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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희/ 얼룩과 의미 사이, 미결의, 유보적인, 파열되는 의미들

고충환


 같음(자기동일성). 다름(비동일성). 같음과 다름. 같음 혹은 다름. 같으면서 다른.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그리고 있음(색). 없음(공). 있음과 없음. 있음 혹은 없음. 있으면서 없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작가 여명희는 근작에다 대략 이런 다소간 오리무중의, 암중모색의 제목을 부치고 있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어둠 속을 더듬어 찾는 것처럼 도무지 그 실체가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는 뜻이다. 제목이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실체? 실체가 뭔가. 오리무중이고 암중모색이기는 주제도 마찬가지. The Lights of Now and Your Hunch. 비교적 쉬운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 문장은 대충 현재의 빛과 (너의) 직관 정도를 의미하겠다. 그리고 우연한 현재 혹은 흐르는 현재 혹은 움직이는 현재와 (너의) 직관 혹은 예감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 의미가 오리무중이고 암중모색이어서 비교적 쉬운 단어들이지만 사전을 몇 번이나 뒤적여 확인해봤던 것 같다. 다시, 작가는 실체를 묻는다. 오리무중이고 암중모색의 실체 속을 헤매면서 더듬어 찾는다. 실체 속? 실체 속에서 실체를 찾는다? 그렇담 작가는 이미 실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혹 그래서 실체를 못 보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인식론의 문제가 아닌, 존재론의 문제가 아닌가. 이미 실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면 실체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몸소 겪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그래서 그 겪음의 물화된 형식을 지금 여기에 그림으로 내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여기? 여기서 지금 여기는 작가에게 각별하다. 바로 겪음의 차원과 관련해서이다. 지금 여기는 말하자면 그림이 최종적으로 벽에 걸리는(최종적인?) 시공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림이 제작되는(던) 시공간(차라리 아니면 오히려 시공간의 조건?)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림이 실제로 제작되던 시간으로 시계를 되돌려보면, 항상적으로 그리고 매번 그리고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 발생, 겪음을 그리는 것이 된다. 매번 그렇고 순간순간 그렇다. 항상적으로 일회적인 사건이고 발생이고 겪음이라는 말이다. 


