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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예술 거리의 조각

고충환

거리의 예술 거리의 조각 


환경조형물의 경우 
거리에서, 다소간 정치적인 
자연에서, 자연미술과 대지예술 
마을미술프로젝트, 지붕 없는 미술관 
도시재생사업 
스트리트퍼니처와 도시공학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예술은 길거리에 있다(로트레아몽). 모든 것이 예술이다(한스 아르프). 관심을 끌 수 있다면 무엇이든 예술작품이 된다(포레프스키). 러시아의 전위적인 예술가 마야코프스키 역시 거리의 미술을 주장한다. 여기에 예술가를 무당(다르게는 매개자)과 동일시하는 요셉 보이스까지. 이런 주장은 사실 마르크스에게로 소급된다. 마르크스는 진즉에 모든 사람이 잠정적인 예술가라고 했다. 저마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당연한 욕망을 예술적(혹은 미학적) 자질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가하면 보들레르는 아예 예술가의 삶 자체를 예술이라고 보기도 했다. 일상적인 삶을 예술적인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인데, 딜레당트가 그렇고 댄디즘이 그렇다. 예술애호가(딜레당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봤고, 짐짓 꾸며진 삶, 인위적으로 가공된 삶, 연극적인 삶, 모드(생활감각)를 창조하고 리드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을 실천하고 향유하는 삶이라고 본 것이다(보들레르는 예술의 원동력을 상상력이라고 봤는데, 여기서 상상력은 결국 댄디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한 상상력이었다). 좀 더 현대 쪽으로 오면 퀴어와 캠프(수전 손탁) 그리고 컬트가 모두 이런 문화사적 혹은 인문학적 배경 하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거리의 예술, 다소간 정치적인_lookingintothepast




거리의 예술, 다소간 정치적인_unregisteredcity_blindspotgallery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은 어쩌면 협의의 예술이다. 제도화된 예술이고 제도(예술계)에 의해 공인된 예술이다. 알다시피 제도는 변하기 마련인 것이고, 덩달아 제도가 인정해준 예술 역시 변하기 마련인 것이다. 현재 체제로 봤을 때 가장 강력한 제도적 장치는 자본주의인 것이고, 이를 수행하는 미술시장이다. 시장성이 예술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것인데, 시장성이 있으면 좋은 예술이고 시장성이 없으면 나쁜 예술이 된다. 이런 정식은 예술가로 하여금 미술시장에 의존하게 만드는 종속구조를 만드는데, 아예 드러내놓고 미술시장을 표방하는 아트페어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순수예술의 격전장으로 알려진 비엔날레 역시 그 구조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각각 머리(비엔날레)와 몸통(아트페어)에 비유할 수가 있을까. 머리는 머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자본주의에 복무하기에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여하튼 협의의 예술개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제도화된 예술 곧 예술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예술이고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보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계 바깥에도 예술은 있다. 모든 것이 (잠정적인)예술이고 모든 사람이 (가능적인)예술가라고 보는 광의의 예술이다. 그 예술이 전개되는 장이 거리다. 거리의 예술이다. 여기서 거리는 도시를, 사회를, 자연을, 세계를 아우른다. 그 장은 동시에 삶의 장이기도 하다. 제도와 관습, 가치관과 이상이 부닥치고 충돌하는 모순과 갈등의 장이다. 모순과 갈등이 생생한 표현을 얻는 장이다. 

환경조형물의 경우 

거리를 둘러보면 각종 환경조형물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때로 이건 아닌데 싶은 경우도 적지 않다. 조형물의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가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조형물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결여한, 어슷비슷한 조형물들. 환경과 따로 노는 생뚱한 느낌. 가뜩이나 여유가 없는 공간 속에 억지로 집어넣어진 느낌. 그리고 전형적인 느낌. 특히, 조형물엔 뭔가 전형적인 포맷이 있는 것 같다. 현대사회의 맹점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자기복제에 따른 개성의 상실을 들 수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도시도 똑같고, 공원도 똑같고, 사람들도 똑같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관습마저도 똑같다. 마치 하나의 플랜이 평등하게(민주적으로?) 공수되고 수급된 것 같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공장의 자동화 시스템이 그대로 전용된 것 같은 사회, 판박이 같은 사회(효율성의 법칙?) 속에 우리 현대인은 살고 있다. 여기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해지고 절실해진다. 예술은 판박이 같은 의식을 깨트려 그 속에 다른 종류의 의식을 심는 일이며, 조형물은 판박이 같은 외관을 깨트려 그 속에 다른 종류의 외관을 이식하는 일이다. 조형물은 말하자면 도시의 풍경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도시의 꽃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주변에 보면 훌륭한 조각가들도 많고 좋은 작품들도 많다. 평소에 그 조각가들의 작품 그대로 조형물로 나와진다면, 혹은 저 형태 저 재질 그대로 크기만 확대된다면 조형물 환경은 눈에 띠게 달라질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알만한 몇몇 작가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조형물과 작가가 선뜻 매치가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일부 조형물만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와 비전공자, 그리고 아예 분야가 다른 경우마저 합세된다. 

