은 유럽의 전후미술운동이다. 전후의 피폐해진 시대감정을 비정형의 추상형식에 담아낸 것이다.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가 추상표현주의가 되고 액션페인팅이 된다. 우리말로는 몸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시대감정보다는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를 발전시킨 것이란 점에서 유럽의 앵포르멜과 구별된다. 국내적으론 속된 말로 미군의 군홧발에 묻어온 라이프지에서 그 영향관계를 찾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미국 판 버전의 추상표현주의에서 그 연계성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후 경험과 함께 피폐해진 시대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유럽 본토의 앵포르멜과의 연관성을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양노의 경우에는 단연 후자의 경우 곧 유럽 본토의 앵포르멜과의 친근성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자면 다른 작가들의 경우에도 그림에 나타난 양식적 특징만을 놓고 본다면 추상표현주의보다는 앵포르멜, 미국보다는 유럽 본토의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선 차후에 따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당시 작가의 그림을 보면 격렬한 붓질과 두툼한 마티에르가 강조되고 물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재하는 감각적 대상을 특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내적 파토스와 같은 비실재하는 감정적 응어리를 토해낸 것 같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감정의 덩어리를 직접 분출하고 표출한 것 같은 격렬함과 직접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격렬함은 각각 <폐허지대>와 <얼>로 나타난 그림 제목에서도 확인된다. 전후의 피폐해진 시대감정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안쪽도 바깥쪽도 온통 폐허뿐인 존재의 자리(존재론적 자의식)를 오직 최소한의 몸짓과 흔적으로만 기록한 것이며, 얼을 상실한 시대에 다시 얼을 불러들이는 마치 시대에 대한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 대한 초혼의식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내적 응어리며 내면적 파토스를 직접 토해낸 것 같은 격렬하고 공허한 그림으로 앵포르멜 회화 경향의 전형성을 실현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린다기보다는 겪는(존재를 겪는?) 그림을 실천하고 있었다. 작가의 형상미술에 비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되고, 차후에 재조명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1986년에서 1999년 <지난날과 오늘의 이야기> 시리즈 

그리고 작가는 이후 재차 형상미술 특히 인물화로 전환하는데, 자신이 처음으로 화력을 시작했던 장르로 되돌아 온 것인 만큼 앵포르멜 이상의 성과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이후 작가가 작고하기 직전까지 몸담고 있던 목우회(1976년에서 2006년)를 중심으로 전개 심화된다. 인물화야말로 가장 이양노다운 장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단순히 인물화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해서라기보다는 인물에서 존재를 읽고 우주를 읽고 시대를 읽고 역사를 읽어내는 경우로 봐야한다. 이양노에게 인물이란 말하자면 세계 자체며 세계 전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인물이란 존재며 세계의 응축물을 의미했는데, 스쳐가는 수많은 인물들 개개인을 바라볼 때면 아무리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얼굴 속에서도 엄청난 삶의 이야기를 읽어내게 된다는 작가의 고백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대목이지 싶다. 