여명희, 전시전경



여명희, 전시전경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결핍이 뭔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 아닌가(프로이트라면 욕망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리비도?). 매번 그리고 순간순간 지금까지 여기에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출현하는 일회적인 사건이며, 그런 일회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닌가. 이미 있던 무엇의 재현이 아니고 재확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선입견을 가지고 그림을 본다.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무엇(동일성)을 그림 속에서 찾고 재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이다. 매번 매순간 그런 선입견을 배반하는 일(비동일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예술(숭고)을 재현할 수 없는 것의 발생, 의미에 앞서 발생하는 사건, 무엇이라 규정할 수도 의미화 할 수도 없는(어떤 결정적인 의미로 옮길 수는 없는) 대상의 외침, 의미와 존재의 균열, 찢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자체, 발생 자체, 의식에는 알려지지 않은, 의식에 의해 구성될 수 없는 일회적인 사건이며 발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특히 회화에서의 색과 그림이 그 발생이고 사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회화는 바로 그 발생이고 사건에 대한 증언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매번 지금 여기서 새롭게 일어나는 일이니까 의미에 앞서 발생하고 의미화 되지 않는 사건인 것은 당연지사다. 정리를 하자면 매번 매순간 일어나는(생성되는) 일회적인 사건, 발생, 겪음인 만큼 사물과 사태와 행위가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상태(본질? 본성?)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의 특수성이다. 질 들뢰즈의 표상 없는 기호, 의미화의 기획에 반하는 기호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각별한 겪음의 차원(겪음의 미학?)을 지금 여기의 항상적으로 일회적인 생성논리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생성논리를 각각 같음과 다름, 그리고 있음과 없음의 조합(관계)으로 풀어놓는다. 여기서 같음과 다름은 각각 자기동일성의 논리와 비동일성의 논리에 해당하고 정체성의 논리 대 차이의 논리 혹은 생성의 논리에 해당한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자기동일성의 논리의 끝단에 클리세(그리고 약간 안쪽에 재현과 선입견)가 있고, 비동일성의 논리의 끝 쪽에는 지리멸렬이 있다. 여기서 예술(그리고 어쩜 작가)의 일은 클리세의 상태로부터 의미를 구제해 지리멸렬한 상태로 되돌려주는 것에 있다. 사물대상과 행위를 의미화 이전의 상태로, 특정의 의미로 결정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다중적이고 다의적인,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채로 자족적인 상태로 복원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있음과 없음은 각각 색과 공에 해당한다. 색즉시공공즉시색. 있는 걸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은 다 마음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혹이고 착각이고 착시현상이라는 말이다. 마음이 동하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마음이 틀어지면 있는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00처럼 보인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은 믿을 게 못된다. 마음은 주변의 온갖 상황논리에 연동되고 휘둘리고 민감하다.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고 덩달아 마음의 손(눈?)으로 그린 그림도 천변만화의 의미론적 꼴들을 품고 있다. 마음을 벗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곧 자신이므로 벗을 수도 없다(어쩌면 벗을 필요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손으로 그려 매번 가변적인 매순간 가역적인 그림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그림, 의미론적으로 움직이고 흔들리는 그림, 외부의 상황논리에 연동돼 있어서 볼 때마다 다른 그림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 어쩜 그림이 살아있다는 속설은 바로 이런 그림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그려서 보는 이의 마음마저 현혹시키는, 그런 미혹적인 그림을 의미할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최종적인 결론이 끊임없이 유보되는, 아예 결말이 없는, 이행과 생성만이 오롯한, 그런 살아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작가는 꿈을 그리다가 물을 그리고 재차 불꽃을 그린다. 그러므로 그 불꽃 그림 속엔 꿈이 겹쳐져 있고 물이 포개져 있다. 그래서 불꽃그림은 불꽃그림이 아니다. 아니면 식물을 그리다가 풍경을 그린다. 그러므로 풍경그림 속엔 식물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풍경은 풍경이 아니다. 그림들이 다 그런 식이다. 롤랑 바르트의 이론 중에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이론이란 것이 있다. 옛날에 종이가 없던 시절에 너무 많이 고쳐 써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를 두고 하는 말인데, 양피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고쳐 쓴 것, 그건 곧 부정이다. 주체를 예로 들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주체란 그렇게 지워진 부정들의 총체다. 주체에 대한 부정들의 집합이다. 부정이 뭔가. 흔들리는 결정이며 유보되는 최종이 아닌가.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런 의미론적으로 흔들리는 결정이며 유보적인 최종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폭포가 있는 풍경을 그렸고,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석유시추시설이 서 있는 풍경을 그렸고, 막막한 풍경을 그렸고, 어쩌면 각색된 기억을 그렸고, 그리고 전생을 그렸다. 붉은 섬광이 번쩍하는 풍경을 그렸고, 선혈이 낭자한 심장을 그렸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언덕을 그렸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쳐 보이는 하늘을 그렸다. 당신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가. 작가의 그림은 사실 알고 보면 끊임없는 미결과 유보와 망설임과 확신과 의심과 재고, 그리고 긴 더듬거림과 짧은 투신으로 점철된, 다만 얼룩과 의미 사이의 치열한 싸움을 증언해주는 우연하고 무분별한 흔적에 지나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리고 검은 상자들이 있다. 이건 또 뭔가. 관객을 위한 친절한 배려(간이의자)인가. 아니면 관객이 저마다의 관조(선입견?)에 빠지는 걸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한 도구(장애물)인가. 그림의 부분이며 연장(조화)으로서 의도된 것인가. 아니면 그림의 의미에 간섭하고 의미를 단절(불협화)시키기 위해 계획된 것인가. 아니면 공간경험을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 도입된 것인가. 여기에 왜 검은 색인가. 그건 알고 보면 고인의 유품에 검정색을 입힌 것이다. 그래서 혹 죽음? 메멘토모리? 이미지의 그러므로 삶의 무상성? 지금 여기에는 없는 무언가의 메타포? 알레고리? 그게 고인의 유품이라는 사실이 그림의 올바른 독해를 방해하는가. 올바른 독해? 작가는 혹 외부로부터의 상황논리, 예기치 못한 상황논리, 우연한 상황논리를 매개시켜 그림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미결의 상태며 유보적인 상태로 열어 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이클 프리드는 꼭 이런 상자처럼 생긴 미니멀리즘 조각(이를테면 도날드 저드)을 리터럴오브제 곧 즉자적 오브제라고 불렀다. 일상용품과 예술작품 사이에 있는, 일상에도 예술에도 환원되지가 않는(그래서 어쩜 예술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다만 오브제일 뿐이라고 했는데, 그런 즉자적 오브제를 닮았다. 그리고 연극성도 언급을 했는데, 사람들의 공간참여(아니면 간섭)를 매개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성질을 의미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 검은 상자들을 chasm이라고 부른다. 사전에 찾아보니 갈라진 틈, 구렁, 균열, 단절, 공백, 탈락, 차이를 의미한다. 사전에 나온 정의가 그렇다? 사전은 죽은 의미들의 집이다. 결정화된 의미들의 목록이라는 말이다. 결정화된 의미가 이 정도라면, 사전 밖의 의미에 대해서는 비결정성, 다중성, 다의성, 양가성, 중의성, 가변성, 가역성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로써 작가는 상자를 매개로 의미론적인 틈, 구렁, 균열, 단절, 공백, 탈락, 그리고 차이를 읽도록(혹은 겪도록) 의도한 것인데, 그 의도는 상자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림에도, 그림과 상자 사이에도, 그리고 작가의 작업을 대면하게 될 관객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작동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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