왜 그럴까. 왜 작품과 조형물과 작가가 매치 되지가 않을까. 작품과 조형물은 그 생리가 다른 것이어서 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엽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전혀 다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사실은 작품과 조형물을 별개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물론 다를 수도 있다. 문제는 조형물치고 작품만큼의 밀도감과 완성도를 유지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가의 문제가 나온다. 밀도와 완성의 정도를 단가에 맞추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단가가 높으면 그 정도가 올라가고, 단가가 낮으면 그 정도가 내려간다. 단가를 현실화함으로써 그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운 좋게 단가가 현실적인 수준으로 책정된 경우에도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그래서 정작 작가가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몇 푼 안 된다면 문제(수준)는 원점으로 되돌려진다. 여기서 구조적인 문제가 나온다. 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것, 단가를 현실화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작품과 조형물이 일치하는 것이 조형물 문제를 푸는 해법이다. 주변에 보면 조각공원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어디를 가야 조각을 구경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는 안 된다. 어디를 가든 조각을 구경할 수가 있어야 한다. 주변에는 조각공원보다 훨씬 더 많은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그 공원들마다 조각이 있어야 하고, 한 두 개씩만 있으면 충분하고 족하다. 조각공원을 조성하고 조각을 유치하는 일은 (매번 혹은 번번이) 일회적인 행사에 그치기보다는 상시적인 체제로 가야한다. 그리고 조형물에는 환경조형물과 조각공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형식의 도시 기반 시설물들 역시 조형물들이다. 이를테면 전광판들, 간판들, 건물들, 그리고 거의 모든 시설물들 등등. 현재 외형상으론 소위 도시디자인의 이름으로 이것들을 아우르고는 있지만, 다분히 행정적이고 전시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다. 조형물은 이 모든 시설물들과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는, 도시생태학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거리에서, 다소간 정치적인

