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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랑 / 어디선가에 날아든 새, 새들, 새들들

고충환


유의랑의 작업실에는 방마다 새들 천지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새들이 방이며 캔버스를 온통 차지하고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그나마 겨우 앉을 공간과 샛길 정도가 나 있었지만, 작업에 몰입할 때면 자리란 자리는 새들에게 다 내어주고 까치발로 겨우 옮겨 다닐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새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왜 이 많은 새들을 캔버스에다 불러들였을까. 작가에게 새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작가의 작업실은 아파트에 있다. 아파트에 있지만 숲 속에 있어서, 더욱이 저층이어서 숲이 연장된 느낌을 준다. 그런 만큼 주변에는 새들 천지다. 새들은 실제로서보다는 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작가 역시 그 소리를 통해 새의 존재를 알아차리는데 익숙하다. 그런가하면 산짐승까지는 아니더라도 길고양이 정도는 흔해서, 그 중 일부와는 매번 같은 길목에서 마주치기 일쑤고, 덩달아 성향이며 성격마저 파악하고 있기조차 하다. 결국 이전 그림들이 그렇듯 이 새들은 작가의 일상이며 생활감정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었다. 일상도 생활감정도 같은 듯 다르다. 반복 속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새는 원 속의 새, 타원 속의 새, 도형 속의 새, 새 속의 새, 깨진 알 속의 새와 같은 다양한 형편과 형식논리로 변주될 수 있었고, 그때그때의 일상이며 생활감정을 반영할 수가 있었다. 







작가의 새 그림은 작가의 일상이며 생활감정의 반영이라고 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작을 이해해야 하고 전작과의 연관성을 이해해야 한다. 전작에서 작가는 허허로운 여백을 배경으로 나무와 숲과 달을 그렸다. 은근한 달그림자와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가지를 그렸다. 칠흑 같은 밤에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아 현란한 원색을 드러내며 대비되는, 마치 무대와도 같은 그림을 그렸다. 인공불빛을 받으면 자연의 원색은 약간 인위적인 색깔로 변하는데, 작가의 그림이 주는 일말의 비현실적인 느낌은 아마도 여기에 연유한 것일 터이다. 더불어 작가의 그림이 무대와도 같은 인상을 주는 건 아마도 헤드라이트 불빛이 무대 위를 비추는 국부 조명등이 그런 것처럼 사위가 칠흑인 가운데 시선을 온통 중앙에 집중시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무대 위에 작가는 없다. 아마도 작가는 무대 밖에서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무와 숲과 달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고, 나무와 숲과 달이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이며 정경을 관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관조하는 풍경 중엔 나무에 앉은 새가 달에 겹쳐 보이는 정경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새에 자기가 겹쳐 보였고, 새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풍경의 일부였던 새를 따로 호출할 수 있었고, 온통 새를 주연으로 그릴 수가 있게 된 것일 터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새는 말하자면 전작에서 나무와 숲과 달그림자를 관조하던 주체를 새의 시각이며 시선으로 그린 것이다. 전작이 주체가 관조하는 풍경이며 정경을 소재로 그린 것이라면, 근작에서는 그렇게 풍경이며 정경을 관조하는 주체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주체가 관조하는 풍경에서 관조하는 주체 자체에게로 무게중심이 옮아온 것이며, 객관적인 풍경에서 주체에 방점이 찍히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화되는 쪽으로 이행해온 것이다. 