이 일련의 인물화들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지난날과 오늘의 이야기> 시리즈일 것이다. 이 시리즈는 이를테면 국립현대미술관, 대전 시립미술관, 홍익대학교 박물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그리고 광주 백민미술관(사실상 같은 시리즈로 봐야할 <사색적 콤포지션> 1점)과 같은 국내 유명 미술관들에 빠짐없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봐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도 얻고 있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한편으로 <사색적 콤포지션>을 같은 시기에 제작된 사실상 같은 시리즈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이 일련의 작품들을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상호간 일관되거나 이질적인 사색의 편린들을 재구성(콤포지션)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사색의 편린들을 위해 각각 지난날의 이야기가 호출되고 오늘의 이야기가 호명된다. 그리고 그렇게 호출되고 호명된 이야기가 날실과 씨실이 되어 하나의 유기적인 화면으로 직조된다. 개인사적으로 보자면 작가의 자화상과 모친의 초상 그리고 화가의 아내와 같은 가족의 초상이 호출되고, 역사적으로 치자면 고구려 고분벽화와 같은 민족의 원형이미지에서 근대사적 사건을 아우른다. 말하자면 이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개인사와 역사가 서로 얽히고설키는 상호관계사 내지는 상호영향사를 메시지로서 탑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 메시지를 일종의 대서사시적인 스케일의 회화 속에 담아낸 것이다. 단순한 인물화의 차원을 넘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개인이 함몰되고 빠져드는, 때로는 역사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 더러는 그 도가니 속에서 개별성을 잃기도 하는, 그런 역사적 스펙터클을 그린 것이고 일종의 삶의 알레고리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알레고리는 그림 속 여인의 초상으로 수렴된다. 이 시리즈 그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여인의 초상이 등장하는데 때로는 모친이 그리고 더러는 화가의 아내가 그 역할을 떠안기도 하지만, 대개 여인은 어떤 주체를 특정한 경우로서보다는 알레고리를 위한 익명적 주체로 봐야한다. 여인은 말하자면 역사의 현장을 지키는 이성의 파수꾼으로 보인다. 더러 역사의 소리를 듣는 양 손을 귀에 갖다 댄 포즈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동시에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의인화된 것일 수도 있겠고,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를 표상할 수도 있겠다. 혹자(심상용)는 영매로 보기도 하지만, 그 의미가 대동소이할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에서 개인사의 차원을 넘어 개인의 삶이 역사적 현실과 얽히는 역사적 현장(그 자체 삶의 현장이기도 한)을 알레고리로 풀어내고 있다. 이로써 역사화의 한 전형을 제시한 경우로 봐도 되겠다7)

2000년 이후 <말러를 듣는 사람> 연작 

생전에 작가는 그림은 물론이거니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 그린 일련의 인물화들에서 이런 음악적 감수성과 관련해 의미 있는 그림들을 남기고 있는 편이다. <지난날과 오늘의 이야기> 시리즈가 역사의 질곡에 개인의 삶이 얽히는 현장을 그린 것이라면,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혼자다. 자화상은 물론이거니와 누군가를 특정해 그린 경우에서마저 작가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작가다운, 작가만의 아이덴티티가 여실한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불현듯 실존주의 조각가 자코메티가 생각난다. 자코메티는 조각가로서 뿐만 아니라 사실은 화가로서도 유명하다. 그의 조각은 실존적 인간을 위해 필요 없는 살을 철저하게 발라낸 것으로 유명한데, 그림도 조각 그대로이다. 작가의 경우에서보자면 음악의 성취(자기에의 몰입)를 위해 불필요한 감각(잡음?)을 철저하게 배제시킨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개략적인 붓질로 된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화법이며 금욕적인 성향을 떠올리게 하는 채도가 낮은 단색을 주조 색으로 한 것도 작가와 통한다. 삶의 현장에서 유래한 이해관계와 같은 잡다한 세상사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유리시킨, 그리고 그렇게 오롯이 음악에 심취한,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에게 음악에 심취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 그림 속 인물들은 대개 눈을 감고 있거나 불분명한데 바로 자기 내면과 만나지고 있는 것이다. 바깥을 향한 눈을 감으면 내면이 열리는 법이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음률을 물화한 것 같은 붓질과 더불어 부유하고, 흡사 음색을 옮겨놓은 것 같은 무채색 속에 침잠하는 인물을 그렸다. 그리고 그렇게 형체보다는 분위기가 강조되는, 분위기가 주체의 자기관조를 대신하는, 그런 내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그린 그림 중 특이한 것이 첼리스트 장규상을 그린 그림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내면화의 경향성이 유독 강조된 경우를 말한다. 그림 속 노인은 한복을 차려입고 첼로를 켜고 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림으로 치자면 중광스님과 같은 기인예술가로 알려져 있는데,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손수 찾아다니면서 첼로연주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에게서 예술이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와 이유를 봤을 것이다. 예술의 진정한 쓰임새를 봤을 것이다. 예술가의 진정한 초상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의 동일시를 확인했을 것이다. 노인과 한복과 첼로라는 정황적 형태에도 불구하고 형태는 불분명하다. 마치 구축되는 형태가 아니라 해체되고 스며들고 종래에는 사라지고 말 형태를 그린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형태가 사라지는 형태는 말하자면 음악의 혼(디아볼루스 인 무지카)이며 존재의 혼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내면과 음악(예술)이 일체화되는, 내면이 음률을 부르고 음색이 부름에 화답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2005년 풍경화 시리즈 