거리는 삶의 장이다.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부닥치고 충돌하는 장이고, 모순과 갈등이 그 표현을 얻는 장이다. 아예 신문을 안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뉴스 보기가 겁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헬조선과 같은 자조 섞인 표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삶이 빡빡하고 현실이 살벌하다는 사실을 방증할 것이다. 진즉에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소사이어티(구경꺼리의 사회)를 현대사회의 한 징후로서 예시한 적이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이다. 상상하는 것은 이루어진다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 이면에서 살해와 폭력과 린치, 비리와 성 상품화는 일상이 되었고, 자살클럽과 고독사가 다반사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난민의 숫자가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다고 한다. 전쟁과 기아 때문에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사실은 값싼 노동력 때문에 받아들여졌다가 이후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로 변한 이민자정책이 난민문제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언제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나에게만 닥치지 않으면 그저 안도할 따름이다. 이런 안도의 이면에는 각종 사회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 중에 예를 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 같은 성정체성 문제도 있다. 성정체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관습의 결과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면서 비결정적인 성정체성(성정체성에 관한한 결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을 실천논리로 풀어낸 일군의 경향을 말한다. 이런 성정체성 문제는 일종의 개념의 교차로에 비유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와 에이즈, 몸 담론, 정상성과 비정상성 논의, 페미니즘과 재현의 문제, 성과 권력의 관계와 같은 핵심논제들이 성정체성 개념으로부터 파생되고 연동된다. 그리고 역할극(혹은 역할놀이)이 있다. 역할극이란 참여자가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극의 한 형식이다. 주로 역할을 바꿔 인터뷰하는 형식을 빌려 상호적인 관점과 상호이해를 끌어내는 과정을 거치는데, 대개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수자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이런 거리의 미술에는 크게 그라피티(낙서회화)와 행위예술이 두 축을 이룬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여전히 그렇지만 원래 그라피티는 언더그라운드아트로부터 파생되었다(현재 그라피티는 점차 제도권에 진입하고 있는데, 뉴욕의 유명 미술관들이 그라피티 전시를 한 적이 있고, 이후 국내에서도 2014년 경기도미술관이 전시를 유치한 적이 있다). 팝아트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인 키스 헤링이 원래 지하철에 낙서를 하다가 화상에게 발탁된 경우라거나, 바스키아의 회화가 그라피티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뱅크시도(현재 뱅크시가 그린 거리벽화가 경매에 붙여지기도 해서 이를 노린 파손행위가 뉴스를 타기도 했다).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허가받지 않은 공공건축물이나 시설물에 몰래 그림을 그리는 것인 만큼 감시를 피해야 하는 것에서 정치적인 실천논리와 의미를 얻는다(정치미술은 감시와 위반, 통제와 일탈의 숨 막히는 숨바꼭질에서 그 생명을 얻는다). 원래 저항문화의 한 형식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상품화 기획에 대해 새 피를 수혈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떠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퍼포먼스는 편의상 개념적 형식(예컨대 의미화 이전의 언어를 시의 신체로 간주하는 올슨의 개념시 혹은 해체시), 히피적 형식(예컨대 마르셀 뒤샹의 별모양으로 머리를 깍은. 여기서 별모양은 알다시피 유태인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를 표상한다), 죽음의 형식, 정신적 구도의 형식, 그리고 사회운동의 형식 정도로 구별해볼 수가 있겠다. 이 가운데 죽음의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에 연동되는 경우로서 정화의식, 통과의례, 죽음을 매개로 한 승화와 관련이 깊다(예컨대 아르토의 잔혹극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신적 구도의 형식은 명상체험에 착안한 경우로서 영적 체험을 위해 자기 몸을 공중에다 띄우는 테리 폭스, 자신의 실루엣을 땅 위에 흙으로 재현해 원초적인 존재와의 합일을 추구한 애나 멘디에타, 그리고 존 케이지의 선사상(선에는 좋고 나쁨의 구분이 없다. 마찬가지로 추와 미의 구분도 없다. 예술을 삶과 구분해서는 안 되며, 삶 속에는 오직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우연한 사건으로 가득차고, 다양하며, 무질서하고, 단지 순간적인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인 삶을 사랑하자) 정도가 주목된다. 


그리고 사회운동의 형식에서 행위예술은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을 띈다. 예컨대 요셉 보이스의 나무심기 프로젝트(채굴이 끝난 채석장을 숲으로 바꿔놓은 환경운동)와 정치 퍼포먼스(도열해 있는 경찰들 사이로 예술가들이 자나가는 행위예술)가 그렇다. 요셉 보이스는 예술가를 사회조각가 혹은 혁명가 혹은 무당으로서 정의하는데, 이 정의들 가운데 특히 사회조각가와 무당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해선 부연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소셜스컵처 곧 사회조각가로서의 예술가는 사람들의 의식을 조각(개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무당을 현대적인 용법으로 옮기자면 매개자가 되는데, 예술가의 기능과 역할과도 연동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종이팩을 머리에 뒤집어쓴 관객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한 가닥 줄에 의지해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의 재현을 통해 권력 메커니즘의 전횡을 고발한 플룩서스, 에이즈공포증을 다룬 퀼트 퍼포먼스(에이즈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낱낱이 퀼트로 수놓은 작품을 광장에다 전시한. 에이즈와 에이즈공포증의 차이에 주목한), 이민과 소수민족, 여성과 미술관 정책, 기아와 인종차별 등 각종 사회문제를 주제로 차용하는 게릴라걸즈, 로스엔젤리스의 여성의 집에 참여하는 공연그룹으로서 노사관계, 핵무장 해제, 성 차별 등의 문제를 이슈화하는 창녀, 예술의 어머니, 생존의 자매와 같은 그룹 활동이 주목된다. 그리고 개인으로는 광고보드나 전광판을 이용해 때로는 직설적인 그리고 더러는 반어법적인 문구를 내보내는 제니 홀처와 바바라 크루거, 로스엔젤리스의 거대한 벽으로 명명된 벽화운동을 통해 제3세계 출신 이민자들의 역사를 그리고 그 역사를 지역 청소년들에게 교육하는 한편, 지속적인 지역사업과 빈민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실천하는 주디 바카 등에게서 이런 행위예술을 매개로 한 정치적 지향성을 확인해볼 수가 있다. 아마도 퍼포먼스로는 가장 일반화된 유형이며 경우일 것인데, 시위 현장을 축제 현장으로 바꿔놓는다거나, 특히 피켓시위(피켓아트)를 매개로 논의의 장을 열어놓는다거나 하는, 그리고 여기에 각종 연대와 NGO를 포함하는 사회감시활동과 같은 일상적인(아니면 비일상적인?) 행위와 구별되지가 않는다.  