이처럼 주체의 시각이며 시선을 가정하고서야 비로소 근작이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무슨 말이냐면 작가는 근작에서 거의 예외 없이 원형과 타원형과 같은 변형 캔버스에다가 그림을 그리는데, 우연한 형식적 시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의미론적으로도 주목할 부분이 없지가 않다. 그림을 위한 틀로서 도입된 원형 캔버스는 말하자면 우선적으로 달을 형상화한 것이다. 달에 비치는 나무와 달에 겹쳐 보이는 새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주체의 시각이며 시선을 그린 것이고 눈을 그린 것이다. 작가가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을 그린 것이다. 흔히 캔버스는 세상을 보는 주체의 눈(주체의 관점)에 비유되곤 하는데, 그 비유를 즉물적으로 그리고 즉자적으로 받아들인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깨진 알 시리즈에서 보듯 원형 캔버스는 알을 표상하고 생명을 표상하고 우주적 자궁을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원형 캔버스는 달을 표상하고 눈을 표상하고 알을 표상한다. 중요한 건 그 표상형식이 캔버스 자체의 틀(꼴)과 일치한다는 것이고, 변형 캔버스(쉐이프트 캔버스) 본래의 의미에 부합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변형 캔버스 자체의 틀과 일치하는 격자그림을 그린 프랭크 스텔라의 그림에서와 같은). 그러므로 작가가 도입한 변형 캔버스는 단순한 형식적 시도가 아니었다. 캔버스 자체를 일루전을 위한 부수적인 장치로서보다는 그 자체 독립된 오브제로서 기능하도록 의도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한편으로 원형과 타원형은 캔버스의 꼴만 이루는 건 아니다. 그림 속에도 원형과 타원형이 있고 기하학적 도형이 있고 색면 콤포지션이 있다. 비록 새 혹은 나무에 앉은 새와 같은 알만한 형상이 등장하지만, 새 자체도 그리고 새가 쉬고 있는 나무도 기하학적 형태로 전환돼 있어서 그림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재현적인 그림으로서보다는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다. 새가 앉아있는 화면 속 기하학적 패턴이며 다채로운 색감들(이를테면 보색대비 같은) 그리고 다양한 질감들(이를테면 붓 대신 나이프를 매개로 형식 실험한)은 아마도 새에 이입한 작가 자신이 느끼는 일상이며 생활감정을 표상할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심정적으로 어떤 풍경적인 요소를 암시한다. 추상과 형상, 재현의지와 형식논리가 경계를 허물어 상호작용하면서 일말의 긴장감과 함께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서사를, 일상성을, 생활감정을 자아낸다.  

서사? 일상성? 생활감정? 그림에 등장하는 새는 일체의 세부가 생략된 채 최소한의 표현으로만 한정돼 있어서(일종의 공판법을 적용해 평면성을 강조한) 그 속뜻을 알 수는 없지만 정황적 이해는 가능하다. 이를테면 중심성이 강한 구도와 함께 마치 세상의 중심인 양 화면의 정중앙에 포치한 새가 있는가 하면, 화면 가장자리 한쪽으로 비켜선 새가 삶을 관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하면 그림에는 보통 새 두세 마리가 함께 등장하는데, 아마도 타자와의 관계를 상징할 것이다. 이를테면 두 마리가 나란히 한 방향을 쳐다보기도 하지만, 대개는 저마다 하나씩의 면을 차지한 채 고립돼 보인다. 화면 속 자잘하고 큰 면들은 말하자면 존재들 저마다의 포지션을, 자기 영역을, 자기 입장을 표명한 것이며, 존재의 방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방은 세상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하면서 단절시키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날카로운 예각을 보여주는 면과 면들이 포개지거나 부닥치면서 존재간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대개는 새 한 마리가 단출하게 그려진 그림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 형상에 비해 눈에 띠게 작게 그려진 새 그림이 고독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 모든 타자와의 관계며 삶을 관조하는 작가 자신을 표상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타자와의 관계를 원하면서 원치 않는, 고독을 원하면서 원치 않는 자기 분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사는 우리 모두의 초상을 표상할 것이다(사르트르는 타자가 지옥이라고 했고, 파스칼은 고독한 삶을 참지 못하는 것에 인간의 비극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작가의 새 그림은 다채로운 색감과 질감의 이면에 자기를 감추는 삶이 꼭 그런 것처럼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그런데, 작가는 전작에서 이미 쓸쓸한 새며 외로운 새를 그린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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