그리고 작가는 말년에 풍경화에서 또 한 차례 변신을 보여준다. 그전에도 간간이 풍경화를 그렸지만(이를테면 쓸쓸한 그리고 폐허화된 시대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공원과 폐선 같은), 말년에 그린 풍경화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미술사적으론 세잔과 인상파 사이 즈음에 위치할 그림들이다. 세잔의 붓질은 특이한데, 구축과 해체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어서 견고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붓질이 풀어헤쳐지는 인상파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구조적인 붓질을 견지하면서도 세잔의 그것에 비해 더 헐거워진 그래서 더 분방한 붓질을 보여준다. 말을 하자면 후기 세잔 혹은 세잔 이후를 예비하고 있다고나 할까. 아마도 세잔에 대한 연구가 있었을 것이다. <세검정> 일대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그렇고, <금강> 시리즈(아마도 금강산을 소재로 했을)에서 이렇듯 기왕에 헐거워진 붓질은 본격적인 해체를 보여준다. 여기서 붓질은 더 이상 형태의 구축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형태(이를테면 첩첩한 준봉 같은)로부터 놓여난 붓질이 자유로움과 자율성을 구가하는 느낌이다.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진척될 수는 없었지만, 본격적인 추상화를 예고하는 그림들이다. 

저간의 사정을 소상히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여하튼, 서두에서도 말했듯 작가 세대의 한국미술의 현실에서 추상과 구상을 아우르고 넘나드는 것은 덕목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작가 이양노의 존재는 오히려 더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다만 필자만의 생각일까. 작가는 추상과 구상을 아우르고 그렇게 가닿는 지점들마다 정점이었다. 특히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과 2000년대 들어서 그린 일련의 인물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내면화의 경향성은 뚜렷한 자기형식을 성취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회화적 성과는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근현대미술사의 퍼즐 맞추기 혹은 복원을 위한 의미 있는 한 부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1) 국전과 반국전, 추상과 구상, 아카데미즘과 전위, 제도권미술과 제야, 그리고 여기에 순수와 참여미술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화단환경을 말한다. 
2) 대표적인 경우로는 피카소를, 그리고 동시대적으로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들 수가 있을 것.
3) 이런 시대별 구분에 대해서는 작가가 작고하기 직전에 열린 전시도록(이양노 화력 60년의 회고, 조선일보미술관, 2006.3.22-4.2)을 참조해, 실제 제작된 작품경향과 연도를 일일이 비교 확인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다.  
4) 특히 이 시대구분은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미술협회가 공동 주최한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에서 제시된 구분을 따른 것이다. 1957년에서 1965년 사이에 뜨거운 추상운동이 태동하고 전개된 것으로 보는데, 여기서 추상운동은 말할 것도 없이 앵포르멜 경향을 말한다. 그리고 작가 이양노는 시종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5) 당시 참여 작가로는 정상화, 김종학, 최만린, 이양노, 정영렬, 하종현, 박종배 등 7명이 참여했다. 
6) 국내에서는 평론가 방근택이 앵포르멜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후 그대로 이어져온 것이지만, 전후 유럽의 미술운동을 지칭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논란이 없지는 않다. 
7) 참고로 작가는 일부 역사 기록화(예컨대 전쟁기념관 소재의 매소성 전투 같은)도 수점 남기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과 고증에 의거한 것이란 점에서 이렇듯 역사를 알레고리로 재해석한 경우와는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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