자연에서, 자연미술과 대지예술 

자연미술은 그 속에 자연과 생태 그리고 환경의 개념이 함축돼 있다. 이 개념들은 편의상으로만 구분될 뿐 사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돼 있어서 그 경계가 불투명한 편이다. 일각에서는 자연미술을 인간의 삶과는 별개의 자연 자체에 한정하고 적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삶은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자연이 아닌 자연관이며, 따라서 자연미술에는 자연 자체(이를테면 자연의 본성과 같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삶의 현장 속에 삶의 일부로서 편입된, 인간의 인식으로 변형되고 변질된 자연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져야 한다. 

창작 현장에서 자연은 대지미술에서처럼 조형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가 하면, 생태미술에서처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조형적인 수단으로서의 자연(관)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은 서로 겹친다. 또한 대지미술은 조형성을 그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왕의 조각과 설치미술의 연장선에 위치해 있으며, 때로는 아이디어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개념미술의 한 부류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장소특정성이 강조되기도 하고, 작업이 일시적으로만 존속됨으로 인해 기록에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때로 기록물과 작품이 동일시되는 경우마저 없지 않은데, 최근 들어 부쩍 그 의미기능이 강조되고 있는 아카이브와도 무관하지 않은 대목일 것이다. 

한편 생태미술은 자연의 본성에 작업을 일치시키는 경향을 띈다.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소재를 취해와 자연의 습성대로 형태를 만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이 그렇듯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는 소멸되고 마는 순환의 형태를 띠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생태미술에서는 프로세스 아트와 생물학적인 변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작업의 실질적인 변화(이를테면 광물질 소재의 부식과 유기적인 소재의 부패와 같은), 그리고 이에 따른 작업의 자연스런 소멸이 중시된다. 국내에서는 국내 최고의 야외설치미술운동그룹인 야투를 전신으로 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와, 유독 한겨울에 야외전시를 고집해온 겨울대성리전을 계승한 바깥미술회 정도가 일관성을 가지고 자연미술을 실천해온 경우로서 주목된다. 

마을미술 프로젝트, 지붕 없는 미술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 아님 증상으로 받아들여지기조차 한다. 이를테면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유년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했다(실제로 상실했다기보다는 그 진정한 의미를 잃었다). 그렇게 상실한 것들 중에 마을도 있다. 마을을 상실하면서 덩달아 골목길을 상실했고, 공동체문화를 상실했다. 마을미술프로젝트는 이처럼 사실상 그 의미가 축소되거나 왜곡된 마을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고, 마을과 함께 덩달아 상실된 공동체문화를 복원하는 일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내에서 마을미술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인데, 처음에는 마을정비사업과 청년일자리 발굴과 같은 복지정책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후 점차 지자체의 호응과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현재 순항 중에 있다.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개별주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구실을 찾아야 하는데, 그 구실이 다름 아닌 테마 곧 이야기(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는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일종의 발견 내지 발굴과 관련이 깊은데, 개별주체의 정체성을 형성시켜준, 그리고 그렇게 개별주체의 인격의 일부로서 스며든 어떤 존재론적 원형 같은 것이며, 그 원형을 자각하는 순간 내지 계기 같은 것이다. 하나의 마을로 치자면 전설과 설화, 민화와 민담 같은 것이다. 때론 그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도 있겠기에 발견이고 발굴이다. 

다시 말해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해선 이런 개별주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이야기, 하나의 마을을 다른 마을과 차별시켜주는 그 마을만의 원형적인 이야기를 발견하고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굴된 이야기에 대한 겉뜻과 속뜻을 헤아리는 일이 요구된다. 필요하다면 인문학적 이해며 해석의 과정이 요청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렇게 캐내진 이야기의 뜻과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한 연후에라야 그 이야기에 대한 조형적인 개입이 성공할 수가 있겠다. 이야기 자체도 해석해야 하고, 그 이야기를 조형으로 옮기는 일에도 해석이 필요하다. 이런 이중적 해석의 과정이 제대로 수행될 때 마을미술프로젝트는 비로소 그 성공을 기약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 마을미술프로젝트는 스토리텔링과 테마파크, 공동체문화와 생활사자료관과 같은 지역민의 삶을 기념할 수 있는 구실 혹은 계기와 미술이 만나질 수 있는 접점에 대한 형식실험의 장을 예시해주고 있다. 

도시재생사업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지역공동체문화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도시재생사업은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보다 큰 틀 안에서 작동한다. 현대도시는 수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다. 이를테면 거대도시와 높은 인구밀도, 구도심의 슬럼화와 공동화 현상 같은. 이런 현실 가운데에 아파트공화국이 있다. 국내에 아파트가 처음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만 해도 유학파들이 앞 다투어 설계를 도맡으면서 주거환경을 리드했지만, 이후 점차 아파트는 천편일률적인 성냥갑이 되어갔다. 그동안 조폭과 강남, 유하와 압구정동,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와 같은 영화 아이콘으로 부상할 만큼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도 했고, 한때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재개발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개발 사업 승인이 떨어진,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빈 방마다 예술가들이 입주해 한 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복원하고 재구성한다. 재개발(재건축)아파트프로젝트다. 
재개발아파트프로젝트가 개별주체의 주거환경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른 것이 청계천 프로젝트다. 그렇게 재개발아파트프로젝트와 청계천 프로젝트가 창작주체를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근대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불러 모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창작주체는 역사의 증인이 될 수가 있었고, 도시풍경(어반스케이프)의 매개자가 될 수가 있었다. 이 일련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들 가운데 성공적인 사례로서 자리매김한 경우로는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가 주목된다. 참여 작가들의 면면이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행태 그리고 도시디자인과 현대미술이 만나지는 접점과 관련해 공공미술의 규범이 되고 있다. 현재 각 지자체들이 유사사업을 구상하거나 추진하는 초기에 우선적으로 벤치마킹하는 케이스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도시적 삶의 환경에 자기를 매개시키는 것에서 미술의 당위성을 찾는 경우로는 홍익대 부근의 자생적인 미술의 한 형태랄 수 있는 포장마차미술과 같은 거리에서 이뤄지는 일상성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소위 거리의 미술과, 그리고 주요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즉흥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게릴라형 미술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최근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젠틀리피케이션을 주제화한 경우들이다. 값싼 임대료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삶의 환경이 개선되면 예술가들이 밀려나고 상권이 형성되는 것인데,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연희동과 연남동 그리고 문래동이 현재 그 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협동조합의 형태로 아예 건물을 사들이는 경우가 해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리고 빈 사무실이나 창고 그리고 공공건축물과 같은 유휴시설을 임시레지던시공간으로 전용하는 스쾃운동 역시 주목해볼 일이다. 그밖에 지역밀착형 혹은 지역 공동체 활동에 바탕을 둔 사례로서 인천동구 배다리마을에 거점을 둔 스페이스 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에 초점을 맞춘 안산 원곡동 중심의 커뮤니티스페이스 리트머스, 그리고 현재 폐소각장을 도시재생사업을 위한 아이템으로 발굴 추진하고 있는 부천시의 활동이 주목된다. 

스트리트퍼니처와 도시공학

그런가하면 스트리트퍼니처는 일상 자체를 잠재적인 예술의 한 형태로 보는 개념이다. 작게는 도시의 미관을 위해 설치된 환경조형물(벽화를 포함하는)을, 그리고 크게는 도시 계획을 아우른다. 이를테면 형형색색의 간판들, 육교와 다리와 고가도로, 지하철 출입구 지붕 장식(차양)과 환기구,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환풍기와 노랗고 파란 물탱크들, 그리고 모델하우스와 재건축아파트 등 도시의 인공적인 풍경과 인위적인 스카이라인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이 가운데 특히 모델하우스와 재건축아파트는 잠정적으로만 존재하는 제3의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미셀 푸코) 개념에 그 맥이 닿아 있어서 장소특정성 개념과 함께 소위 도시사회학을 설명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스트리트 퍼니처 자체는 결정적이고 독립된 장르라기보다는 기왕의 장르들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 개념이고 학제간 개념이다. 여기에는 도시계획과 사회공학 그리고 도시디자인이 하나의 축을 경계로 서로 맞물려있다. 그리고 그 자체 미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어 진정한 생활미술을, 삶의 예술을 실현한다는 강력한 실천논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렇게 거리의 예술은 현대미술이 그런 것처럼 인문학적 상상력을 위한 형식실험의 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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